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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종실록 12권, 숙종 7년 12월 15일 갑오 5번째기사 1681년 청 강희(康熙) 20년

호포 실시에 관한 병조 참판 이사명의 소

병조 참판(兵曹參判) 이사명(李師命)이 소(疏)를 올려 호포(戶布)에 대하여 논(論)하였는데, 그 대략에 이르기를,

"현재 중앙과 지방의 비용이 해마다 수십만 필(匹)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신이 무오년763) 의 서울과 지방의 장부[帳籍]를 가져다 상고하여 보니, 원호(元戶)가 1백여 만이며 그 중에서 대략 공천(公賤)·사천(私賤)과 폐질자(廢疾者)·유개자(流丐者)로 포(布)를 징수할 수 없는 자 40여 만 호를 제외하면 포를 징수할 수 있는 실호(實戶)는 70여 만입니다. 지금 만약 당(唐)나라 때 민정(民丁)을 계산하여 용(庸)764) 을 하게 하던 법을 대략 모방하여 한 집안의 남녀(男女) 상하(上下) 8구(口) 이상을 완호(完戶)라고 하여 봄과 가을에 각각 포(布) 한 필(疋)을 바치도록 하고, 8구 이하를 약호(弱戶)라고 하여 단지 가을에만 한 필을 바치도록 하되, 그 토산(土産)을 따라서 더러는 면주(綿紬)로 더러는 마저(麻紵)로 더러는 은전(銀錢)으로 하게 하면, 한 해에 바치는 것이 8, 90만 필이 될 것이니, 제반 신역(身役)의 값과 주현(州縣) 군병(軍兵)의 수요에 두루 지급할 수 있을 것입니다. 대체로 이 법이 옛날에 가장 적합하였던 것은 단지 호강(豪强)한 족속들이 감히 혼자만 빠져나올 수 없고 하호(下戶)들도 치우치게 고통을 당하지 않는 데 있으니, 재물을 거워들이는 것이 적으며, 사람을 부역시키는 것이 균등하며, 규정을 만드는 것이 간략하며, 법을 취함이 원대하여, 전지(田地)가 있는 자는 여기에 따른 세금이 있으며 가호(家戶)가 있는 자는 여기에 따는 포(布)가 있어 백성들에게는 일정한 구실이 있으며, 국가에는 항상 쓸 수 있는 재물이 있게 되며, 한정(閑丁)이 남아 돌아 투사(鬪士)가 저절로 갑절이나 되며 백성들의 구실이 줄어들어 국가의 비용이 저절로 충분하게 됩니다. 의논하는 자가 말하기를, ‘벼슬이 있고 직임이 있는 자가 아래로 민간의 호적에 편입하여 같이 집집마다 부과되는 부역을 한다면 너무나 군자(君子)와 야인(野人)의 구별이 없는 것이다.’고 하였는데, 이 말은 그렇지 않은 바가 있습니다. 귀천(貴賤)을 구분하지 않고 균일하게 신포(身布)765) 를 바치게 한다면 의논하는 사람의 말이 오히려 옳겠지만, 집집마다 구실을 바치는 것이 전지의 조세(租稅)를 내는 것과 다름이 없으니, 재상(宰相)의 전지도 이미 세금을 면하지 못한다면 이런 가호(家戶)가 어떻게 홀로 누락될 수 있겠습니까? 의논하는 자가 또 말하기를, ‘지금 편성된 호적의 태반이 빈곤하고 잔약하여 거둬들이는 즈음에 틀림없이 채찍을 사용하여 포학한 것으로 포학한 것을 바꾸게 되어 서로의 차이가 거의 없다.’ 하는데, 이것이 비록 같은 듯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한 집안의 늙은이나 젊은이나 식구 수를 계산하여 포(布)를 거둬들이면서도 오히려 민망하고 가련하게 여기지 않고 당연하게 여기며, 한 가호에 한 필을 해마다 그 용(庸)으로 다하게 해도 오히려 무겁게 여기면서 바치기 어렵다고 하니, 이것은 실로 마음씀이 균일하지 않고 치우침이 좌우(左右)하여 그렇게 된 것입니다. 더구나 도망하였거나 물고(物故)되었거나 아약(兒弱)에게와 백골(白骨)에게 포(布)를 징수하는 폐단은, 고금(古今)에 찾아본들 어찌 이런 가혹함이 있었겠습니까? 호포(戶布)를 시행함에 있어서 비록 더러 원망이 있다고 하더라도 어찌 오늘날의 신역(身役)보다 낮지 않겠습니까? 의논하는 자가 또 말하기를 ‘우리 나라의 천례(賤隷)는 본래 양민(良民)보다 많은데, 만약 이 부류들을 제한다면 구실을 부담하는 집이 틀림없이 적을 것이며, 아울러 포(布)를 거둬들이는 데 첨입시킨다면 한 몸에 두 가지 구실을 하게 될 것이다.’ 하고, 또 말하기를, ‘정장(丁壯)은 편오(編伍)766) 에 돌리고 노약(老弱)은 그 보솔(保率)에 채운다면 마침내 겹으로 구실하는 근심이 있을 것이다.’고 하는데, 이것은 실제로 호포(戶布)의 근본 뜻을 몰라서 그런 것입니다. 시험삼아 관서(關西)의 호구(戶口)를 관찰해 보면, 17만 내에 공천(公賤)과 사천(私賤)이 겨우 3만여 호(戶)에 이르니, 이것으로 미루어 보면 다른 곳도 비슷하게 알 수 있습니다. 어찌 70여 만의 호(戶)로서 50만 필(疋)의 구실이 부족하여 천례(賤隷)에게까지 침해할 수 있겠습니까?

