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정 대왕 묘호 추가에 대한 송시열의 대답
사관(史官)이 공정 대왕(恭靖大王)의 묘호(廟號)를 추가하여 올리는 일로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 송시열(宋時烈)에게 가서 물으니, 송시열이 대답하기를,
"국가를 처음 세우던 초기에 불행하게도 간신(奸臣) 정도전(鄭道傳)의 변란(變亂)이 있었고, 인해서 태조 대왕(太祖大王)이 한(漢)나라 고조[上皇]가 그의 고향인 풍패(豐沛)를 그리워했던 그런 마음을 견디지 못하여 잠시동안 북쪽에 있는 고향인 함흥(咸興)에 거둥하였으며, 마침내 보위(寶位)를 공정 대왕에게 물려주었습니다. 그러나 공정 대왕은 스스로 멀리서 아침 저녁으로 부모의 안부를 묻는 예[定省之禮]를 어겼으며, 또 태종 대왕(太宗大王)은 위대한 공(功)과 융성한 덕(德)이 있어 만백성의 마음이 그에게로 돌아간다고 생각하여 즉위(卽位)하던 처음에 즉시 덕으로 사양 하려는 뜻이 있었으나, 태종 대왕께서 겸손하게 물러나 받들지 아니하므로 20여 개월 동안 부지런히 힘쓰셨는데, 그 사이에 은혜를 내려 여러 신하들에게 나누어 주는 의식과 공어(供御)501) 하며 존엄하게 임어(臨御)하는 법도가 그전에 잠저(潛邸)에 있을 때보다 더 나아진 것이 없었습니다. 태종 대왕이 이와 같음을 염려하여 마침내 우러러 천명[明命]을 받들어서 조용한 곳에서 한적(閒寂)하게 즐기려는 공정 대왕의 뜻을 이루도록 하셨습니다. 그러다가 승하(昇遐)하심에 이르러서는 태종 대왕이 평소에 공정 대왕의 겸손하고 자기를 억제하는 마음을 체득하여 차마 높이고 영화롭게 하는 호(號)를 척강(陟降)502) 하셨을 때에 억지로 더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공정 대왕의 공손하며 능히 사양하는 덕성(德性)과 시기를 알고 형세를 아는 명철(明哲)함은 천고(千古)에 뛰어났는데, 태종 대왕이 그 마음을 돕고 체득하여 감히 살아계실 때나 돌아가실 때나 조금도 어기지 않았으니, 이것이 어찌 마음에 기인한 우애(友愛)가 아니겠습니까? 세종 대왕(世宗大王) 이하 열성(列聖)들 역시 태종 대왕의 마음을 자신의 마음으로 삼아 감히 번거로운 의식을 추가하여 거행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신민(臣民)들이 지극한 덕(德)을 추모(追慕)하는 마음은 오래 되었어도 그치지 않았는데, 오늘날에 다행스럽게도 빠뜨려진 의식(儀式)을 거행하여 중앙과 지방 백성들의 마음을 위로하시니, 어찌 성대하고 아름다운 거사가 아니겠습니까? 당시에 태종 대왕이 비록 평소 공정 대왕의 마음을 잘 체득하기는 하였지만, 태묘(太廟)503) 에 함께 오르고서도 혼자서만 아름다운 호[徽號]을 차지하셨을 때에는 틀림없이 편치 않았을 것입니다. 옛날 송(宋)나라 조정에서 희조(僖祖)504) 와 태조(太祖)를 합사[祫]할 때에 동향(東向)해야 할 위(位)를 두고 논(論)하면서 여러 사람들의 의논이 서로 달랐는데, 주자(朱子)가 ‘한갓 두 묘(廟)의 위령(威靈)으로 하여금 서로 더불어 강약(强弱)을 다투고 계교하게 하는 것과 배척을 당할까 의심하여 방황(彷徨)하며 머뭇거리게 하는 것과 같다.’