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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종실록 12권, 숙종 7년 12월 14일 계사 3번째기사 1681년 청 강희(康熙) 20년

문묘 종사에 관한 송시열의 소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 송시열(宋時烈)이 종사(從祀)하는 일을 논하면서 두 현신(賢臣)713) 이 무고를 당한 상황을 분변하고, 또 선정신(先正臣) 김장생(金長生)을 아울러 종사하는 반열에 올리도록 청하였다. 그 소(疏)에 대략 이르기를,

"삼가 중신(重臣)들이 말한 것을 보건대, 단지 중국 조정에서 이미 시행하고 있는 것일 뿐만 아니라, 그 이른바 제거할 만하다는 실상도 모두 증거로 끌어들일 것이 있으니, 아무리 잘라 버리고 두들긴다고 하더라도 깨뜨리지 않는 것이 가합니다. 또 우리 나라를 가지고 말하더라도 신라(新羅) 때부터 본조(本朝)에 이르기까지 종사(從祀)한 자가 여덟 사람이나 되는데, 그들이 순수하게 모두 도(道)에게 출발하였다고는 보장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지역이 치우치고 기질이 국한되어 큰 안목(眼目)과 큰 역량(力量)으로 드러나게 바로잡지 못한다면, 우선 그전대로 답습하면서 먼 훗날을 기다려야 합니다. 송(宋)나라 조정의 3현(三賢)714) 에 대해서도 말할 만한 것이 없지 않습니다. 주자(朱子)가 창주 정사(滄洲精舍)에서 향사(享祀)하면서 단지 이연평(李延平)715) 만 제사하고 양시(楊時)나종언(羅從彦)은 참여시키지 않았으니, 이것이 어찌 까닭이 없어서 그런 것이겠습니까? 대체로 귀산(龜山)716) 의 학문상 결점은 주자가 여러번 그것을 말하였는데, 이르기를, ‘귀산이 먼저 장자(莊子)와 열자(列子)의 학설을 보았으므로 비록 이천(伊川)을 뵈었다 하더라도 이 생각이 익숙해서 가끔 나타났으며, 나중소(羅仲素)717) 도 이러한 뜻이 있었다’고 하였습니다. 이와 같은 유의 말들은 헤아릴 수 없이 많은데, 마지막에 말하기를, ‘귀산(龜山)불씨(佛氏)에게 당황[張皇]한 형세는 이업(李鄴)금로(金虜)718) 에게 당황한 것과 같았다.’고 하였습니다. 또 말하기를, ‘근래 귀산의 열자설(列子說)을 읽어보니 사람으로 하여금 황공(惶恐)하게 하는데, 무엇 때문에 이와 같이 반대 방향으로 어긋나는지 모르겠다.’고 하였습니다. 그의 출처(出處)를 논하는 데 이르러서는, 비록 유하혜(柳下惠)719) 의 ‘붙잡아 말리면 그대로 따라 그친다.[援而止之而止]’와 비교하기는 했지만 그러나 역시 말하기를, ‘귀산의 사람됨은 구차(苟且)스럽다’고 하였습니다. 이때에 녹봉을 받기 위하여 벼슬하는 것을 면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호란(胡亂)720) 에 벼슬을 하였는데, 그것은 대체로 채경(蔡京)721) 에게 나아간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자(朱子)의 의논은 그 억양(抑揚)이 이와 같으니, 창주 정사(滄洲精舍)에서 취사(取捨)한 바가 혹시 여기에서 나온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중국 조정에서 이미 귀산(龜山)을 성무(聖廡)에 종사하게 하면서 나씨(羅氏)는 또 참여시키지 않았으니, 틀림없이 그 뜻이 있을 것입니다. 만력(萬曆)722) 갑술년723) 에 주사(主事)가 질정관(質正官) 조헌(趙憲)에게 답한 것도 신을 신고 발바닥을 긁는 것과 같아 의논이 정해지지 못한 듯합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오늘날 3현(三賢)을 종사하는 것을 비록 갑자기 취하거나 벌릴 수는 없다 하더라도, 오직 도덕(道德)의 순수하고 결점이 있는 것과 주자(朱子)가 품평[權衡]한 것은 성명(聖明)께서 당연히 알아야 할 것일 뿐만 아니라, 장보(章甫)724) 들은 더욱 정밀하게 그렇게 된 까닭을 살피지 않을 수 없습니다.

