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영 대장 김익훈이 승정원 아방에 나와 김환의 일을 밀계하다
어영 대장(御營大將) 김익훈(金益勳)이 승정원(承政院) 아방(兒房)에 나아와서 밀계(密啓)하기를,
"김환(金煥)이 상변(上變)하기 전에 신에게 찾아와 역적 허새의 역모의 일을 낱낱이 이야기하고, 잇달아 초관(哨官) 전익대(全翊戴)가 유명견(柳命堅)과 더불어 왕래하는 의심스러운 상태와, 낙서령(洛西令) 이수윤(李秀胤)이 나라를 원망하는 부도(不道)한 말을 이야기하였는데, 유명견의 일이 더욱 의심스러웠으므로 전익대를 잡아 가두어 두었습니다. 지금 닷새가 지났는데도 아직 전익대를 추궁하여 잡아들이는 일이 없으니, 이는 필시 김환(金煥)이, ‘비록 의심스러운 단서는 있지만 역모와는 다른 데가 있다.’고 여겨 감히 함께 전달하지 않아서 그렇게 된 것이지마는, 이미 의심스러운 행적이 드러났으니, 덮어 두고 신문하지 않을 수는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국청(鞫廳)에 내려 보내어 함께 국문(鞫問)하게 하였다. 마침내 전익대와 유명견을 잡아들이고 이내 김환을 추문(推問)하니, 김환이 공초하여 말하기를,
"전익대가 말하기를, ‘내가 지난날 과거 유명견의 군관이었으므로 정의가 매우 깊었는데, 내가 죄를 입어 파직된 이유로 유명견이 어둠을 틈타 찾아와 위로하는 말을 해 주었다.’고 하였습니다. 후에 역적 허새의 흉서(凶書)를 보게 되자 유명견의 이름이 그 가운데 있었으므로 비로소 의심이 나서 전익대를 불러 다시 탐문해 보니, 전익대도 또한 ‘유명견의 말에 수상한 점이 많다.’고 대답하였습니다. 지난날 유명견이 국청에서 풀려난 후 가서 보니, 유명견이 말하기를, ‘그대는 병사를 거느리는 장관(將官)이니, 내가 만약 병정을 빌어 쓸 때가 있으면 그대는 마땅히 와야 할 것이다.’ 하고, 또 이르기를, ‘그대가 지금 비록 파직되더라도 어찌 직위를 얻을 때가 없겠는가? 아무쪼록 관대(冠帶)를 미리 준비해 두라’ 하였으니, 이는 반드시 깊은 뜻이 있었을 것입니다.
낙서령은 자칭 남인(南人)으로서 이어 말하기를, ‘강상(江上)에는 죄를 입어 몰려난 재상들이 많으나, 근래 기찰(譏察)이 한창 펼쳐진 이유로 서로 만날 수 없다’고 하기에 대답하기를, ‘기찰한다는 말은 필시 거짓말일 것이니, 정금(鄭錦)354) 이 나왔다고 하는 소란스러운 말과 같은 것이 아닌가?’ 하니, 낙서령이 말하기를, ‘정금의 이야기를 왜 헛소문이라 하는가? 정금의 군대가 이미 허사(許沙)에서 모습을 나타내었다.’ 하기에 대답하기를, ‘정금이 비록 나왔더라도 우리 나라의 무기가 정예(精銳)하니 섬멸하는 데 무슨 어려움이 있겠는가?’하니, 낙서령이 말하기를, ‘만약 날랜 배 수십척을 강 어귀에다 바로 대면 주민들은 일시에 무너져 흩어지고 성 안은 모두 달아나 숨어버릴 것이니, 나라 일이 어찌 위태롭지 않겠는가?’ 하였습니다.