신이 반드시 이 법을 결단하여 시행하려고 하는 것은, 한갓 양민(良民)의 부역을 펴게 하려는 것뿐만 아니라, 국가를 위하여 깊고 멀리 염려하는 것입니다. 오위(五衛)가 이미 무너진 뒤에 지금 전투를 맡은 군졸은 단지 어영(御營)·정초(精抄)·별대(別隊)의 호수(戶首)와 훈국(訓局)의 포수(砲手) 3만여 인입니다. 그런데 속오군(束伍軍) 20여 만과 총융청(摠戎廳)·수어청(守禦廳)의 아병(牙兵) 및 각도(各道)에서 새로 뽑은 2만여 인은 모두 향토(鄕土)의 자위(自衛) 집단으로 훈련받지 않은 자들입니다. 갑자기 급박한 일이 있으면 모두 믿을 수 없습니다. 지금 호포(戶布)를 팔도[八路]에 통용하여 시행한 뒤에는 각역(各役)의 호수(戶首) 외에 보인(保人)으로서 포(布)를 거둬들이던 부류는 모두 한가하게 놀며 구실이 없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신이 여러 아문(衙門)의 각도(各道) 군안(軍案)을 상고하여 보니, 기병(騎兵)과 보병(步兵)의 호적에 양계(兩界)를 제외한 호수와 보인을 합하면 거의 50만인데, 어영청(御營廳)의 호수와 보인을 합하면 8만여 인이며, 정초(精抄)와 포보(砲保)와 별대(別隊)를 합하면 10만 인이 되니, 합해서 계산하면 30여 만입니다. 거기서 이미 훈련된 병졸 4만 인과 또 보인(保人) 중에서 날래고 용맹스러운 자 8만 인을 뽑아 12만 인을 만들어 한 대(隊)에 화병(火兵) 2인을 지급하여 12번(番)으로 나누어 3대장(大將)에게 소속시키면, 1번(番)을 6천(千) 인으로 만들어 3천 인은 서울의 3영(營)에 입번(入番)시켜 두 달 동안 조련(操鍊)해서 교체하게 하며, 3천 인은 육도(六道)에 나누어 소속시켜 두 달 동안 입방(入防)하다가 돌아가도록 하여 윤번(輪番)으로 상하(上下)가 교대로 중앙과 지방에 있게 해서 송(宋)나라 조정의 금위(禁衛) 제도와 같이 한다면, 한 해 동안 훈련된 군사가 거의 4만 인에 이를 것이며, 3년 안에 12만의 화포병이 모두 정교하게 훈련된 군종이 될 것입니다. 다만 서울과 지방에 모두 입방(入防)과 입번(入番)의 군사를 배치하게 되면 당장 군량 5만여 석을 써야 하는데, 서울의 경우는 연해(沿海)와 연강(沿江)의 호포(戶布)를 쌀로 바꾸어서 수송하여 바치게 하고, 지방의 경우는 호포를 선혜청(宣惠廳)에 옮겨 주어 산군(山郡)의 대동법(大同法)에 의해 부과되어 거둬들이는 무명을 쌀로 바꾸어 감영(監營)과 병영(兵營)에 실어다 바치도록 한다면, 비용은 10여 만 필에 지나지 않지만 군사들은 오래도록 배부를 수 있으며, 관(官)에서는 다시 비용을 들이지 않아도 될 것입니다."

하고, 소(疏)의 끝부분에 또 특별히 중신(重臣)으로 재능과 식견이 있는 자를 가려뽑아 그로 하여금 산해(山海)의 이익을 맡아 주관하게 하고, 겸해서 주선(舟船)의 세(稅)를 관리하도록 하여, 고금(古今)을 참작해서 그 방편(方便)을 다하도록 한다면, 백성들에게 세금을 더 부과하지 않아도 국가의 비용이 저절로 충분해질 것이라고 주청하고, 또 화매(和賣)해야 곡식을 축적하는 방편을 진술하자, 임금이 답하기를,

"누누이 조목조목 계획한 것이 오로지 나라를 근심하는 심원한 생각에서 나왔으니, 매우 아름답게 여기고 칭찬할 만하다. 정말 이것을 잘 시행한다면 누적된 폐단을 제거할 수 있고 생민(生民)들을 소복(蘇復)시킬 수 있을 것이니, 어찌 크게 다행함이 아니겠는가?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모두 상세하게 반복(反覆)해서 변통(變通)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11책 12권 60장 A면【국편영인본】 38책 571면
  • 【분류】
    정론-정론(政論) / 재정(財政) / 군사(軍事) / 호구-호적(戶籍)

  • [註 763]
    무오년 : 1678 숙종 4년.
  • [註 764]
    용(庸) : 노역 대신에 무명 등의 베로 내는 세금.
  • [註 765]
    신포(身布) : 평민이 신역(身役) 대신 바치는 베.
  • [註 766]
    편오(編伍) : 대오를 편성함.