간혹 그것을 힐난하는 자가 말하기를, ‘그대가 양시(楊時)나종언(羅從彦)에 대해서는 논하는 것이 이와 같으면서 돌아보건대 문성공(文成公) 이이(李珥)에게는 어찌 이와 같이 하지 않는가?’고 하기에, 신이 조심스럽게 답하기를, ‘주자(朱子)의 먼저 병이 나았다가 뒤에 병이 든 것과 먼저 병이 들었다가 뒤에 나은 것에 대한 변(辨)725) 이 있는데, 양씨(楊氏)는 바로 앞뒤로 마침내 병이 낫지 않은 사람이며, 문성공은 바로 먼저 병이 들었다가 뒤에 병이 나은 사람이다. 더구나 그가 선학(禪學)을 탐했을 때의 나이는 20세 이전이었으니, 더욱 누(累)가 되기에는 부족하다. 주자장횡거(張橫渠)726) 를 칭하기를 늘그막에 불씨(佛氏)노자(老子)에게로 도망하였다고 했지만, 오히려 공자(孔子)맹자(孟子)의 학통(學統)을 계승하는 데는 방해롭게 여기지 않았다.’고 하였습니다. 간혹 또 말하기를, ‘양귀산(楊龜山)불씨(佛氏)에게 빠진 것이 어찌 문성공(文成公)이 입산(入山)한 것과 같은가?’고 하기에, 신이 또 대답하기를, ‘하필이면 귀산이겠는가? 주자가 일찍이 스스로 말하기를, 「희(熹)727) 가 일찍 그 사람을 스승으로 삼았었다.」고 하였는데, 그 사람이란 바로 고승(高僧)인 도겸(道謙)이다. 연평(延平)728) 이 일찍이 말하기를, 「원회(元晦)729) 가 처음에 겸(謙)을 따라 개선(開善)에서 거처하였다.」고 하였는데, 은 바로 도겸이며 개선은 바로 도겸이 거처하던 절 이름이다. 이미 도겸을 따라 개선에서 거처하였다고 말했으니, 그가 개선사에 드나들면서 왕래한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문성공(文成公)이 잠시동안 산사(山寺)에 있었던 것 역시 주자의 초년과 무엇이 다르겠는가?’고 하였습니다.

신은 언제나 주자가 광명 정대(光明正大)하기 때문에 스스로 그의 초년을 말한 것이 이와 같다고 말했으며, 연평(延平)은 질박하고 정성스러운 것으로 마음을 보존하기 때문에 주자를 칭찬하여 말하면서도 비호하거나 과실을 덮어 주지 않았었는데, 오직 주자 문하(門下)의 여러 사람들이 그가 드나들면서 왕래한 연월(年月)을 기록하지 않아 그 사실을 숨기려는 듯한 인상이 있기는 하나, 이 어찌 주자의 마음을 아는 자이겠습니까? 옛날에 문순공(文純公) 이황(李滉) 역시 이이(李珥)가 지난날의 일을 숨기지 않은 것을 칭찬하였는데, 이것도 연평의 뜻과 같은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또 말하기를, ‘주자(朱子)가 어찌 일찍이 이이(李珥)처럼 형체를 변경하였겠는가?’고 하기에 신이 또 답(答)하기를, ‘그 마음이 이미 〈불씨(佛氏)에게〉 빠져 버렸다면 형체가 변경된 여부(與否)는 논(論)할 바가 아니다. 그러나 문성공(文成公)이 형체를 변경하지 않았던 것은 문충공(文忠公) 장유(張維)의 변증(辨證)에 상세하게 갖추어 있으며, 더구나 문성공이 입산(入山)하였을 때의 시서(詩序)를 관찰하면 더욱 금방 분변할 수 있을 것이다. 그가 고승(高僧)과 문답(問答)할 때 고승이 반드시 조대(措大)라고 일컬었는데, 조대는 바로 사자(士子)730) 에 대한 칭호이다. 만약 이미 형체를 변경하였다면 당연히 같은 무리로 일컬었을 터인데 어찌 기꺼이 조대라고 말하였겠는가? 그러나 문성공귀산(龜山)과 비교하여 헤아릴 필요는 없으며 비록 장횡거(張橫渠)주자(朱子)의 일을 가지고 말하더라도 그와 동떨어지게 다른 점은 보지 못할 것이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중신(重臣)들이 차자(剳子)로 논한 바는 이미 중국 조정에서 벌써 시행하는 것이며, 또 선정신(先正臣) 조헌(趙憲)의 의논도 있으니, 무릇 성문(聖門)에 죄를 범하거나 도학(道學)을 전하는 계통에 절조가 없는 자를 제거하는 것이 무엇이 의심스럽겠습니까? 생각하건대 당연히 제거하여야 하는데도 제거하지 않은 자가 있으니, 허형(許衡)이 그런 사람입니다. 문성공(文成公)이 항상 허형이 원(元)나라에 벼슬을 한 것은 비록 절개를 상실한 것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자신이 실수한 것이라고 말하였습니다. 신이 일찍이 이것을 성조(聖祖)731) 께 진달하여 아뢰었더니 성조께서 정당(正當)한 의논이라고 말씀하셨지만, 청문(聽聞)에 번거로움이 있었기 때문에 비밀리에 근신(近臣)을 시켜서 신에게 편의하지 않다는 뜻을 유시하셨습니다. 지금 올리고 물리치는 거사를 인해서 섞어서 물리친다면 아무런 흔적이 없을 듯합니다. 인해서 생각하건대 안자(顔子)732) ·증자(曾子)733) ·자사(子思)734) 의 부자(父子) 위치(位置)는 하늘의 이치와 사람의 으로 헤아려 보면 실로 미안(未安)합니다. 만약 중국 조정의 사례에 의거하여 계성묘(啓聖廟)를 지어 안로(顔路)735) ·증석(曾晳)736) ·공이(孔鯉)737) ·맹격(孟激)738) ·정향(程珦)739) ·주송(朱松)740) ·채원정(蔡元定)741)숙량흘(叔梁紇)742) 에게 배향(配享)한다면, 명분도 바루어지고 이치에도 적합하여 일의 체모가 완전하게 갖추어질 것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함께 의논하여 결정하도록 명하소서.