그 후 또 와서 혀를 차고 길게 한숨을 쉬면서 도리에 어긋난 말을 늘어놓기를, ‘임금이 혼미하고 흐려 일 처리를 명백하게 하지 못하니, 한평수(漢平守)의 여종을 역적 이남(李柟)의 여종으로 잘못 알고 내수사(內需司)에 소속시켰다. 또한 오시항(吳始恒)의 사건만 보더라도 임금이 만약 밝게 살폈다면 반드시 그의 애매함을 알았을 것인데, 만약 유배당한 사람이 이런 일이 없지 않을 것을 의심 했다면 장차 반드시 원통하게 죽었을 것이다.’ 하고, 또 말하기를, ‘정금(鄭錦)이 만약 50여 척의 배에 날랜 군사를 태우고 한강(漢江)에 바로 들어와서 영을 내리기를 「나는 백성을 해치지 않을 것이니 너희들은 흩어지지 말라」고 하면서 창고를 열어 곡식을 나누어 준다면, 백성들은 음식물을 가지고 나와 영접하면서 함성을 지르며 불을 지를 것이니, 이어 변란을 일으키게 되면 비록 대신과 대장이 있더라도 달아나 숨기가 바쁠 터인데 누가 감히 손발을 놀릴 것인가?’ 하였습니다. 이 말은 모두 바로 어영 대장에게 글로 써 바쳤으므로 상변하는 글 속에는 함께 기록하지 않았습니다."
하였다. 전익대(全翊戴)가 공초(供招)하기를,
"정사년355) 무렵에 유명견이 수원 부사(水原府使)로 있을 때의 군관이 되었습니다. 유명견이 노계신(盧繼信)의 옥사로 옥에 갇혔다가 나온 후 찾아가 보니, 유명견이 말하기를, ‘그대는 병사를 거느린 장관인 이유로써 자주 오지 말기를 바란다. 어느 때 긴급히 부를 일이 있을 것이니, 그 때 거느리고 있는 군사와 함께 급히 달려 오라.’ 하였고, 설을 맞기 전에 아비를 뵙고자 충주(忠州)에 간다고 하였더니, 유명견이 고향에 내려가지 못하게 하였으며, 또 은정자(銀頂子)를 내어 주었으므로 지금 받아서 집안에 두었습니다. 그 후 죄를 얻어 파직되어 집으로 돌아가 병석에 누워 있었더니, 유명견이 날이 저문 뒤 와서 문밖으로 불러내어 묻기를, ‘그대의 집에 홍단령(紅團領)이 있느냐? 관직을 잃고 얻는 것은 일정하지 않으니, 만약 뜻밖에 벼슬을 얻게 되면 단령(團領)을 갑자기 마련하기 어려우니, 어찌 준비해 두지 않는가?’ 하며 이어 뒷날 자기를 찾아오라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유명견(柳命堅)이 공초(供招)하기를,
"지난번 감옥에서 나와 집으로 돌아왔더니, 전익대(全翊戴)와 전 편비(偏裨) 이천우(李天祐)가 와서 앉아 있었으므로 그들에게 말하기를, ‘지금부터는 절대 사람을 만날 생각이 없다. 너희 같은 무사는 더욱 만날 마음이 없으니 아무쪼록 물러가서 부르지 않는다면 오지 말아라.’ 하였는데, 다시 왔다는 말은 절대로 근거가 없습니다. 수원 부사로 재임시 가지고 있던 전립(戰笠)과 정자(頂子)는 벼슬을 내놓고 돌아온 뒤에, 입자(笠子)는 군관(軍官) 윤승위(尹承渭)가 가져 가고 정자(頂子)는 전익대가 가져간 듯 하다고 하니, 햇수가 오래 되어 상세히 기억할 수 없는데도 이를 빙자하여 말을 지어내니 실로 흉악하고 참혹합니다. 만약 병사를 거느리고 오기를 청할 뜻이 있어 설을 맞기 전에 서울에 머물기로 약속했을 것 같으면, 당연히 서울에 머물러 있어서 함께 모의해야 할 것인데, 어찌 고향에 돌아가 숨어 있을 이치가 있겠습니까? 전익대가 형장(刑杖)을 받은 후 여러 입을 거쳐 말을 보내기를, 한 번 찾아와 문병해 주기를 원한다고 했으므로, 그의 외림됨을 말하고 한 번도 사람을 보내어 문병하지 않았습니다. 본래 그의 집에 가지 않았다면, 단령(團領)이 있는지 없는지를 문답했다는 이야기는 절대 맞지 않습니다."
