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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종실록 11권, 숙종 7년 1월 3일 정사 2번째기사 1681년 청 강희(康熙) 20년

제반 정사에 관해 논의하다. 명나라와의 의리에 관한 송시열의 수차

대신(大臣)과 비국 당상(備局堂上)을 인견(引見)하였다. 민정중(閔鼎重)이 각도(各道)의 여러 가지 신역(身役)과 도고(逃故)·아약(兒弱)을 조사해 밝혀야 할 일을 진계(陳啓)하니, 이상진(李尙眞)이 말하기를,

"마땅히 먼저 아약(兒弱)을 충정(充定)하는 폐단을 금해야 합니다."

하자, 임금이 절목(節目)을 강정(講定)하여 입계(入啓)하도록 하였다. 민정중(閔鼎重)이 말하기를,

"강릉 부사(江陵府使) 소두산(蘇斗山)은 일찍이 나주(羅州)에 보임(補任)되어 치적(治績)이 탁이(卓異)하였으므로, 진실로 방백(方伯)의 직임(職任)에 합당하나, 이력(履歷)이 많지 아니하니, 마땅히 경직(京職)을 제수(除授)하여 저양(儲養)해서 두루 시험하였다가, 빈 자리가 나기를 기다려 의망(擬望)하여 제수하소서. 전 성천 부사(成川府使) 이단석(李端錫)은 본래 청백(淸白)하고 백성을 잘 다스린다고 알려졌습니다. 한 가지 잘못으로 폐기(廢棄)할 수 없으니, 또한 마땅히 자목지임(字牧之任)003) 에 복직시키도록 하소서."

하니, 임금이 모두 옳게 여겼다. 이상진(李尙眞)이 말하기를,

"형조 참의(刑曹參議) 최관(崔寬)은 벼슬에 임하여 청백(淸白)하였으며, 일찍이 제주(濟州)에 보임(補任)되어 남쪽의 물화(物貨)를 가까이 하지 아니하였으니, 포상(褒賞)하는 일이 있음이 합당합니다."

하였는데, 민정중(閔鼎重)이 또한 말하니, 임금이 명하여 승자(陞資)하도록 하였다. 민유중(閔維重)이 말하기를,

"삼남(三南) 연해(沿海)의 각 고을에 전선(戰船)을 배치한 것은 원래 고제(古制)가 아닌데, 새로 만들거나 고칠 때에 단지 물력(物力)만 허비하고, 완급(緩急)에 쓸만한 가망이 없습니다. 신은 연해(沿海)의 여러 섬 가운데 요해처(要害處)를 가려서 변장(邊將)을 더 설치하여 전선(戰船)을 배치하고, 각 고을의 전선은 마땅히 혁파(革罷)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강진(康津)에는 고금(古今)·청산(靑山)의 두 섬이 있는데, 토지가 비옥하고 백성이 많기 때문에, 고(故) 통제사(統制使) 이순신(李舜臣)과 명장(明將) 진인(陳璘)이 유둔(留屯)했던 곳입니다. 고금도(古今島)는 땅이 크니 첨사(僉使)를 설치하고, 청산도(靑山島)는 조금 작으니 마땅히 만호(萬戶)를 설치하여, 각 고을의 전선(戰船) 2척 씩을 옮겨 주어서 능로군(能櫓軍)·사포수(射砲手)를 모두 섬에 사는 백성으로 충정(充定)한다면, 연해(沿海)의 방비(防備)가 가장 착실(着實)해져서 조정(朝廷)에서도 수군(水軍)을 나누어 주는 폐단이 없어질 것입니다. 두 섬 외에 또한 진을 설치하기에 합당한 곳이 많지만, 일시에 같이 거행(擧行)할 수는 없으니, 먼저 두 섬을 시험하여 그 성효(成效)를 살펴보고 차례로 설치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였는데, 이상진이 말하기를,

"흥양(興陽)나로도(羅老島)가 또한 진(鎭)을 설치하기에 합당합니다."

하니, 임금이 우선 두 곳을 시험해 보도록 명하였다. 이단하(李端夏)가 말하기를,

"식년(式年)004)강규(講規)005) 에는 글뜻은 묻지 아니하고, 단지 음석(音釋)에 능통(能通)하여 강획(講劃)이 과다(過多)한 자만을 취하니, 비록 제술(製述)을 잘하는 자라 하더라도 생획(生劃)006) 으로써 득첩(得捷)007) 할 수 없으므로, 동당(東堂)008) 에 나아가지 못합니다. 이 때문에 향리(鄕里)의 유생(儒生)은 오로지 구두(口讀)만 일삼아서 글뜻을 해득(解得)하지 못하고, 서울의 유생은 단지 표문(表文)·책문(策文)만을 일삼아서 경학(經學)을 알지 못하니, 과거(科擧)에서 사람을 취하는 첫 과정에서 소루(疏漏)하고 그릇됨이 이와 같습니다. 만약 《대전(大典)》의 강론하는 규약(規約)을 본받아서 강론에서 비록 두루 통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일장(一章)의 대지(大旨)를 빠뜨리지 아니한 자는 조(粗)를 삼고, 비록 대지를 통했다 하더라도 융관(融貫)009) 에 이르지 못한 자는 약(略)을 삼으며, 뜻을 관통(貫通)하여 변설(辨說)하는 데 의심할 바가 없는 자는 통(通)을 삼는다면, 과거(科擧)의 길이 바로 잡히게 되어 인재(人才)를 얻을 수 있게 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미리 지위(知委)010) 하도록 명하고, 거자(擧子)로 하여금 면려(勉勵)할 바를 알게 하고, 또 과거 사목(科擧事目)에 첨입(添入)시키게 하였다. 이숙(李䎘)이 말하기를,

"《대전(大典)》에 종[奴]으로서 주인(主人)의 처(妻)를 간통하였거나 고공(雇工)011) 으로서 가장(家長)의 처(妻)를 간통한 경우는 정해진 율(律)이 있으나, 비부(婢夫)가 처의 상전(上典)의 처를 간통한 경우에 이르러서는 율문(律文)이 없습니다. 청컨대 입시(入侍)한 대신(大臣)에게 하순(下詢)하여 법식(法式)을 정해서 시행(施行)하게 하소서."