그리고 또 그윽이 생각하건대, 주돈이(周敦頤)·정호(程顥)·정이(程頤)·장재(張載)·소옹(邵雍)에서 주자에까지는 실로 공자와 맹자의 정통(正統)을 계승하였으니, 그 도학(道學)은 아주 위대하고 그 공적은 매우 융성하여 십철(十哲)743) 의 반열에 두더라도 오히려 굽힌 것이라고 일컬을 터인데, 아직도 양무(兩廡)744) 에 있어 뒤섞여서 최치원(崔致遠) 등과 서로 함께하게 하였으니, 이것이 매우 불가(不可)한 것의 큰 부분입니다. 이 때문에 주자죽림(竹林)의 사우(祠宇)에 단지 주돈이·정호·이 이하 7현(賢)을 공자와 맹자의 도통(道統)에 바로 접(接)했다고 하고 나머지 사람들은 참여시키지 않았으니, 그의 뜻을 알 만합니다. 더구나 주자는 또 여러 유학자들의 학설을 집대성하여 그 이 공자 다음가는 데이겠습니까? 이는 당연히 전(殿) 안에 올려서 그 통서(統緖)745) 가 있는 것을 밝혀야 합니다. 그러나 7현(賢) 가운데도 논할 만한 자가 없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소자(邵子)746) 의 학문(學問)은 성도(聖道)747) 에 순수 하지 않았기 때문에 주자가 일찍이 그것을 말하였으며, 그의 말을 《근사록(近思錄)》에 편입시키지 않고, 그 전(傳)을 연원록(淵源錄)에 열거하지 않았다’고 하였는데, 진실로 그렇습니다. 그러나 《대역(大易)》의 이치는 실로 만세(萬世) 도학(道學)의 커다란 근원인데, 소자(邵子)가 천만세(千萬世) 뒤에 태어나 제가(諸家)의 비루한 학설을 쓸어 버리고 바로 복희씨(伏羲氏)의 심법(心法)을 계도(啓導)하였기 때문에 주자《계몽(啓蒙)》을 지으면서 한 차례 그의 학설을 인용하였으니, 그의 이 어느 것이 이보다 크겠습니까? 사마온공(司馬溫公)748) 의 경우는 주자가 그의 공로는 인정하되 그의 학설은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또 그의 촉한(蜀漢)을 정통으로 인정하지 않고 위(魏)나라를 정통으로 내세운 책[黜漢帝魏之書]749) 은 춘추(春秋)의 대의(大義)에 크게 어긋나며, 분수에 넘치는 짓을 하여 질서를 어지럽히는 자의 구실(口實)이 되기 때문에, 주자가 일찍이 세상에 노연(魯連)750) 과 같은 이가 없음을 개탄하였으니, 그 뜻을 알 만합니다. 이연평(李延平)은 비록 지적할 만한 결점은 없다고 하더라도 그의 말이 매우 뚜렷하게 드러나지 않습니다. 이 두 현인(賢人)은 정자(程子)·주자와 함께 같은 조목으로 올릴 수는 없을 듯합니다. 아울러 의논하여 결정하시기를 빕니다. 또 가만히 생각하건대, 면재(勉齋) 황씨(黃氏)751) 는 실로 주자의 학문을 적통(適統)으로 전수한 사람이며, 또 그가 편찬한 《통해속서(通解續書)》는 크게 성도(聖道)에 관계되니, 그의 공로가 《상서(尙書)》752) 를 집전(集傳)한 것에 밑돌지 않는데, 홀로 구봉(九峰) 채씨(蔡氏)753) 와 함께 향사(享祀)함을 얻지 못하였으니, 어찌 사문(斯文)754) 의 잘못된 의식이 아니겠습니까? 아울러 의논하여 결정하시기를 빕니다.

