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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종실록 14권, 숙종 9년 1월 19일 신유 2번째기사 1683년 청 강희(康熙) 22년

주강에 나아가다

주강(晝講)에 나아갔다. 어영 대장(御營大將) 윤지완(尹趾完)이 청대(請對)하여 같이 들어왔다. 임금이 《시경(詩經)》의 억편(抑篇)을 강론(講論)하다가 ‘벗에게 은혜를 베푼다[惠于朋友]’는 구절에 이르렀는데, 영경연(領經筵) 송시열(宋時烈)이 아뢰기를,

"인군(人君)에게는 벗이 없는 것 같습니다만, 《서경(書經)》에 이르기를, ‘신하여, 이웃이여!’ 하였으니, 이는 바로 벗의 뜻이 있습니다. 맹자(孟子)는 말하기를, ‘필부(匹夫)를 벗한다.’고 하였으며, 정자(程子)는 말하기를, ‘신하는 벗한다.’고 하였습니다 이는 후세(後世)에 군주와 신하의 분수와 의리가 엄하게 구별되어서 신하를 벗하는 도리가 없어졌기 때문에, 정자(程子)가 이것으로써 권하여 경계한 것입니다. 우리 조정에서도 문종 대왕(文宗大王)성삼문(成三問) 등의 여러 신하에게 반드시 그들의 자(字)를 불러서 대우하기를 마치 벗과 같이 하셨으므로, 지금까지도 아름다운 일로 전하여 옵니다."

하였다. 강(講)하기를 마치자, 송시열(宋時烈)이 말하기를,

"신이 죄를 기다리는 일이 있습니다. 문순공(文純公) 이황(李滉)의 문인(門人)이었던 조목(趙穆)이황(李滉)이 죽은 뒤에 그의 자손(子孫)을 보기를 마치 동기(同己)와 같이 하였습니다. 그가 관직(官職)에 있을 적에 지성(至誠)으로 경계하여 과실(過失)을 면하게 하여 주었으므로, 당시나 후세(後世)에서 모두 조목(趙穆)이 그의 스승을 위하여 도리를 다하였다고 일컬었습니다. 신은 문원공(文元公) 김장생(金長生)에게서 수학(受學)하였으므로, 그의 손자 김익훈(金益勳)과 신의 정과 뜻이 서로 친한 것은 다른 사람과 자연히 다릅니다. 근일(近日)에 김익훈(金益勳)이 죄를 얻을 것이 매우 중한데, 신이 평소에 경계하지 못하여서 그로 하여금 이 지경에 이르게 하였으니, 신은 실지로 조목(趙穆)의 죄인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 일이 경(卿)에게 무슨 혐의가 되겠는가?"

하였다. 송시열(宋時烈)이 또 휴치(休致)를 거듭 청하니, 임금이 박세채(朴世采)가 들어온 뒤에 의논하여 허락하겠다고 명령을 내리고서 이를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진휼청 당상관(賑恤廳堂上官) 민유중(閔維重)이 말하기를,

"호남(湖南)의 세미(稅米)를 이미 반으로 감하여 주도록 윤허하셨으니, 영남(嶺南)도 마땅히 똑같이 감하기를 허락하여야 할 것인데도 여러 사람의 의견이 매양 정공(正供)을 감봉(減俸)하는 것이 어렵다고 여깁니다. 그러니 수납(收納)하는 미곡(米穀)을 양감(量減)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송시열이 말하기를,

"수납(收納)하는 미곡(米穀)을 양감(量減)하여 주는 것은 전세(田稅)를 감하여 주어서 백성들에게 더욱 혜택(惠澤)을 주는 것만 못합니다."

하였다. 임금이 전세(田稅)를 감하여서 결(結)마다 3두(斗)로 하고, 삼수량(三手糧)063) 을 1두(斗) 2승(升)으로 하도록 하였으며, 호남(湖南)에 예에 의하여 진휼청(賑恤廳)의 미곡으로서 대신 주게 하였다. 판부사(判府事) 김수흥(金壽興)이 말하기를,

"신이 전에 각 군문(軍門)의 장관(長官)을 취재(取才)하는 일로써 차자(箚子)을 올렸더니, 묘당(廟堂)에서 이에 의하여 시행하기를 청하였으나, 군문(軍門)에서 아직도 거행하지 아니합니다. 이제 만일 내삼청(內三廳)의 예(例)에 의하여 취재(取才)하여서 수용(收用)한다면 일이 매우 공정(公正)하겠습니다."