하였는데, 민정중이 아뢰기를,

"처(妻)의 상전(上典)이 비부(婢夫)를 살해(殺害)하면 상명(償命)012) 하지만, 비부(婢夫)와 고공(雇工)은 다름이 있으니, 국속(國俗)으로 말한다면 비록 죽인다 하더라도 가(可)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미 이러한 율문(律文)이 없으니, 청컨대 자세하게 품정(稟定)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거듭 다른 대신(大臣)들과 의논하여 품정(稟定)하도록 명하였다. 그 때 의주(義州) 여인(女人) 예절(禮節)의 옥사(獄事)가 있었는데, 이숙(李䎘)이 바야흐로 형조 판서(刑曹判書)였기 때문에 이러한 진품(陳稟)이 있었던 것이다. 후에 여러 대신 이 모두 고공(雇工)의 율에 따르는 것이 마땅하다고 하니, 마침내 이로써 논단(論斷)하고, 인하여 명령을 내렸다. 조사석(趙師錫)이 말하기를,

"예조(禮曹)에 설치되어 있는 《국휼등록(國恤謄錄)》은 이미 많은 잘못이 드러나 단지 《오례의(五禮儀)》만 준용(遵用)하니, 또한 소홀하고 간략한 점이 많습니다. 국조(國朝)에서 이미 행한 예(禮)로서 더욱 고증(考證)할 곳이 없으니, 청컨대 한 국(局)을 설치(設置)하여 대신(大臣)으로 하여금 주관(主管)하게 하고, 당랑(堂郞)을 차출(差出)할 것을 《오례의》의 소홀하고 간략한 곳에 대하여 고례(古禮)를 참고하여 증보(增補)할 것을 작정(酌定)하게 하소서. 또 열조(列朝)에서 혁파(革罷)했던 것을 상고하여 한 예서(禮書)를 만들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명하여 졸곡(卒哭) 후에 실록(實錄)에서 상고해 내어 만들게 하였다. 이단하(李端夏)가 말하기를,

"고(故) 상신(相臣) 이경여(李敬輿)가 효종조(孝宗朝)에 건백(建白)하여 《국조보감(國朝寶鑑)》을 계속 편찬(編纂)할 것을 청하였는데, 지금 영상(領相) 김수항(金壽恒)도청(都廳)013) 이 되었으나, 일이 과연 시행되지 아니하니, 실록청(實錄廳)에 한 당상(堂上)을 더 내어 보내어 이 일을 전담하여 관장(管掌)하게 하면, 조사석(趙師錫)이 진달(陳達)한 일이 또한 이루어질 수 있을 것입니다."

하고, 인하여 강화 유수(江華留守) 이선(李選)에게 이 일을 위임(委任)시키도록 청하고, 또 말하기를,

"선조조(宣祖朝) 30년의 실록(實錄)은 신의 아비 이식(李植)이 수정(修正)하였고, 그후 10년은 채유후(蔡𥙿後)가 계속 수정하였는데, 자못 소루하고 잘못된 곳이 있으니, 마땅히 문학(文學)의 신하로 하여금 《주자집(朱子集)》《창려집(昌黎集)》에 의거하여 다른 것을 상고해서 한 책자(冊子)를 만들면 가히 유감(遺憾)로 없을 것입니다."

하였는데, 이민서(李敏敍)·조사석(趙師錫)이 모두 말하기를,

"실록(實錄)은 사체(事體)가 중대(重大)한데, 지금 한 사람의 견해(見解)로 첨가(添加)해서 고치는 바가 있다면, 일이 뒷날에 폐단에 관계됩니다."

하니, 임금이 총재관(摠裁官)이 입시(入侍)할 때를 기다렸다가, 다시 의논하도록 명하였다. 이상진(李尙眞)이 말하기를,

"명례궁(明禮宮) 명안 공주방(明安公主房)에 소속된 모군(募軍)014) 을 색출하는 것을 허락하지 아니하시니, 성덕(聖德)에 누(累)가 있습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청풍 부원군(淸風府院君)의 묘전(墓田)은 내주지 말라는 교지(敎旨)가 있었으니, 조가(朝家)에서 만약 넉넉하게 내려 주고자 한다면, 호조(戶曹)로 하여금 그 값을 내고 사서 주게 하는 것이 옳습니다. 그런데 민전(民田)이 이미 그 가운데에 들어 있다면 도로 내주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였다. 민정중이 또한 말하기를,

"춘천(春川) 한 면(面)이 모두 제전(祭田)이 되었으니, 사체(事體)상 타당치 않습니다."

하자, 임금이 말하기를,

"이른바 묘전(墓田)이란 그 전세(田稅)를 거두어 제수(祭需)에 쓰는 데 지나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명례궁(明禮宮)은 바로 대왕 대비전(大王大妃殿)에 소속되었기 때문에, 모군(募軍)을 색출해 내는 일은 시끄럽지 않도록 천천히 하게 하였었는데, 경 등의 말이 이와 같으니, 유황점(硫黃店)015) 의 예에 의거하여 거행(擧行)하도록 하라."