신이 가만히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주자가 경서(經書)와 사서(史書)를 바로잡아 고치지 않은 것이 없지만, 유독 예서(禮書)만은 늦게야 비로소 뜻을 두어 임금에게 주청하여 비성(秘省)과 태상(太常)에 있는 여러 서적을 빌려주도록 빌고 학도(學徒)들을 빈 관사(官舍)에 불러 들였으며, 또 종이·기름·촛불·돈과 쌀, 그리고 글씨를 베껴 쓰는 사람을 청하고 끝마치는 것을 살펴서 헤아려 위로하고 칭찬하였습니다. 그가 경서(經書)를 해석할 때에는 일찍이 이러한 주청이 없었는데 유독 이 책만 이와 같이 한 것은, 진실로 예의가 가다듬어지면 국가도 가다듬어지고 예의가 어지러워지면 국가도 어지러워지기 때문이니, 그것이 천하(天下)와 국가에 관계되는 것이 이와 같으므로 번거롭고 외람됨을 혐의스럽게 여기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주자가 갑자기 벼슬에서 물러났기 때문에 그의 주청도 결국은 올라가지 못하고, 사사로이 학자(學者)와 상세하게 의논하여 증거를 대어 결정하였었는데, 성과를 절반도 거두지 못하고 돌아가면서 그것을 황면재(黃勉齋)에게 부탁하였으므로 황면재가 계승하여 완성시켰습니다. 그가 완성시킨 것 중에는 진실로 일찍이 품(稟)하여 결정한 것도 있으며, 또한 미처 품하여 증명하지 못한 것도 있는데, 이것이 바로 주자가 이른바, ‘마침내 천고(千古)의 한(恨)을 이루었다’고 한 것입니다. 이 때문에 고(故) 문원공(文元公) 김장생(金長生)정자(程子)주자의 학통(學統)을 문성공(文成公) 이이(李珥)에게서 얻어서, 이미 그 학설을 모두 물려받아 마음에 징험하고 몸에 체득한 연후에야 주자께서 한(恨)스러뤄하던 바를 개탄하고, 만년(晩年)에는 오로지 예서(禮書)에다 뜻을 두었는데, 그것은 대체로 황면재의 글에도 오히려 유감스러운 점이 있어 다시 상의하여야 할점이 없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가 편찬한 《상례비요(喪禮備要)》·《가례집람(家禮集覽)》·《의례문해(疑禮問解)》·《예기기의(禮記記疑)》 등의 책은 매우 세밀하게 분석하여 물을 담아도 새지 않을 정도이므로 국가의 전장(典章)과 사가(私家)의 경례(經禮)와 변례(變禮)에 모두 절충(折衷)하는 바가 있되, 한결같이 정자와 주자의 학설을 주장하였기에 비록 다른 길로 추향하는 집안이라도 준용(遵用)하지 않는 이가 없었으니, 그 공로가 많다고 말할 만합니다. 대저 정중(鄭衆)두자춘(杜子春)은 단지 《주례(周禮)》의 글을 주석(註釋)한 것으로 오히려 성무(聖廡)755) 의 향사(享祀)에 참여되었는데, 더구나 문원공(文元公)은 동방(東方)의 예가(禮家)를 대성(大成)한 데이겠습니까? 지난해 유생[章甫]들이 신(臣)에게 말하기를, ‘문원공은 사문(斯文)에 공로가 있는데, 종사(從祀)하는 의논이 아직도 아무런 반응이 없으니, 이것이 어찌 그만둘 수 없는 것이 아니겠는가?’고 하기에, 신이 그들을 만류하기를, ‘그 말이 비록 공변된 마음에서 나온 것이기는 하나 온 나라가 같은 내용의 말을 한 연후라야 백세(百世)토록 미혹(迷惑)되지 않을 것이다’고 하고, 겸해서 또 양현(兩賢)756) 에 대한 주청도 아주 끝나지 않았으니 모름지기 차례를 두는 것이 타당하다고 하였더니, 그 논의가 마침내 중지되었습니다. 이제 양신(兩臣)의 종사(從祀)는 이미 윤허를 받았으며, 신이 외람되게 통변(通變)에 대한 질문를 받았습니다. 신이 만약 이러한 즈음에 단지 좋아하는 데 아첨한다는 혐의만 돌아보고서 끝내 전하(殿下)를 위하여 한마디도 하지 않는다면, 신이 지난날에 그것을 중지시켰던 것이 사림(士林)의 무궁(無窮)한 한(恨)이 되지 않을지 어떻게 알겠습니까?