○兵曹參判李師命上疏, 論戶布, 略曰:

卽今中外之費, 歲不過數十萬疋。 而臣取考戊午年京外帳籍, 則元戶一百餘萬, 而略除公私賤、廢疾、流丐, 不可徵布者, 四十餘萬戶, 則實戶徵布, 可得七十餘萬。 今若略倣時計丁, 而爲庸之法, 一家男女上下八口以上, 謂之完戶, 春秋納布各一疋;八口以下, 謂之弱戶, 只捧秋一疋, 而隨其土産, 或以綿紬, 或以麻紵, 或以銀錢, 則一歲所捧, 可八九十萬疋。 諸般身役之價, 州縣軍兵之需, 皆可以周給矣。 蓋此法之最合於古者, 只在於强族不敢獨漏, 下戶不至偏苦, 而其斂財也寡, 其役人也均, 其裁規也簡, 其取法也遠, 有田者此有稅, 有戶者此有布, 民有一定之役, 國有常用之財, 閑丁有餘, 而鬪士自倍矣;民役旣減, 而國用自足矣。 議者曰: "有官有職者, 下同編戶, 俱輸戶役, 殊無君子、野人之別。" 此言有所不然。 不分貴賤, 均捧身布, 則議者之說, 猶或近之, 家調戶征, 與田租無異, 宰相之田旣不免稅, 則有此家戶, 安得獨漏? 議者又曰: "今之編戶, 太半貧殘, 收捧之際, 必用鞭撻, 以暴易暴, 相去無幾。" 此雖似矣, 其實不然。 一家老少, 計口收布, 尙不悶憐, 以爲當然。 一戶一疋, 歲輸其庸, 猶且爲重, 謂之難捧, 此實用心之不均, 而偏爲之左右也。 而況逃故、兒弱、白骨徵布之弊, 求之古今, 寧有此酷? 戶布之行, 雖或有怨, 豈不愈於今日之身役乎? 議者又曰: "我國賤隷, 本多於良民, 若除此類, 則戶役者必少, 倂入收布, 則一身爲兩役。" 又曰: "丁壯歸之編伍, 老弱充其保率, 則終有疊役之患。" 此則實不識戶布本意而然也。 試以關西戶口觀之, 則十七萬之內, 公私賤僅至三萬餘戶。 以此推之, 他可類知, 豈以七十餘萬之戶, 不足於五十萬疋之役, 而侵及賤隷乎? 抑臣之必欲斷行此法者, 非徒紓良民之力役而已, 亦有爲國家深遠慮者。 五衛旣壞之後, 卽今堪戰之卒, 只有御營、精抄、別隊之戶首, 訓局砲手三萬餘人, 而束伍二十餘萬, 摠戎、守禦牙兵及各道新選二萬餘人, 皆土團之未鍊者, 卒有緩急, 皆無可恃。 今若通行戶布於八路之後, 則各役戶首之外, 保人收布之類, 盡爲閑遊無役之人矣。 臣考見諸衙門各道軍案, 則騎步之籍, 除兩界, 合戶保幾五十萬;御營戶保, 合八萬餘人, 精抄、砲保、別隊合十萬人, 合以計之, 則三十餘萬。 除旣鍊之卒四萬人, 又抄保人中精勇者八萬人, 爲十二萬人, 一隊給火兵二人, 分爲十二番, 以屬三大將, 則一番爲六千人, 三千人則入番於京三營, 操鍊二朔而替; 三千人則分屬於六道監兵營, 入防兩月而歸, 輪番上下, 迭居中外, 若朝禁衛之制, 一歲鍊兵幾至四萬人, 三年之內, 十二萬火砲, 皆爲精鍊之卒矣。 第京外皆置入防立番之兵, 則當用餫餉五萬餘石, 京中則以沿海沿江之戶布, 換米而輸納; 外方則以戶布, 移給於宣惠廳, 以山郡大同之木作米, 輸納於監兵營, 則不過費十餘萬疋, 而兵可宿飽, 官不更費矣。

疏末又請, 別擇重臣之有才識者, 使之句管山海之利, 兼管舟船之稅, 參酌古今, 盡其方便, 則不加賦於民, 而國用自足矣。 又陳和賣積粟之方。 上答曰: "縷縷條畫, 亶出於憂國深長之慮, 深用嘉尙。 果能行此, 則積弊可祛, 而生民可蘇, 豈非大幸? 當令廟堂, 反覆消詳, 變而通之。"


  • 【태백산사고본】 11책 12권 60장 A면【국편영인본】 38책 571면
  • 【분류】
    정론-정론(政論) / 재정(財政) / 군사(軍事) / 호구-호적(戶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