고 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매우 슬퍼하는 마음을 스스로 가눌 수 없도록 하였습니다. 더구나 지금의 존호(尊號)를 혹시 더하거나 혹시 없애는 것이 어찌 합사할 때 잠시 동향(東向)하게 하는 위(位)에 비교될 뿐이겠습니까? 이것은 오늘날에 있어서 마땅히 깊이 깊이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 신하들의 의논이 더러는 다시 시행할 곳이 없다는 것으로 의심을 합니다만, 이것은 그렇지 않습니다. 영녕전(永寧殿)에는 이미 조주(祧主)505) 가 있으며, 능침(陵寢)에는 한식(寒食)에도 언제나 축사(祝辭)가 있는데, 이것이 어찌 시행할 만한 곳이 아니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전교를 내리기를,
"열성(列聖)에게는 모두 묘호(廟號)가 있는데, 더구나 공정 대왕(恭靖大王)의 위대한 공과 성대한 덕으로 아름다운 칭호가 지금까지 빠뜨려졌으니, 어찌 국가의 큰 잘못이 아니겠는가? 묘호를 추가하여 올리는 것은 조금도 불가한 것이 없으니, 해조(該曹)로 하여금 즉시 거행하도록 하라."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11책 12권 17장 A면【국편영인본】 38책 550면
- 【분류】왕실-종사(宗社) / 왕실-국왕(國王) / 역사-전사(前史)
- [註 501]공어(供御) : 천자에게 바치는 공물(貢物). 여기서는 사대(事大)하는 것을 가리킴.
- [註 502]
척강(陟降) : 승하(昇遐)를 가리킴.- [註 503]
○史官以恭靖大王追上廟號事, 往問于領府事宋時烈, 時烈對曰: "國家創業之初, 不幸有奸臣鄭道傳之變, 太祖大王因不堪漢 上皇 豐沛之戀, 略移淸蹕於北地, 而遂禪寶位于恭靖大王。 恭靖大王自以遠違定省之禮, 又有太宗大王豐功盛德, 萬姓歸心也, 卽位之初, 卽有讓德之意, 而以太宗大王謙退不承, 黽勉二十餘月, 其間恩澤匪頒之式, 供御尊臨之儀, 未有加乎潛邸之舊。 太宗大王愍其如此, 遂仰承明命, 遂其就閒之志。 及乎昇遐, 太宗大王體平日謙抑之心, 不忍以尊榮之號, 强加陟降之時。 夫恭靖大王允恭克讓之德, 知時識勢之明, 逈出千古。 太宗大王相體其心, 不敢少違於存沒之間者, 亦豈非因心之友哉? 世宗以下列聖, 亦以太宗大王之心爲心, 不敢追擧縟儀。 然臣民之追慕至德, 久而不已, 其在今日, 幸擧闕儀, 以慰中外之心, 豈非盛美之擧乎? 夫當日太宗雖克體平日之心, 然及乎同陞太廟, 而獨享徽號之時, 則必有不安者矣。 昔宋朝論僖祖、太祖祫時, 東向之位而群議有異同, 則朱子以爲, 徒使兩廟威靈, 若相與爭較强弱, 疑於受擯, 彷徨躑躅, 令人傷痛, 不能自已。 況今尊號之或加或去, 奚但祫時暫東向之位而已? 此在今日所當深思體念者也。 諸臣之議, 或以更無所施爲疑, 此則不然。 永寧殿旣有祧主, 陵寢寒食常有祝辭, 此豈非可施之處乎?" 上下敎曰: "我朝列聖, 皆有廟號, 而況以恭靖大王之豐功盛德, 徽美之稱, 尙今闕焉, 豈非國家一大欠典乎? 追上廟號, 少無不可。 其令該曹趁卽擧行。"
- 【태백산사고본】 11책 12권 17장 A면【국편영인본】 38책 550면
- 【분류】왕실-종사(宗社) / 왕실-국왕(國王) / 역사-전사(前史)
- [註 5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