그리고 문득 신이 중신(重臣)들의 차자(剳子)에 깊이 느낀 바가 있습니다. 기해년757) 이후부터 조정의 신하들이 크게 쓸모가 있는 말로 성지(聖志)를 보필하여 성취시키지 못했기 때문에 그런대로 그럭저럭 지낸 것이 문득 성고(聖考)758) 〈시대의〉 15, 6년을 경과하였으니, 지사(志士)들의 한(恨)이 간절하였습니다. 이때부터 제일의(節一義)의 의논을 다시는 벼슬아치와 유생[搢紳章甫]들 사이에서 듣지 못하였으니, 이와 같다면 점차로 이적(夷狄)과 금수(禽獸)의 지역으로 들어가지 않는 이가 얼마나 되겠습니까? 지금 중신(重臣)의 차자(剳子)에 제하(諸夏)759) 운운(云云)한 여덟 자(字)가 있는데, 이것은 바로 주자(朱子)가 이른바 비록 벙어리와 귀머거리와 절름발이와 앉은뱅이라 하더라도 백배의 기운을 더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전하(殿下)에게 바라는 바 또한 깊고도 큽니다. 삼가 빌건대, 더욱 성학(聖學)을 힘쓰시고 더욱 천리(天理)를 따르도록 힘쓰시어 세상의 도의가 더욱 올라가고 백성들의 생활이 더욱 나아지도록 하여 성조(聖祖)760)신고(神考)761) 의 크신 뜻과 크신 업적을 이룩하소서. 이와 같이 한다면 참으로 유교(儒敎)를 숭상하고 도리(道理)를 소중하게 여기는 실질적인 성과가 될 것이며, 그렇지 않으면 금번의 일이 비록 한 시대의 이목(耳目)을 새롭게 할 수는 있다고 하더라도 한 바탕의 형식으로 돌아가는 데 지나지 않을 것이니, 어찌 애석하지 않겠습니까?"

하고, 또 말하기를,

"양신(兩臣)의 종사(從祀)에 대해서는 신이 일찍이 성조(聖祖)의 하문[下詢]하심을 받고서 ‘학식(學識)이 몽매한데 어찌 감히 망령되게 의논할 수 있겠습니까?’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러나 사실을 날조하여 남을 욕하는 것은 분변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에 신이 일찍이 김수항(金壽恒)과 서로 의논하여 소(疏)를 기초(起草)하였었는데, 그 당시 성명(聖明)께서 시기하며 미워하는 자들의 정상(情狀)을 환하게 관찰하셨기 때문에 올리지는 않았습니다. 대체로 그 당시에 영남(嶺南)에서 비답(批答)을 위조한 변고가 있었으며, 또 문간공(文簡公) 성혼(成渾)을 헐뜯고 배척하는 것을 인해서 주자(朱子)의 학설도 아울러 배척하였기 때문에 성조(聖祖)께서 매우 놀라와 하고 개탄하셨습니다. 가만히 듣건대 이번에도 다시 한 차례의 소장(疏章)으로 여러 사람의 귀를 현혹(眩惑)시켰으니, 그 때의 소본(疏本)을 혹시라도 찾게 하셔서 예감(睿鑑)에 한 번 거치신다면 앞뒤의 곡절(曲折)을 빠짐없이 알 수 있을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답(剳)하기를,

"계성묘(啓聖廟)에 대한 일은 일찍이 선조(先朝)의 성명(成命)이 있었지만, 잇따라 흉년을 만나게 되어 아직도 거행하지 못하였다. 이러한 시기에 일으키면 더구나 적합한 시기가 아닌데 거론한다는 혐의가 없지 않으니, 진실로 천천히 의논하여 처리하는 것이 적당하다. 그 나머지 다른 조건은 아울러 예관(禮官)으로 하여금 대신(大臣)과 유신(儒臣)에게 의논하여 품지(稟旨)해서 처리하도록 하겠다. 그리고 소(疏)의 끝부분에 진술한 것은 말이 매우 적절하니, 마음에 두고 깊이 생각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 당시의 소본(疏本)도 후사(喉司)762) 로 하여금 찾아서 들이게 하여 살펴보겠다."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11책 12권 57장 A면【국편영인본】 38책 570면
  • 【분류】
    정론-정론(政論) / 사상-유학(儒學) / 교육-기술교육(技術敎育) / 역사-고사(故事) / 인물(人物)