하였다. 집의 안후태(安後泰)가 앞서 아뢰었던 것을 거듭 아뢰고, 또 말하기를,

"또 전라 감사(全羅監司) 임규(任奎)는 정령(政令)에 태만하고 행동거지가 사리에 어긋나서 온 도(道)의 사람들이 모두 실망(失望)하니, 청컨대 파직(罷職)하소서. 황산 찰방(黃山察訪) 한순상(韓舜相)은 음패(淫悖)한데다가 행실(行實)이 없고, 권문 세가(權門勢家)와 결탁하고 있으며, 집이 지극히 가까운 곳에 있어 짐바리의 왕래가 끊이지 않습니다. 청컨대 사판(仕版)에서 삭제하소서."

하였으나, 임금이 따르지 아니하였다. 민정중이 말하기를,

"임규(任奎)는 사람됨이 비록 진밀(縝密)하지는 못한다 하더라도 자못 기개(氣槪)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조(吏曹)에서 신 등에게 문의(問議)해 보고 차송(差送)했었습니다. 그런데 대간(臺諫)의 논박이 이와 같으니, 개차(改差)하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속히 대신할 사람을 보내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송시열(宋時烈)이 진계(進啓)하기를,

"성상께서 오랫동안 개강(開講)을 폐(廢)하셨는데, 비록 연석(筵席)에는 나가실 수 없다 하더라도 반드시 성람(省覽)하시는 글이 있을 것이라 생각되는데, 무슨 책인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하자, 임금이 말하기를,

"《심경(心經)》《성학집요(聖學輯要)》를 때때로 보고 있다."

하였는데, 송시열(宋時烈)이 말하기를,

"신이 효종조(孝宗朝)에 여러 번 밀물(密勿)016) 의 성교(聖敎)를 받들었는데, 신은 매양 사성(嗣聖)의 앞에서 한 번 진계(陳啓)하고자 하였습니다. 지난번에 윤휴(尹鑴)가 효종조(孝宗朝)의 시사(時事)를 가탁(假托)하여 말하였다가, 말이 흉패(凶悖)한 데 미치어 죄를 받아 죽으니, 사람들이 모두 경계(警戒)로 삼아 그 말에 참여하는 것을 꺼려하였습니다. 대저 윤휴(尹鑴)가 가탁(假托)하여 사실(事實)이 상반(相反)되었다 하더라도 어떻게 윤휴의 말이 이와 같았다고 해서 조종조(祖宗朝)의 대의(大義)를 잊을 수 있겠습니까? 신이 해상(海上)으로부터 돌아오니, 논의(論議)하는 습속(習俗)이 선조(先朝) 때와 크게 달랐습니다. 송(宋)나라 때에는 조신(朝臣)으로써 입시(入侍)하여 말을 죄다 진달(陳達)하지 못하는 자가 있으면, 주달(奏達)할 차자(箚子)를 미리 갖추어 탑전(榻前)에서 펴서 읽었는데, 신은 감히 이 예(例)의 의거하겠으니, 바라건대, 연한(燕閑)할 때 시험삼아 성람(省覽)하여 주소서."

하고는 일어나 수차(袖箚)017) 를 바쳤는데, 그 차자(箚子)에 이르기를,

"천서(天敍)·천질(天秩)은 오로지 군신(君臣)과 부자(父子)가 큰데, 이것이 이른바 천경(天經)이고, 지의(地義)이고, 민이(民彝)인 것입니다. 그래서 예로부터 제왕(帝王)이 몸을 바르게 하고, 집안을 다스리는 것이 이에 달려 있고, 강유(綱維)를 지키고 다스리는 것이 이에 달려 있으니, 만약 혹시라도 이것을 버린다면 사람이 금수(禽獸)의 길로 들어서게 되고, 중국(中國)이 오랑캐의 길로 빠져 들고 말 것이니,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오로지 우리 동방(東方)은 기자(箕子) 이래로 이미 예의(禮義)의 나라가 되었으나, 승국(勝國)018) 에 이르러서도 오랑캐의 풍속에 오히려 다 변화되지는 아니하였던 것입니다. 우리 태조 고황제(太祖高皇帝)019) 께서 처음 천하(天下)를 평정(平定)하자, 정몽주(鄭夢周)가 먼저 대의(大義)를 일으켜 이하(夷夏)020) 와 음양(陰陽)의 구분을 분변(分辨)하여 오랑캐인 원(元)나라를 등지고 진주(眞主)021) 를 섬겼습니다. 우리 태조 대왕(太祖大王)께서 개국(開國)하자, 명 태조(明太祖)께서는 내복(內服)과 같이 보시고 은혜와 예우를 두루 두텁게 하시니, 우리 태조 대왕(太祖大王)께서도 충정(忠貞)하고 근실한 것이 아들이 어버이를 섬기듯이 하셨습니다. 그래서 임진년의 변란(變亂)에 이르러서는 부지런히 섬긴 데 대해 보답을 받아 종사(宗社)가 망할 뻔하다가 다시 보존(保存)하게 되었고, 생민(生民)이 죽을 뻔하다가 다시 살아나게 되었으니, 온 국토의 수천 리에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까지 어찌 제덕(帝德)을 입지 아니한 것이 있겠습니까? 이 때문에 우리 선조 대왕(宣祖大王)께서는 더욱 충성을 다하고, 손수 ‘재조번방(再造藩邦)’이라고 네 개의 큰 글자를 써서 예지(睿志)를 나타내셨습니다. 그런데 불행히 병자년022) ·정축년023) 의 변란(變亂) 때에는 국세(國勢)가 위약(萎弱)하고 장상(將相)들이 우둔하고 용렬하여 삼전도(三田渡)024) 의 일이 있기에 이르렀으니, 통탄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인조 대왕(仁祖大王)께서는 성의(誠意)가 깊고 돈독하셔서 명조(明朝)의 경절(慶節)이 있을 때마다 홀로 후원(後園)에 나아가 애통하게 우시면서 무릎을 꿇으셨고, 두세 사람의 대신(大臣)들이 또한 은밀하게 사사로운 뜻을 펴서 명조의 가장(嘉奬)을 받았으니, 종사(宗社)가 지금까지 부지(扶持)한 것은 진실로 이에 의뢰한 것입니다.