하고, 병조 판서(兵曹判書) 남구만(南九萬)이 각 군문(軍門)의 대장(大將)들로 하여금 한 곳에 모여 취재(取才)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김수흥(金壽興)이 말하기를,

"주자(朱子)는 진휼(賑恤)하여 구제(救濟)하는 것에는 수리(水利)를 강구(講究)하는 것만 함이 없다고 말하였습니다. 일찍이 선조(先朝)에 있어서 따로 제언사(堤堰司)를 설치하여 전적으로 제언(堤堰)을 관장(管掌)하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근래에 이 법이 해이(解弛)해져 폐지되고, 다만 호조 판서(戶曹判書)로 하여금 겸하여 보살피게 하고 있습니다. 이제 비변사의 당상관(堂上官) 한 사람을 제언사(堤堰司)의 당상관(堂上官)으로 차출(差出)하시어 그로 하여금 수리(水利)에 전적으로 마음을 쓰게 하면 반드시 이익되는 바가 있을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윤지완(尹趾完)이 말하기를,

"본청(本廳)의 상번(上番)하는 군사는 다만 1천 명뿐인데도 지난해에 이미 5백명을 감하였습니다. 이제 또 수효 전체의 번(番)드는 〈군사를〉 감하면 숙위(宿衛)가 매우 소홀(疏忽)하게 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수효 전체의 번(番)드는 〈군사를〉 감할 수는 없으니, 감하지 말도록 하라."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14책 14권 9장 A면【국편영인본】 38책 622면
  • 【분류】
    왕실-경연(經筵) / 인사-관리(管理) / 인물(人物) / 재정-전세(田稅) / 군사-군정(軍政) / 군사-중앙군(中央軍) / 행정-중앙행정(中央行政) / 농업-수리(水利)

  • [註 063]
    삼수량(三手糧) : 삼수(三手)를 양성하는 경비에 충당하기 위하여 전결(田結)의 원세(元稅) 외에 내는 세미(稅米)·삼수(三手)란 훈련 도감(訓鍊都監)에 소속하여 세 가지로 나뉘어 무기(武技)를 익히는 군사. 곧 포수(砲手)·사수(射手)·살수(殺手)의 통틀어 일컬음.

○御晝講。 御營大將尹趾完請對同入。 上講《詩》 《抑》篇, 至惠于朋友, 領經筵宋時烈曰: "人君似無朋友, 而《書》曰: ‘臣哉隣哉!’ 便有朋友之義。 孟子曰: ‘友匹夫。’ 程子曰: ‘友臣。’ 後世君臣, 分義嚴截, 無友臣之道, 故程子以此勸戒之矣。 我朝文宗大王成三問諸臣, 必呼其字, 待之如朋友, 至今傳爲美事矣。" 講訖, 時烈曰: "臣有待罪事矣。 文純公 李滉之門人趙穆, 於死之後, 視其子孫如同己。 其在官時, 至誠陳戒, 俾免過失。 當時、後世咸稱爲其師盡道矣。 臣受學於文元公 金長生, 其孫益勳與臣, 情意相親, 自別於他人矣。 近日益勳得罪甚重, 臣平日不能規戒, 使至於此, 臣實趙穆之罪人也。" 上曰: "此於卿何嫌也?" 時烈又申請休致。 上以朴世采入來後, 議許爲敎而不許之。 賑恤堂上閔維重曰: "湖稅旣許減半, 嶺南似當一體許減, 而諸議每以正供之減捧爲難, 就收米量減如何?" 時烈曰: "減收米, 終不如減田稅之尤惠於民。" 上命減田稅, 每結三斗及三手糧一斗二升, 依湖南例, 以賑廳米代給。 判府事金壽興曰: "臣前以各軍門將官取才調用事陳箚。 廟堂請依施, 而軍門尙不擧行矣。 今若依內三廳例, 取才收用, 則事甚公正矣。" 兵判南九萬請使各軍門大將, 會一處取才, 上從之。 壽興曰: "朱子以賑救, 莫如講水利爲言。 曾在先朝, 別設堤堰司, 專管堤堰, 而近來此法弛廢, 只令戶判兼察。 今以備局堂上一員, 差堤堰司堂上, 使之專意水利, 則必有所益。" 上允之。 趾完曰: "本廳上番軍只一千, 而上年旣減五百, 今又沒數減番, 則宿衛甚爲踈虞矣。" 上曰: "不可盡數減番, 勿減。"


  • 【태백산사고본】 14책 14권 9장 A면【국편영인본】 38책 622면
  • 【분류】
    왕실-경연(經筵) / 인사-관리(管理) / 인물(人物) / 재정-전세(田稅) / 군사-군정(軍政) / 군사-중앙군(中央軍) / 행정-중앙행정(中央行政) / 농업-수리(水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