  • [註 713]
    두 현신(賢臣) : 이이(李珥)와 성혼(成渾)을 가리킴.
  • [註 714]
    3현(三賢) : 양시(楊時)·나종언(那從彦)·이동(李侗)을 가리킴.
  • [註 715]
    이연평(李延平) : 이동(李侗)의 호.
  • [註 716]
    귀산(龜山) : 양시의 호.
  • [註 717]
    나중소(羅仲素) : 나종언의 자(字).
  • [註 718]
    금로(金虜) : 금나라를 가리킴.
  • [註 719]
    유하혜(柳下惠) : 노(魯)나라 대부(大夫)인 전금(展禽).
  • [註 720]
    호란(胡亂) : 금나라의 침입을 가리킴.
  • [註 721]
    채경(蔡京) : 송(宋)나라 휘종(危宗) 때의 대신(大臣).
  • [註 722]
    만력(萬曆) : 명(明)나라 신종(神宗)의 연호.
  • [註 723]
    갑술년 : 1574 선조 7년.
  • [註 724]
    장보(章甫) : 선비.
  • [註 725]
    변(辨) : 문체(文體)의 한 가지.
  • [註 726]
    장횡거(張橫渠) : 송나라 때 유학자인 장재(張載).
  • [註 727]
    희(熹) : 주자의 휘(諱).
  • [註 728]
    연평(延平) : 이동(李侗).
  • [註 729]
    원회(元晦) : 주자의 자(字).
  • [註 730]
    사자(士子) : 선비.
  • [註 731]
    성조(聖祖) : 효종(孝宗)을 가리킴.
  • [註 732]
    안자(顔子) : 안회(顔回).
  • [註 733]
    증자(曾子) : 증삼(曾參).
  • [註 734]
    자사(子思) : 공급(孔伋).
  • [註 735]
    안로(顔路) : 안자의 아버지.
  • [註 736]
    증석(曾晳) : 증자의 아버지.
  • [註 737]
    공이(孔鯉) : 자사의 아버지.
  • [註 738]
    맹격(孟激) : 맹자의 아버지.
  • [註 739]
    정향(程珦) : 정자(程子)의 아버지.
  • [註 740]
    주송(朱松) : 주자의 아버지.
  • [註 741]
    채원정(蔡元定) : 채침(蔡沈)의 아버지.
  • [註 742]
    숙량흘(叔梁紇) : 공자(孔子)의 어버지.
  • [註 743]
    십철(十哲) : 공자(孔子)의 문하(門下)의 뛰어난 제자 열 사람. 곧 안연(顔淵)·민자건(閔子騫)·염백우(冉伯牛)·중궁(仲弓)·재아(宰我)·자공(子貢)·염유(冉有)·자로(子路)·자유(子遊)·자하(子夏)를 가리킴. 공문 십철(孔門十哲).
  • [註 744]
    양무(兩廡) : 동무(東廡)와 서무(西廡).
  • [註 745]
    통서(統緖) : 한 갈래로 이어온 계통.
  • [註 746]
    소자(邵子) : 소옹을 가리킴.
  • [註 747]
    성도(聖道) : 성인이 가르친 도덕.
  • [註 748]
    사마온공(司馬溫公) : 사마광(司馬光).
  • [註 749]
    [黜漢帝魏之書] : 《자치통감(資治通鑑)》을 가리킴.
  • [註 750]
    노연(魯連) : 제(齊)나라 고사(高士)인 노중련(魯仲連).
  • [註 751]
    황씨(黃氏) : 황간(黃幹).
  • [註 752]
    《상서(尙書)》 : 서경(書經).
  • [註 753]
    채씨(蔡氏) : 채침(蔡沈).
  • [註 754]
    사문(斯文) : 유교(儒敎)를 가리킴.
  • [註 755]
    성무(聖廡) : 문묘를 가리킴.
  • [註 756]
    양현(兩賢) : 이이와 성혼을 가리킴.
  • [註 757]
    기해년 : 1659 현종 즉위년.
  • [註 758]
    성고(聖考) : 현종(顯宗)을 가리킴.
  • [註 759]
    제하(諸夏) : 중국 본토에 있는 모든 제후국.
  • [註 760]
    성조(聖祖) : 효종(孝宗)을 가리킴.
  • [註 761]
    신고(神考) : 현종을 가리킴.
  • [註 762]
    후사(喉司) : 승정원(承政院)을 가리킴.