하니, 국청(鞫廳)에서 아뢰어 유명견과 전익대의 대질을 청하여 서로간에 변명과 힐문이 오고갔으나, 끝내 하나로 귀착되지 않았다. 또 윤승위(尹承渭)와 이천우(李天祐)를 잡아들여 심문하니, 공초한 내용이 유명견의 말과 다름이 없으므로 곧바로 풀어 주었다. 이때 수윤(秀胤)은 이미 허새의 옥사 때 감옥에 갇히었는데, 전익대의 말로 말미암아 다시 추문하니, 수윤이 공초(供招)하기를,
"정금(鄭錦)의 사건은 도청도설(道聽塗說)356) 에 불과하니, 계책을 헤아려 생각건대 역시 근자의 인심을 말한 것뿐일 것입니다. 오시항(吳始恒)이 형벌을 받고 중도에서 죽었다는 소문을 듣고, 그는 남에게 무함을 받아 가엾다고 하였습니다. 한평수(漢平守)의 노비(奴婢)에 대한 일은 단시 한평수의 집에서 한 말을 전했을 뿐입니다."
하였다. 국청에서는 감히 다 숨길 수 없다는 이유로써 형추(刑推)를 청하니, 임금이 하교하기를,
"그는 이름이 선파(璿派)357) 에 있으니, 외조(外朝)와는 특별히 다른데도 사대부와 결탁하여 임금을 원망하고 부도(不道)한 말을 함부로 하였고, 김환과 주고받았다는 이야기도 역시 감히 다 숨길 수가 없는데도 끝내 사실을 말하지 않으니, 지극히 흉악하고 간사하다."
하고, 각별히 엄중하게 심문하라고 명하였다. 수윤(秀胤)은 형추(刑推) 아홉 차례, 압슬형(壓膝刑) 한 차례로 죽고 말았다.
- 【태백산사고본】 13책 13권 13장 A면【국편영인본】 38책 606면
- 【분류】사법-재판(裁判) / 사법-치안(治安) / 변란-정변(政變) / 왕실-종친(宗親) / 왕실-국왕(國王)
- [註 354]정금(鄭錦) : 정지룡(鄭芝龍)의 후손. 명(明)나라 사람으로서 청(淸)나라에 대항하여 싸웠으며, 싸움에 크게 패하자 중국 본토를 떠나 바다를 건너 대만(臺灣)으로 들어가서 여기에 웅거하였음. 그가 죽은 뒤 그 아들 극상(克塽)은 청나라에 항복하였음.
- [註 355]
○御營大將金益勳詣政院兒房, 密啓曰: "金煥上變前, 來見臣, 備言賊璽逆節, 仍言哨官全翊戴與柳命堅往來可疑之狀及洛西令 秀胤怨國不道之語, 而命堅事, 尤爲可疑, 故拘置翊戴矣。 今過五日, 尙無推捉翊戴之擧, 此必煥以爲, 雖有疑端, 而與謀逆有異, 不敢竝爲陳達而然。 旣有可疑之跡, 則不可掩置不問。" 上下鞫廳, 竝鞫之。 遂拿翊戴、命堅, 仍推問煥。 煥招言: "翊戴曰: ‘吾嘗爲命堅軍官, 情義甚熟。 以吾被罪汰去之故, 命堅乘昏委來問慰。’ 云。 及見賊璽凶書, 命堅之名在其中, 故始爲致疑。" 招翊戴, 更爲探問, 則翊戴亦言: "命堅之言多殊常。 向日命堅自鞫廳放出後, 往見則命堅曰: ‘汝是領兵將官, 吾若有借用軍兵之時, 則汝宜來到。’ 云。 又謂之曰: ‘汝今雖汰去, 然豈無得職之時乎? 須預備冠帶。’ 此必有深意。 