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포법 시행에 관한 평안 병사 이세화의 상소
평안 병사(平安兵使) 이세화(李世華)가 상소(上疏)하기를,
"백성이 가장 견디기 어려운 것으로는 군병(軍兵)·노비(奴婢)의 신역(身役)보다 더한 것이 없습니다. 군병은 한 집에 군병의 수가 많건 적건 물론하고 군병마다 베[布]를 거두고, 노비(奴婢)는 남녀를 아울러 다 신공(身貢)을 거둡니다. 그 생계(生計)를 살펴보면 한 자[尺]의 베[布]도 나올 데가 없는데도 2구(口)가 같이 살면 4필(匹)을 받아들이고, 3구가 같이 살면 6필을 받아들이며, 5, 6구가 되면 거두어들이는 것이 10필이 넘습니다. 남자가 농사를 지어도 먹을 수 없고 여자가 베를 짜도 입을 수 없으므로, 마침내 가산(家産)을 죄다 팔고 각자 흩어지면, 침징(侵徵)하는 근심거리가 이웃과 겨레붙이에게 미치고, 또 겨레붙이의 겨레붙이와 이웃의 이웃에게 미쳐 매질이 뒤따릅니다. 한 나라의 백성은 모두 다 우리 임금의 적자(赤子)인데, 이들만이 치우치게 혹독한 고초를 받게 하고, 유관(儒冠)·무복(武服) 차림의 사족(士族)은 명목(名目)을 핑계삼으나 책을 가지고 다니며 글을 읽어 어릴 때에 배우고 장성하여 실행하지도 못하거니와 활과 살을 가지고 급할 때에 의지가 될 만하지도 못하는데 한가하게 일생을 지내며, 한 자의 베나 한 말의 곡식도 내지 않으니, 허다한 군국(軍國)의 수용(需用)을 오로지 하호(下戶)의 백성에게만 요구합니다. 이것이 과연 신역을 고르게 하는 뜻이기에 반드시 시행하려 하겠습니까마는, 구차하게 그 뜻을 따르는 까닭이 무엇이겠습니까?
흉년이 들면 세초(歲抄)043) 를 멈추고 백성이 흩어지면 감포(減布)를 살피는 것은 본디 아름다운 뜻이겠으나, 국가가 불행하여 기근(飢饉)이 잇따르는데 장정을 등록하여 신역을 배정하는 일을 해마다 그만둔다면 신역에 종사할 군병이 나올 데가 없을 것이고, 도망하고 죽는 백성이 잇따라서 액수에 모자라는 것이 점점 많아지는데 감포(減布)를 살펴 내는 것을 상례(常例)로 삼는다면 조도(調度)의 계책도 어찌할 길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난해에는 흉년을 헤아리지 않고 특별히 각 고을을 시켜 죽은 자의 대신을 충정(充定)하게 하여 양정(良丁)을 찾아 모을 즈음에 소요가 매우 심하였는데, 또 각 고을을 시켜 도망한 군졸(軍卒)·노비(奴婢)의 사촌(四寸) 이상의 겨레붙이를 살펴 내어 신포(身布)를 독촉하여 거두게 하여 잡아다가 힐문할 즈음에 설움과 원망이 한층 더하였습니다. 지난해 한때의 은혜가 마치 수레에 가득 실은 섶이 불타는 데에 한 잔의 물을 붓는 것과 다를 것이 없으니, 잠시 변통하는 은혜와 계속하기 어려운 방도는 처음부터 하지 않는 것만 못합니다. 호포(戶布)의 의논은 마지못하여 나왔거니와, 이 법에는 장애 되는 것이 많다는 것을 누구인들 모르겠습니까마는, 그 뜻을 요약하면 본디 신역을 고르게 하는 방도인데, 한편에서는 ‘전택(田宅)에는 본디 차별이 없으므로 재상(宰相)의 집의 전답(田畓)에도 본디 납세하지 않는다는 규례가 없는데, 사대부(士大夫)의 집만이 또한 어찌 뭇사람이 신역에 종사할 때에 빠져서 납세하지 않고 부역하지 않는 백성이 될 수 있는가?’ 하고, 한편에서는 ‘이런 흉년을 당하였는데 3백년 동안 시행하지 않던 법을 갑자기 시작할 수 없다.’ 하니, 이 두 끝을 잡아서 조용히 강구하여 시행하거나 그만두면 될 것인데, 어찌하여 반드시 미리 소란을 일으켜서 협화(協和)의 도리를 어겨야 하겠습니까?