○領中樞府事宋時烈論從祀事, 辨兩賢臣被誣狀, 且請以先正臣金長生竝陞從祀之列, 其疏略曰:

伏見重臣所言, 非但中朝之所已行者, 其所謂可去之實, 皆有證援, 則雖謂之攧撲, 不破可也。 且以我東言之, 自新羅訖本朝, 從祀者多至八人, 而未能保其粹然皆出於道。 然而地褊氣局, 未有大眼目、大力量, 出而釐正, 則姑將因循沿襲, 以俟在後之百世也。 至於朝三賢, 亦不無可言者。 朱子滄洲之祀, 只祀延平, 而則不與焉。 此豈無所以而然耶? 蓋龜山學問之疵, 朱子屢言之, 有曰: "龜山先看, 雖見伊川, 此念熟了時發出來, 羅仲素亦有此意。" 如此等說, 不勝其多, 而終曰: "龜山之張皇佛氏之勢, 如李鄴張皇金虜也。" 又曰: "近讀龜山 《列子說》, 令人惶恐, 不知何故如此背馳也。" 至論其出處, 則雖比於柳下惠 "援而止之而止。" 然亦曰: "龜山做人苟且。" 是時未免祿仕, 故胡亂就仕, 蓋謂就之於蔡京也。 朱子之論, 其抑揚如此, 滄洲所取舍, 無乃或出於此耶? 然中朝已以龜山祀於聖廡, 而羅氏又不與焉, 則必有其意。 而萬曆甲戌, 主事之所答於質正官趙憲者, 亦似隔靴而瓟痒, 恐未得爲定論也。 臣意以爲, 今日三賢從祀, 雖不可遽爾取舍, 而惟其道德之醇疵, 朱子之權衡, 則不惟聖明之所當知, 其在章甫, 尤不可不精察其所以然也。 或有詰之者曰: "爾於則所論如是, 而顧於文成公 李珥, 何其不如是耶?" 臣謹答曰: "朱子有先瘳後病; 先病後瘳之辨, 楊氏是先後終不瘳之人也, 文成公是先病後瘳之人也。 況其耽禪之歲, 是弱冠之前, 則尤不足爲累。 朱子稱, 張橫渠晩逃, 而猶不害於承之統也。" 或又曰: "龜山之溺, 豈如文成之入山乎?" 臣又答曰: "何必龜山? 朱子嘗自說: ‘嘗師其人。’ 其人卽高僧道謙也。 延平嘗曰: "元晦初從, 開善處下工夫。" 道謙, 開善道謙所居寺名也。 旣曰從 開善處, 則其出入往來於開善可知。 然則文成之暫游山寺, 亦何異於朱子之初年哉? 臣每謂: "朱子光明正大, 故自言其初如此, 而延平以質慤存心, 故稱道朱子, 亦不掩護回互, 而惟門諸人, 不記其出入往來年月, 有若諱之者然, 是豈知朱子之心者哉? 昔文純公 李滉亦稱李珥之不諱前事, 是亦延平之意也。 或又謂: "朱子何嘗變形如李珥哉?" 臣又答曰: "其心旣已沈溺, 則變形與否, 非所論也。 然文成之不爲變形, 備悉於文忠公 張維之辨證。 況以文成入山時詩序觀之, 尤可立辨矣。 其與高僧問答也, 其僧必稱措大, 措大乃士子之稱。 若已變形, 則當以等輩稱之, 豈肯謂之措大哉? 然文成公不必較量於龜山, 雖以事言之, 未見其懸殊也。 至於重臣箚所論, 旣有中朝之所已行, 又有先正臣趙憲之論, 則凡其得罪於聖門, 不槪於道統者, 去之何疑? 惟其當去而未去者, 亦有其人, 許衡是也。 文成公常謂之仕, 雖非失節, 是失身也。 臣嘗以是陳白於聖祖, 則聖祖謂之正當之論, 而惟其有煩聽聞, 故密使近臣, 諭臣以難便之意矣。 今因陞黜之擧, 混行斥去, 則似無痕跡矣。 仍念, 之父子位置, 揆以天理人情, 實爲未安。 若依中朝例, 作啓聖廟, 而以顔路曾晢孔鯉孟孫程珦朱松蔡元定配於叔梁, 則名正理得, 事體完備, 伏乞竝命議定也。 又竊念, 以至朱子, 實繼之正統, 其道甚大, 其功至隆, 班之十哲, 猶爲稱屈, 而尙在兩廡, 猥與崔致遠等相竝, 此甚不可之大者。 是故, 朱子竹林之祠, 只以以下七賢, 直接, 而餘人不與, 其意可見也。 況朱子則又集群儒之大成, 而其功亞於孔子者耶? 此宜陞諸殿內, 以明其統緖之所在也。 然七賢之中, 亦不無可論者。 或謂邵子之學, 不純於聖道, 故朱子嘗言之, 而其言不編於《近思錄》; 其傳不列於《淵源錄》, 此則誠有之矣。 