洛西令則自稱南人, 仍曰: ‘江上多有罪廢諸宰, 而近因譏察方張, 不能相會。’ 云。 答: ‘以譏察之說, 必是虛言, 無乃如鄭錦出來騷屑之言乎?’ 洛西令曰: ‘鄭錦之說, 何謂虛傳? 鄭錦兵已見形於許沙矣。’ 答: ‘以鄭錦雖出來, 我國兵器精銳, 何難勦滅?’ 洛西令曰: ‘若以輕船數十, 直到江口, 則居民一時潰散, 城中盡爲奔竄, 國事豈不殆哉?’ 其後又來見嘖舌長歎, 發不道之言曰: ‘主上昏濁, 處事不能明白。 漢平守之婢, 誤以逆柟之婢, 屬入內司。 且吳始恒事, 上若明察, 則必知其曖昧, 而若疑被謫之人, 不無是事, 則將必冤死。’ 云。 又曰: ‘鄭錦若以五十餘隻船, 載精兵, 直到京江, 下令曰: 「吾當不害人民, 汝等不散。」 仍發倉分給, 則人皆壼醬迎之, 皷噪放火。 仍爲作變, 則雖有大臣、大將, 奢竄之不暇, 誰敢措手足乎?’ 云。 此言皆卽書納于御營大將, 故不爲竝載於上變書中。" 云。 翊戴招曰: "丁巳年間, 命堅 水原府使時, 爲軍官矣。 命堅以盧繼信獄事就獄, 脫出後, 往見則命堅言曰: ‘汝以領兵將官, 不須頻來。 某時將有緊急招來之事, 其時與所領軍兵, 趁卽進來。’ 云, 辭以歲前覲父, 往忠州云, 則命堅令勿爲下鄕。 又出銀頂子給之, 故今方受置家中。 其後受罪汰去, 歸家病臥, 命堅昏後來招於門外問曰: ‘汝處有紅團領耶? 官爵得失無常, 若不意得官, 則團領猝難辦, 何不措置耶?’ 仍令後日來訪云。" 命堅招曰: "頃者脫獄還家, 則翊戴及前偏裨李天祐來坐, 故言之: ‘以今後絶不欲見人, 如汝武士則尤不欲見, 須退去, 不招則勿來。’ 更來之說, 千萬無據。 爲水原時所有戰笠頂子, 遞來後, 笠子則軍官尹承渭持去, 頂子則翊戴似爲持去。 年久未能詳記, 而憑藉做出, 實爲凶慘。 如有領兵請來之意, 歲前留京之約, 則當留洛中, 與之謀議, 寧有歸蟄鄕庄之理乎? 翊戴受杖之後, 轉轉送言, 願得一番臨問, 故言其猥濫, 一不送人問病。 旣不往渠家, 則團領有無問答之說, 萬萬不似。" 云。 鞫廳啓請命堅與翊戴面質, 互相辨詰, 終不歸一。 又拿問承渭、天祐, 招辭與命堅言無異, 卽爲放送。 時, 秀胤已於璽獄時就囚, 以翊戴言更推, 則秀胤招曰: "鄭錦事, 不過塗聽道說, 而料度計策, 亦以卽今人心言之而已。 吳始恒則聞受刑死中路, 言其爲人所誣爲可憐, 而漢平守奴婢事, 只以漢平家所言傳之。" 云。 鞫廳以不敢全諱, 請刑推, 上敎曰: "渠名添璿派, 殊異外朝, 而締結士夫, 肆爲怨上不道之言, 與煥問答之說, 亦不敢全諱, 而終不吐實, 尤極凶詐。" 命各別嚴訊。 秀胤刑推九次, 壓膝一次, 物故。
- 【태백산사고본】 13책 13권 13장 A면【국편영인본】 38책 606면
- 【분류】사법-재판(裁判) / 사법-치안(治安) / 변란-정변(政變) / 왕실-종친(宗親) / 왕실-국왕(國王)
- [註 35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