지난해에 연신(筵臣)이 탑전(榻前)에서 결정됨에 따라 글을 보내어 편리하겠는지를 물었는데, 도신(道臣)이 답한 것은 노비(奴婢)마다 바치는 공물을 없애고, 호포(戶布)로 마련하기를 바라는 것이었고, 신(臣)이 답한 것은 군병(軍兵)마다 바치는 두 필(匹)의 베[布]를 없애고 원호(元戶)인 군병은 호포만을 바치고 솔정(率丁)인 군병은 반으로 줄여서 베를 거두며, 모자라는 수는 한가한 곳들에서 바치는 베로 용도를 채우는 것이 마땅하겠다는 것이었으니, 노비·군병이 이 말을 듣고서 이 법을 시행하기를 바라는 것은 본디 당연한 형세입니다. 또 교생(校生)의 고강(考講)과 군관(軍官)의 시사(試射)에서 도태되면 군역(軍役)에 충정(充定)하라는 영이 또한 조정의 사목(事目)에서 나왔는데, 늘 신역을 피하여 한가히 노는 자가 다 이들이니, 이 영(令)이 퍼지고 나서는 모두가 경동(驚動)하여 장차 보전하기 어려울 듯이 여겼고, 호포에 관한 소식을 듣게 되어서는 다들 ‘도태되어 군오(軍伍)에 충정되어서 사람마다 두 필(匹)의 신역(身役)을 장만하여 바치는 것보다 집에 따라 베를 내어 경재(卿宰)·사대부(士大夫)와 같은 일을 하는 것이 낫겠다.’ 하였습니다. 조관(朝官)·출신(出身)·생원(生員)·진사(進士)·품관(品官)이나 초시(初試)에 입격(入格)한 자들일지라도 다 자손과 형제 및 겨레붙이 가운데에 고강에서 도태되거나 시사[射]에서 도태될 자가 있을 우려가 있고, 또 여느 때에 이웃·겨레붙이 때문에 침징(侵徵)당하는 일이 없지 않으니, 노비나 군병이 바라는 것과 같지는 않더라도 바라는 자와 바라지 않는 자가 어느 쪽이 많고 적은지는 미루어 알 만합니다.
그 가운데에서 바라지 않는 자는 입작(入作)의 무리뿐인데, 아침에는 동으로 옮기고 저녁에는 서로 옮겨서 신역(身役)을 피하려 꾀하니, 이 무리처럼 미운 것이 없습니다. 그 박쥐 같은 꼴을 버려두고 전혀 단속하지 않는 것은 워낙 의의(意義)가 없으므로, 접때 도신(道臣)이 회보(回報)하는 문서에 ‘호포법(戶布法)을 도내(道內)에서 시행하려 한다면 이 일은 함경남도와 해서(海西)의 산군(山郡)에서도 아울러 시행해야 한다.’고 한 것이 참으로 기틀의 마땅한 데에 맞습니다. 다만 조정의 의논은 신들이 변통하기를 바라는 바에 과연 벗어나지 않을는지 모르겠습니다. 혹 노비의 공물을 예전대로 사람마다 거두고 군병의 신역을 예전대로 두 필(匹)로 한정하고 교생(校生)의 고강(考講)과 군관(軍官)의 시사(試射) 등의 일을 전에 분부한 대로 거행하여 여느 때에 신역이 없는 집에서만 베[布]를 거둔다면, 이것은 바로 이른바 백성이 다 바라지 않는 것이어서, 사목(事目)이 반포되더라도 결코 그른 일을 구차히 따를 리가 없으니, 이 법이 시행되고 시행되지 않는 것은 오직 사목(事目)이 어떠하냐에 달려 있을 뿐입니다. 사목이 오기 전이면 곧 미연(未然)의 일인데, 지금 부회(傅會)하는 비방은 무엇에 의거하여 단정(斷定)한 것인지 신은 모르겠습니다."
하였는데, 답하기를,
"분부에 따라 진언(進言)한 것이 매우 아름다우니, 묘당(廟堂)을 시켜 의논하여 처치하게 하겠다."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12책 13권 7장 A면【국편영인본】 38책 579면
- 【분류】정론-정론(政論) / 재정(財政) / 군사-군역(軍役) / 신분-천인(賤人)
- [註 043]세초(歲抄) : 매년 6월과 12월에 사망, 또는 도망하거나 질병에 걸린 군병(軍兵)을 보충하는 것을 말함.