然《大易》之理, 實萬世道學之大原, 而邵子生千萬世之後, 掃去諸家陋說, 而直啓伏羲之心法, 故朱子《啓蒙》也, 一用其說, 其功孰大焉? 惟溫公朱子許其功, 而不許其學。 又其黜之書, 大有乖於《春秋》之義, 而或爲僭亂者之口實, 故朱子嘗慨然於世無魯連, 其意可見也。 延平則雖無可指之疵, 其言不甚較著。 此二賢者, 似不得與同條而共陞也, 竝乞議定焉。 且竊念, 勉齋 黃氏, 實爲朱子之適傳, 又其所編《通解續書》, 大有關於聖道, 其功不下於《尙書集傳》, 而獨不得與九峰 蔡氏同祀者, 豈非斯文之欠典耶? 竝乞議定焉。 臣因竊有所獻焉, 朱子於經書史書, 無不釐正, 而獨於禮書, 晩始有志, 至請於上, 乞借秘省、太常諸書, 招致學徒於空閑官舍, 又請紙札、油燭、錢米、寫手等, 候其結局, 量支犒賞。 其於解釋經書之時, 未嘗有此請, 而獨於是書如此者, 誠以禮治則國治; 禮亂則國亂, 其有關於天下國家如是, 故不嫌其煩猥矣。 然而朱子遽爾去國, 故其奏不果上, 而私與學者, 詳議證定, 功未半而易簣, 托之黃勉齋, 勉齋踵而成之。 其所成之中, 固有曾稟定者, 亦有未及稟證者 此正朱子所謂遂成千古之恨者也。 是以, 故文元公 金長生之學於文成公 李珥, 旣盡受其說, 驗之心、體於身然後, 慨然於朱子之所恨者, 晩年專意於禮書, 蓋以勉齋之書, 猶有可憾, 而不無更商者故也。 其所纂《喪禮備要》《家禮集覽》《疑禮問解》《禮記記疑》等書, 毫分縷析, 置水不漏, 使國家典章, 私家經變, 皆有所折衷, 而一主於之說, 雖趨向異塗之家, 無不遵用, 其功可謂盛矣。 夫以鄭衆杜子春只以註釋《周禮》之文, 而尙與聖廡之享。 況文元公東方禮家之大成耶? 頃歲章甫間, 有謂臣者曰: "以文元公之有功斯文, 從祀之論尙寂, 此豈非不可已者耶?" 臣止之曰: "此說雖出於公心, 然擧國同辭, 然後可以百世不惑。 兼且兩賢之請, 尙未了當, 亦須有次第。" 其論遂止。 今兩臣從祀旣蒙允, 而臣猥承通變之問, 臣若於此際, 只顧阿好之嫌, 而終不爲殿下一言, 則臣之止之於前日者, 安知不爲士林無窮之恨乎? 抑臣於重臣之箚, 深有所感。 粤自己亥以後, 朝臣未能以大有爲之說, 輔成聖志, 故因循荏苒, 奄遇聖考十五六年, 則志士之恨, 於是爲切。 自是第一義之論, 不復聞於搢紳章甫之間, 如此則幾何其不漸入於夷狄禽獸之域耶? 今重臣之箚, 乃有諸夏云云八字, 此正朱子所謂, 雖喑聾跛躄, 亦增百倍之氣者也。 其所望於殿下, 亦深且大矣。 伏乞益懋聖學, 益勉天理, 使世道益升, 民生益遂, 以成聖祖、神考大志大業也。 如此則眞可以爲崇儒重道之實效, 不然則今玆之事, 雖新一代之耳目, 不過爲一場文具之歸, 豈不惜哉?

又曰:

兩臣從祀, 臣嘗承聖祖下詢, 臣對以學識顓蒙, 何敢妄論, 而惟其誣衊, 則不可不辨。 故臣曾與金壽恒相議草疏, 而其時聖明, 洞察媢嫉者之情狀, 故不果上。 蓋其時有嶺南僞批之變, 又因毁斥文簡公 成渾, 而竝斥朱子說, 故聖祖深加駭歎矣。 竊聞, 今者復有一番疏章, 眩感群聽。 當日疏本, 或賜宣索, 一經睿鑑, 則前後曲折, 想無遺照矣。

上答曰: "啓聖廟事, 曾有先朝成命, 而連値凶歉, 尙未擧行。 此時興作, 尤不無時屈擧贏之嫌, 固當徐議處之。 他餘條件, 竝令禮官, 議于大臣、儒臣稟處, 而疏末所陳, 言甚剴切, 可不留心而體念哉? 伊時疏本, 亦令喉司, 覓入省覽。"


  • 【태백산사고본】 11책 12권 57장 A면【국편영인본】 38책 570면
  • 【분류】
    정론-정론(政論) / 사상-유학(儒學) / 교육-기술교육(技術敎育) / 역사-고사(故事) / 인물(人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