군상(君上)이란 신민(臣民)이 본받는 바이니, 군상(君上)으로부터 의리(義里)를 숭상하고 윤상(倫常)을 바르게 하면, 임금에게 충성하고 어버이를 섬기는 의리가 밝아져서 비록 위급(危急)한 때에 이른다 하다라도 오히려 굳게 단결하여 해이(解弛)히지지 아니하는 것을 송(宋)나라애산(厓山)의 일025) 에서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진실로 혹 이와 반대가 되면 어버이와 임금을 버리는 풍조(風潮)가 성행하여 마침내 빼앗지 않고는 흡족해 하지 아니하는 데 이르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주자(朱子)는 그 아버지 위재(韋齋)026) 의 말을 외어 특별히 드러내어 말하기를, ‘부자(父子)와 군신(君臣)은 하늘과 땅 사이에 도망할 곳이 없는데, 이는 사람이 원기(元氣) 속에서 호흡(呼吸)하는 것과 같으니, 일식(一息)이라도 이어지지 못하면, 이치상 반드시 죽게 되는 것이다.’ 하였으니, 이는 진실로 바뀔 수 없는 지론(至論)인 것입니다. 그 기미가 이와 같으니,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우리 효종 대왕(孝宗大王)에 이르러서는, 성고(聖考)027) 께서 당한 위험과 모욕을 마음 아파하시고, 상하가 뒤바뀐 것에 분개해 하셔서 밤낮으로 마음속에 맹세하고 뜻을 가다듬은 것은 복수(復讎)와 설치(雪恥)라는 네 글자뿐이었습니다. 그래서 금주(金珠)와 피폐(皮幣)를 가지고 왕래(往來)하는 가운데 간과(干戈)028) ·기고(旗鼓)029) 를 들고 분발(奮發)하는 뜻이 담겨 있었습니다. 일찍이 상신(相臣) 이경여(李敬輿)의 상소(上疏)에 답하기를, ‘지극한 아픔이 마음속에 있는데, 해는 저물고 길은 멀기만 하다.’ 하셨습니다. 또 일찍이 이 뜻으로 지금의 상신(相臣)인 민정중(閔鼎重)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또 반드시 말씀하시기를, ‘이치가 그 요점(要點)을 얻지 못하면, 마침내 허위(虛僞)한 데로 돌아가게 될 따름이다. 왕자(王者)가 받들어야 할 것은, 하늘은 사사로이 덮어 주는 바가 없고, 땅은 사사로이 실어 주는 바가 없으며, 해와 달은 사사로이 비추는 바가 없다는 것일 뿐이다. 내가 이미 사사로움이 없으면, 신하들을 독려할 수 있고, 신하(臣下)로서 봉공(奉公)하지 않고 사리(私利)를 경영하는 자에게는 형륙(刑戮)을 가할 수 있는 것이다.’ 하셨습니다. 성의(聖意)가 이와 같았기 때문에, 기해년030) 봄에 민유중(閔維重)·남구만(南九萬)·이익(李翊) 등을 보내어 외방(外方)을 염탐하게 하고, 무릇 여러 궁가(宮家)에 관계된 염분(鹽盆)·어살[魚箭]·원당(願堂) 등 궁가(宮家)에 관계된 모든 사사로운 일은 일체 살펴서 혁파(革罷)하게 하셨습니다. 이때 성의(聖意)는 청천백일(靑天白日)과 같이 분명했습니다. 그러나 불행(不幸)하게도 민유중 등이 미처 돌아와 복명(復命)하기 전에 갑자기 승하하시게 되었으니, 이 어찌 동방(東方)의 불행일 뿐이겠습니까? 또한 천하(天下)의 불행인 것입니다. 그러나 당일(當日)에 성의(聖意)가 어찌 시세(時勢)를 헤아리지 아니하시고 큰 재앙을 도발(挑發)하고자 하셨겠습니까? 대개 일찍이 말씀하시기를, ‘생취(生聚)의 교훈(敎訓)은 세월(歲月)을 지체하면서 마땅히 구천(句踐)031) 이 한 바와 같이 해야 한다.’ 하셨고, 또 일찍이 말씀하시기를, ‘우리 힘의 강약(强弱)을 보고, 저들의 흔단(釁端)의 심천(深淺)을 살펴야 한다.’ 하셨고, 또 말씀하시기를, ‘이것은 학문(學問)하는 도리와 다를 바가 없다. 서서히 하면서 신속하게 하고자 하는 바가 없어야 하고, 꾸준히 하면서 감히 게을리하지 않아야 한다.’ 하셨고, 또 일찍이 말씀하시기를, ‘이 뜻을 굳게 세우고 이 마음을 맑고 밝게 하는 것은 모두 학문(學問)에 달려 있다.’ 하셨습니다. 이 때문에 성궁(聖躬)이 편찮으실 때에도 오히려 날마다 연석(筵席)에 나가셔서 주공(周公)·공자(孔子)·정자(程子)·주자(朱子)의 글을 강론(講論)하시고, ·순(堯舜)의 정일(精一)한 연원(淵源)을 탐구하셨으니, 이것이 효종(孝宗)의 크고도 중요한 지조(志操)였습니다.