○平安兵使李世華上疏曰:
民之最所難支者, 無過於軍兵、奴婢之役。 軍兵則一家之內, 勿論人口多少, 逐名徵布;奴婢則竝男女而有貢, 察其生計, 無尺布出處, 而二口同居者, 納四疋, 三口同居者, 納六疋, 若至五六口, 則徵斂過十疋。 男耕不能食, 女織不能衣, 終至於盡賣家産, 各自離散, 則侵徵之患, 及於隣族, 又及於族之族、隣之隣, 而鞭扑隨之。 一國生靈, 莫非吾君之赤子, 而獨使此屬, 偏受毒楚, 儒冠武服, 假托名目, 旣不能挾冊讀書, 幼學壯行, 又不能操弓挾矢, 緩急可恃, 而悠悠一生, 不費尺布斗粟, 許多軍國之需, 專責於下戶編氓, 此果均役之意, 而必欲爲之, 苟循其意者何歟? 年凶而停止歲抄; 民散而査覈減布, 此固美意, 而國家不幸, 飢饉連仍, 簽丁定役, 每年停廢, 則應役之軍, 無從而出, 逃故相繼, 闕額漸夥。 査出減布, 率以爲常, 則調度之計, 亦沒奈何, 故上年則不計凶歉, 特令各邑充定物故之代, 而搜括良丁之際, 騷擾已甚。 又令各邑, 査出逃亡軍卒、奴婢四寸以上, 責徵身布, 而推捉究問之際, 愁怨一倍。 向年一時之惠, 無異車薪之杯水, 姑息之恩, 難繼之道, 初不如不爲也。 戶布之議, 不得已而發, 此法之多所窒礙, 人孰不知, 要其大指, 固是均役之道。 一則曰田宅本無差別, 宰相家田畓, 本無不稅之規, 士夫家又安得獨漏於衆役之日, 爲不征不調之民乎? 一則曰當此凶年, 三百年所未行之法, 猝難創開, 執此兩端, 從容講劘, 或行或止可矣。 何必徑先起閙, 以乖協和之道乎? 上年筵臣因榻前定奪, 書問便否, 道臣所答, 則欲除奴婢逐口之貢, 以戶布磨鍊。 臣之所答, 則欲除軍兵二疋之布, 元戶之爲軍者, 只捧戶布, 率丁之爲軍者, 減半徵布, 而不足之數, 以閑雜等處所捧之布, 充於用度爲當云。 奴婢、軍兵之聞此說, 而願行此法, 勢所固然。 且校生考講、軍官試射, 汰定軍役之令, 又出於朝家事目, 常時避役閑遊者, 皆此輩也。 此令旣播之後, 擧皆驚動, 若將難保。 及聞戶布之奇皆以爲, 與其汰定軍伍, 每人而備納二疋身役, 不若隨其家戶出布, 與卿宰士夫, 同其事云。 雖朝官、出身、生進、品官、初試入格之類, 皆有子孫兄弟及族屬中, 汰講汰射之憂, 又不無常時隣族之侵, 則雖不如奴婢、軍兵之情願, 而願與不願者之多少, 可推而知也。 其中不願者, 只是入作之類, 朝東暮西, 謀避身役, 未有如此輩之可惡, 一任其蝙蝠之態, 專不管束, 元無意義。 向者道臣回報文書中, 戶布之法, 欲行於道內, 則事當竝施於咸鏡南道、海西山郡者, 實合機宜。 第未知廟議, 果不外於臣等所欲變通者乎, 若或奴婢之貢, 依前逐口徵責; 軍兵之役, 依前二疋爲限, 校生考講、軍官試射等事, 依前分付擧行, 只爲徵布於常時無役之戶, 則此正所謂民皆不願, 而事目雖頒, 斷無苟循誤事之理。 此法之行未行, 唯在於事目之如何耳。 事目未到之前, 則便是未然之事, 臣未知卽今傅會之謗, 何所據而斷定也。
答曰: "應旨進言, 深用嘉尙。 當令廟堂議處焉。"
- 【태백산사고본】 12책 13권 7장 A면【국편영인본】 38책 579면
- 【분류】정론-정론(政論) / 재정(財政) / 군사-군역(軍役) / 신분-천인(賤人)