우리 현종 대왕(顯宗大王)에 이르러서는 그 뜻을 계술(繼述)하려고 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으나, 불행하게도 오랫동안 병들어 계셨으므로, 일이 마음대로 되지 못하였으며, 신하(臣下)들도 국사(國事)를 담당(擔當)할 수가 없어서 15, 6년 동안 하는 일 없이 세월만 보내었습니다. 그래서 국세(國勢)가 날로 약해져 떨치지 못하게 되었으니, 이것이 진실로 선대왕(先大王)께서 일찍이 개탄하셨던 것이었습니다. 신이 무신년032)온궁(溫宮)033) 으로부터 어가(御駕)를 따라 들어왔는데, 일찍이 연석(筵席)에서 은밀하게 계술(繼述)할 단서를 말씀드렸더니, 선왕(先王)께서도 머리를 끄덕이시며 승낙하는 뜻을 보이셨습니다. 그런데 오로지 청문(聽聞)하는 번거로움 때문에 사관(史官)에게 명하여 이 일을 쓰지 말도록 명하셨고, 생각도 또한 매몰(埋沒)된 것이었습니다. 우리 전하(殿下)께서 즉위(卽位)하신 초기에 적신(賊臣)034) 이 나라 일을 맡아 보며 대의(大義)를 가탁(假托)하였으나, 실제로는 사사로움을 채우려고 하여 방자하게 흉패(凶悖)하였으므로, 마침내 형륙(刑戮)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이후부터 모든 사람들이 일체 이것을 경계로 삼고, 《춘추(春秋)》가 꺼려할 만한 것으로 여겼습니다. 대저 왕망(王莾)·순(堯舜)을 가탁(假托)하여 한(漢)나라를 빼앗았지만, 사람들이 이로써 ·을 그릇되게 여기지 아니하였으며, 황소(黃巢)가 탕무(湯武)를 가탁하여 당(唐)나라를 어지럽혔지만, 누가 이로써 탕무를 의심하였겠습니까?

이제 전하(殿下)께서는 총명 예지(聰明睿智)한 성군(聖君)으로서 신무(神武)의 함부로 죽이지 않으시는 덕(德)을 지나셨으니, 신은 비록 우매(愚昧)하지만, 결코 전하께서는 족히 유익한 정사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지난번의 흉역(凶逆)한 변(變)에 전하께서는 침착하게 기미를 알아차리시고 영단(英斷)하셨는데, 그때 성색(聲色)을 바꾸지 아니하시고 눈 깜짝할 사이에 바람 같은 위령(威令)으로 시원하게 처리하셨으니, 이를 미루어 나가신다면 무슨 일인들 이루어지지 아니하겠습니까? 그러나 〈일을〉 하고자 하시면, 달리 구할 바가 있는 것이 아니라, 진실로 자기의 사사로움을 버리고 천리(天理)를 회복하는 데 달려 있을 따름입니다. 자신의 사사로움과 천리(天理)가 서로 소장(消長)하는 것은 국가의 치란(治亂)과 안위(安危)에 관계되는 것입니다. 예로부터 인군(人君)으로서 누가 위란(危亂)을 좋아하고 치안(治安)을 미워하였겠습니까만, 오직 자신의 사사로움을 이기지 못하여 백료(百僚)들이 서로 본받고 순치(馴致)하는 것을 하지 못하였으니, 경계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신이 일찍이 주자(朱子)의 말을 외어 효종(孝宗)께 말씀드리기를, ‘중원(中原)의 오랑캐는 축출(逐出)하기가 쉽지만, 자신의 사욕(私欲)은 제거(除去)해 버리기가 어려우며, 세상의 드문 공(功)을 세우기는 쉽지만, 지극히 미묘한 본심(本心)을 보전(保全)하기는 어렵습니다.’고 하였습니다. 효종(孝宗)께서는 이 말씀을 깊이 음미(吟味)하시고, 하교(下敎)하시기를, ‘이 말은 진실로 서신(書紳)035) 할 만한 것이다.’ 하셨으니, 아! 당일(當日)의 성지(聖志)와 성학(聖學)이 이와 같았으므로, 신은 한 번 하소연하고자 하였으나, 그 날이 없을까 두려워하였습니다. 그런데 다행히 오늘 신손(神孫)을 만나 뵙고 이렇게 대략 진술(陳述)하게 되니, 엎드려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유념하소서. 오늘날 전하께서 신을 돌보심이 극진하시고, 신을 머물게 하심이 지극하시지만, 생각건대, 신은 늙고 병들어서 거의 죽게 되어 정신이 쇠약해졌습니다. 마음을 돌이켜보아도 달리 있는 것이 없고, 단지 이 한 가지일만 마음속에 항상 잊지 못하고 있었는데, 이제 이미 대략 뜻을 폈으니, 이로부터 갑자기 죽는다 하더라도 유감(遺憾)이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받아서 책상 위에 놓고 말하기를,

"조용히 살펴보고자 한다."

하였다. 이튿날 밀갑(密匣)036) 으로 봉하고는 비지(批旨)를 내렸는데, 거기에 이르기를,

"경의 주차(奏箚)를 살펴보고 우리 열성조(列聖朝)의 지성스러운 대의(大義)를 생각해 보건대, 족히 신명(神明)을 통할 바가 있으니, 영구히 후세(後世)에 알려야 할 것이므로, 재삼 펴서 보고 공경하여 읽기를 마지 아니하였다. 그런데 말미(末尾)에 자신의 사사로움을 버리고 천리(天理)를 회복시키라는 말로 반복해서 경계하고 가르치니, 매우 가상(嘉尙)하다. 유의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경은 마음을 편안히 하여 사피(辭避)하지 말고, 오랫동안 서울에 머물러 있어 연석(筵席)에 출입(出入)하여 개발(開發)하고 계옥(啓沃)037) 하여서 미치지 못하는 바를 돕도록 하라."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10책 11권 1장 B면【국편영인본】 38책 508면
  • 【분류】
    왕실-종사(宗社) / 왕실-종친(宗親) / 왕실-경연(經筵) / 왕실-국왕(國王) / 군사-군역(軍役) / 군사-관방(關防) / 군사-군기(軍器) / 인사-관리(管理) / 인사-선발(選拔) / 윤리-강상(綱常) / 정론-간쟁(諫諍) / 사법-법제(法制) / 신분(身分) / 농업-전제(田制) / 물가-임금(賃金)

  • [註 003]
    자목지임(字牧之任) : 지방관.
  • [註 004]
    식년(式年) : 간지(干支)에 자(子)·오(午)·묘(卯)·유(酉)가 드는 해. 이 해에 과거를 치름.
  • [註 005]
    강규(講規) : 명경과(明經科)의 규약.
  • [註 006]
    생획(生劃) : 시험 합격자의 원정수에 부족할 경우에 대비하여 합격 후보자를 정하고 그 득점수를 살려 두는 것.
  • [註 007]
    득첩(得捷) : 과거에 급제함.
  • [註 008]
    동당(東堂) : 식년과(式年科), 또는 증광시(增廣試) 때에 강경 시험(講經試驗)을 보이는 곳. 이 말에서 나중에는 식년과나 증광시 자체를 동당이라 불렀음.
  • [註 009]
    융관(融貫) : 완전히 능통한 것.
  • [註 010]
    지위(知委) : 명령을 내려 알려줌.
  • [註 011]
    고공(雇工) : 고용인.
  • [註 012]
    상명(償命) : 살인(殺人)한 자를 죽임.
  • [註 013]
    도청(都廳) : 도감(都監)에 딸린 벼슬의 하나로 낭관(郞官)의 우두머리, 도감은 국가에 특별한 일이 있을 때 그 일을 맡아보는 임시로 설치관 관아.
  • [註 014]
    모군(募軍) : 토목 공사(土木工事) 같은 데서 삯을 받고 품팔이하는 인부. 모군꾼.
  • [註 015]
    유황점(硫黃店) : 조선 후기의 유황을 채굴하던 광산. 오군문(五軍門)이나 비변사(備邊司), 지방의 병·수영(兵水營) 등에 속히 있었음.
  • [註 016]
    밀물(密勿) : 임금의 곁에 있어 기밀(機密)에 참여하는 일.
  • [註 017]
    수차(袖箚) : 임금을 만나 뵙고 직접 비치던 상소(上疏).
  • [註 018]
    승국(勝國) : 자기 나라가 이기어 멸망시킨 나라. 여기서는 고려를 가리킴.
  • [註 019]
    태조 고황제(太祖高皇帝) : 명태조(明太祖) 주원장(朱元璋).
  • [註 020]
    이하(夷夏) : 오랑캐와 중국.
  • [註 021]
    진주(眞主) : 참된 자격을 갖춘 군주.
  • [註 022]
    병자년 : 1636 인조 14년.
  • [註 023]
    정축년 : 1637 인조 15년.
  • [註 024]
    삼전도(三田渡) : 인조가 청 태종(淸太宗)에게 항복한 곳.
  • [註 025]
    애산(厓山)의 일 : 애산(崖山)은 중국 광동성(廣東省) 신회현(新會縣)에 있는 산. 남송(南宋) 말기에 원(元)의 침략으로 중국이 망하게 되자, 장군 장세걸(張世傑)이 이곳을 위왕 병(衞王昺)을 추대하여 왕으로 삼고 송(宋)의 부흥을 도모하였으나, 원(元)의 장수 장홍범(張弘範)의 공격으로 두 사람이 모두 익사하였음. 이로부터 송나라는 완전히 망하게 됨.
  • [註 026]
    위재(韋齋) : 주송(朱松)의 호.
  • [註 027]
    성고(聖考) : 인조(仁祖)를 가리킴.
  • [註 028]
    간과(干戈) : 방패와 창.
  • [註 029]
    기고(旗鼓) : 전쟁에 쓰는 기와 북.
  • [註 030]
    기해년 : 1659 효종 10년.
  • [註 031]
    구천(句踐) : 춘추 시대(春秋時代) 월(越)나라의 제2대 임금. 구천은 오(吳)나라 부차(夫差)에게 당한 치욕을 씻고자 쓸개를 맛보면서 보복을 잊지 않았음.
  • [註 032]
    무신년 : 1668 현종 9년.
  • [註 033]
    온궁(溫宮) : 온천.
  • [註 034]
    적신(賊臣) : 허적(許積) 등을 가리킴.
  • [註 035]
    서신(書紳) : 잊지 않기 위해서 큰 띠를 적어 둠.
  • [註 036]
    밀갑(密匣) : 밀부(密符)를 넣어 두는 나무 상자.
  • [註 037]
    계옥(啓沃) : 자기 마음속에 있는 것을 열어 남의 마음속에 부음. 곧 흉금(胸襟)을 털어놓고 성심껏 인도(引導)함.

○引見大臣、備局堂上。 閔鼎重陳各道諸般身役逃故、兒弱査覈事。 李尙眞曰: "宜先禁兒弱充定之弊。" 上令講定節目入啓。 鼎重言: "江陵府使蘇斗山曾任羅州, 治績卓異, 實合方伯之任, 而履歷不多, 宜除京職, 儲養歷試, 待闕擬除。 前成川府使李端錫素以淸白善治聞, 不可以一失廢棄, 亦宜復畀字牧之任。" 上竝可之。 尙眞言: "刑曹參議崔寬莅官淸白, 曾任濟州, 不近南物, 合有褒賞之擧。" 鼎重亦爲言, 上命陞資。 閔維重言: "三南沿海各官置戰船, 元非古制, 而新造改槊之際, 徒費物力, 實無緩急可用之望。 臣意欲於沿海諸島中, 擇其要害處, 加設邊將, 爲置戰船, 而各官戰船, 則宜革罷矣。 康津古今靑山二島, 土沃民多, 而故統制使李舜臣, 陳璘留屯處也。 古今島地大, 宜設僉使;靑山島差小, 宜設萬戶, 移給各邑戰船二隻, 而能櫓軍、射砲手, 皆以島中居民充定, 則海防最爲着實, 而朝家亦無割給水軍之弊矣。 兩島外亦多可合設鎭處, 而不可一時竝擧, 先試兩島觀其成效, 次第加設宜矣。" 尙眞言: "興陽 羅老島亦合設鎭。" 上命姑試兩處。 李端夏言: "式年講規, 不問文義, 只取能通音釋, 講畫過多, 而雖善製述者, 不得以生畫得捷, 故不赴東堂。 以此, 鄕儒專事口讀, 而不解文義; 京儒只事表策, 而不知經學。 科擧, 取人初程, 而踈謬如此。 若體《大典》講規, 講論雖未該通, 不失一章大旨者爲粗; 雖通大旨, 未至融貫者爲略; 貫通旨趣, 辨說無疑者爲通, 則科程得正, 人才可得矣。" 上命預爲知委, 使擧子知所勉勵, 且添入於科擧事目。 李䎘言: "《大典》奴奸主妻, 雇工奸家長妻有定律, 而至於婢夫奸妻上典妻, 則無律文。 請下詢于入侍大臣, 定式施行。" 鼎重言: "妻上典殺婢夫, 則償命。 婢夫與雇工有異, 而以國俗言之, 雖殺之可也。 然旣是律文所無, 請消詳稟定。" 上命更議他大臣稟定。 時有義州女人禮節獄事, 而方判刑曹, 故有此陳稟。 後諸大臣皆以爲, 宜從雇工之律, 遂以此論斷, 仍爲挈令。 趙師錫言: "禮曹所置《國恤謄錄》, 旣多見失, 只遵用《五禮儀》, 而亦多踈略, 國朝已行之禮, 尤無考證處。 請設置一局, 使大臣主之, 差出堂郞, 就《五禮儀》踈略處, 參以古禮, 酌定增補。 且考列朝所因革, 作一禮書。" 上命於卒哭後, 考出《實錄》爲之。 端夏言: "故相臣李敬輿建白於孝廟朝, 請續編《國朝寶鑑》。 今領相金壽恒爲都廳, 而事未果行。 今於實錄廳加出一堂上, 專掌此事, 則趙師錫陳達之事, 亦可成之。" 仍請以江華留守李選委以此事。 且言宣祖朝三十年《實錄》, 則臣父修正, 而其後十年, 則蔡𥙿後繼修, 而頗有踈誤處。 宜使文學之臣, 依朱子 《昌黎集》, 考異作一冊子, 可無遺憾。" 李敏叙趙師錫皆言: "《實錄》事體重大, 今以一人之見, 有所添改, 則事關後弊。" 上命待摠裁官入侍時更議。 尙眞言: "明禮宮 明安公主房所屬募軍, 不許括出, 有累聖德。" 又言: "淸風府院君墓田, 有勿爲出給之敎。 朝家若欲優賜, 則令戶曹出價買給可矣。 而民田旣入其中, 則不可不還出矣。" 鼎重亦言春川一面盡爲祭田, 事體未安。 上曰: "所謂墓田, 不過收其田稅, 用於祭需也。 明禮宮是大王大妃殿所屬, 故募軍括出事, 使之安徐矣。 卿等之言如此, 依硫黃店例擧行。" 執義安後泰申前啓, 又以全羅監司任奎政令怠弛, 擧措謬戾, 一道之人, 率皆失望, 請罷職。 黃山察訪韓舜相淫悖無行, 締結權門, 家在至近, 駄載絡繹, 請削去仕版。 上不從。 鼎重言: "之爲人, 雖未縝密, 頗有氣槪。 故吏曹問議於臣等而差送矣。 臺論如此, 似當改差, 速出其代。" 上從之。 宋時烈進曰: "自上久廢開講, 雖不得出御筵席, 想必有省覽文字, 未知何書乎。" 上曰: "《心經》《聖學輯要》時時披覽矣。" 時烈曰: "臣於孝廟朝, 屢承密勿之聖敎, 臣每欲一陳於嗣聖之前矣。 曩時尹鑴假托孝廟朝時事而爲言, 及其以凶悖, 被罪以死, 人皆爲戒, 竝與其言而諱之。 夫雖假托, 而事實相反, 豈可以之如此, 而仍忘祖宗朝大義哉? 臣歸自海上, 則論議習俗, 大異於先朝矣。 時朝臣入侍, 有不盡以言語陳達者, 則預具奏箚, 展讀於榻前。 臣敢依此例, 乞於燕閑之中, 試賜省覽。" 因起進袖箚, 其箚曰:

天敍天秩, 惟君臣父子爲大, 是所謂天之經, 地之義, 民之彝者也。 自古帝王所以正己齊家者在此; 所以持綱挈維者在此, 苟或捨此, 則人類入於禽獸, 中國淪於夷狄, 可不懼哉? 惟我東方, 自箕子以來, 已爲禮義之邦, 而至於勝國, 胡風猶未盡變矣。 至我太祖高皇帝, 初定天下, 文忠公 鄭夢周首建大義, 辨夷夏陰陽之分, 背胡元而事眞主。 至於我太祖大王開國, 高皇帝視同內服, 恩禮周渥;我太祖大王忠貞恪勤, 如子事父。 至於壬辰之變, 受報酬勤, 宗社亡而復存, 生民死而復生, 環東土數千里, 一草一木, 何莫非帝德之所濡哉? 是故, 我宣祖大王益罄忠誠, 手寫再造藩邦四大字, 以寓睿志矣。 不幸丙丁之變, 國勢萎弱, 將相駑劣, 至有三田之擧, 可勝痛哉? 然而仁祖大王誠意深篤, 每於皇朝慶節, 獨詣後園, 痛泣拜跪, 二三大臣, 亦密伸私義, 以受皇朝嘉奬, 宗社之至今扶持者, 實賴於斯矣。 何也? 君上者, 臣民之所視效, 自君上而尙義理, 正倫常, 則忠君事長之義明, 而雖至危之際, 猶能固結而不解, 觀於崖山可見矣。 苟或反是, 則後親遺君之風盛, 而終至於不奪不饜矣。 故朱子誦其父韋齋之言, 而特表而出之曰: "父子君臣, 無所逃於天地之間, 如人呼吸於元氣之中, 一息之不屬, 理必至於斃。" 此誠不可易之至論也。 其幾如此, 可不畏也哉? 至於我孝宗大王痛聖考之危辱, 憤冠屨之倒置, 日夜之所以誓於心, 勵於志者, 罔非復讎雪恥四字而已。 以故, 金珠皮幣往徠之中, 干戈旗皷奮發之意, 實有所寓焉。 嘗答相臣李敬輿疏曰: "至痛在心, 日暮途遠。" 又嘗以此意, 言之於今相臣閔鼎重矣。 然而又必曰: "理不得其要, 則終於虛僞之歸而已。 王者所奉者, 天無私覆, 地無私載, 日月無私照而已。 我旣無私, 則可以淬礪臣下, 臣下之不奉公營私者, 可以加之刑戮。" 聖意如是, 故己亥春, 遣閔維重南九萬李翊等, 廉問外方也, 凡干諸宮家鹽盆、漁箭、願堂等, 凡係宮家私事者, 一切察擧, 以爲革罷之地。 當是時, 聖意皎然如靑天白日矣。 不幸維重等未及復命, 而弓劍遽遺, 此豈獨東方之不幸? 抑天下之不幸也。 然而當日聖意, 豈欲不量時勢, 輕挑大禍哉? 蓋嘗曰: "生聚敎訓, 遲以歲月, 當如句踐之爲。" 又嘗曰: "視吾力之强弱, 觀彼釁之淺深。" 又曰: "此與學問之道無異, 徐徐乎無欲速也;汲汲乎不敢惰也。" 又嘗曰: "此志强立, 此心淸明, 都在於學問。" 以故, 雖聖躬違豫之時, 猶日御筵席, 講論書, 以溯乎精一之淵源, 此孝廟所以志之大而操之要者也。 至我顯宗大王, 非不欲繼述其志事, 而不幸長時在疾, 事不從心。 臣下又不能擔當國事, 十五六年之間, 悠泛度日, 國勢日入於委靡不振, 此實先大王所嘗慨然者也。 臣於戊申, 自溫宮隨駕入京, 嘗於筵席, 微發繼述之端, 先王亦示頷可之意, 而惟以聽聞之煩, 命史官勿書此事, 想亦埋沒矣。 及至我殿下卽位之初, 賊臣當國, 假托大義, 實濟其私, 肆其凶悖, 終陷刑戮。 自是之後, 大小之人, 一切以此爲戒, 以《春秋》爲可諱者。 夫王莽, 而人不以是病;黃巢 , 而人誰以此疑 哉? 今殿下以聰明睿智之聖, 有神武不殺之德, 臣雖愚昧, 決知殿下之足以有爲也。 何者? 曩於凶逆之變, 殿下沈機英斷, 不動聲色, 轉眄之間, 風揮日舒。 推是以往, 顧何事之不成哉? 然如欲有爲, 則不在他求, 實在於去己私, 復天理而已。 己私、天理, 相爲消長, 而國家之治亂安危係焉。 自古人君孰有好危亂, 而惡治安哉? 惟不勝己私, 以至於百僚相師, 馴致乎不可爲, 可不戒哉? 臣嘗誦朱子之言, 告孝廟曰: "中原之戎虜易逐, 而一己之私慾難除; 不世之大功易立, 而至微之本心難保。" 孝廟深味乎斯, 而下敎曰: "此言眞可書紳。" 噫! 當日之聖志聖學如此, 臣欲一暴白, 而恐無其日矣。 何幸今日遭遇神孫, 略此陳述, 伏乞殿下之留神焉。 今日殿下之眷臣極矣, 留臣至矣。 惟臣老病垂死, 神精消亡, 環顧其中, 他無所有。 只此一事, 常所耿耿於心者, 而今旣粗伸, 從此溘然可以無憾矣。

上受置案上曰: "欲從容觀之。" 翌日以密匣緘, 批旨以下曰: "觀卿奏箚, 惟我列聖至誠大義, 有足以通神明, 而永有辭於天下後世也。 再三披覽, 欽誦不已。 而末乃以去己私, 復天理之說, 反覆誡誨, 深用嘉尙, 可不留心焉? 卿其安心勿辭, 久留京邸, 出入筵席, 開發啓沃, 以補不逮。"


  • 【태백산사고본】 10책 11권 1장 B면【국편영인본】 38책 508면
  • 【분류】
    왕실-종사(宗社) / 왕실-종친(宗親) / 왕실-경연(經筵) / 왕실-국왕(國王) / 군사-군역(軍役) / 군사-관방(關防) / 군사-군기(軍器) / 인사-관리(管理) / 인사-선발(選拔) / 윤리-강상(綱常) / 정론-간쟁(諫諍) / 사법-법제(法制) / 신분(身分) / 농업-전제(田制) / 물가-임금(賃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