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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종실록 10권, 숙종 6년 8월 29일 을유 2번째기사 1680년 청 강희(康熙) 19년

경복궁의 중건에 관해 김수항·민정중 등과 논의하다

오시(午時)에 임금이 회맹제소(會盟祭所)로 나아갔다. 궁궐을 나가서 경복궁(景福宮)의 옛 터를 지나서 사정전(思政殿) 터의 막차(幕次)로 나아가 대신 김수항(金壽恒) 등을 인견(引見)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선왕(先王)의 법궁(法宮)이 황폐하여 이 지경이 되었구나. 이를 보니, 개탄스러울 뿐이로다."

하니, 김수항이 아뢰기를,

"조종(祖宗)께서 덕(德)을 쌓고 인(仁)을 쌓아서 기업(基業)을 창건하여 후대에 물려주었는데, 임진 왜란(壬辰倭亂)을 겪은 이래로 법궁(法宮)이 황폐하여진 지가 지금 1백 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친림(親臨)하시니, 주상께서는 의당 감개스러운 마음이 간절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어찌 법궁(法宮)만이 그러하겠습니까? 조종(祖宗)의 훌륭한 법과 아름다운 정치가 또한 모두 폐지되거나 허물어져서 시행되지 아니하니, 이것이 더욱 성상께서 경계하셔야 합니다."

하였다. 민정중(閔鼎重)이 아뢰기를,

"조종(祖宗)의 옛 터를 보시고, 조종의 남기신 은택(恩澤)을 생각하신다면, 금일의 중흥(中興)할 책임은 오로지 전하에게 있습니다."

하였다. 김수항이 이어서 아뢰기를,

"이것이 바로 사정전(思政殿)의 기지(基址)이고, 이 궁전의 뒷면이 곧 강녕전(康寧殿)으로 바로 침전(寢殿)이었습니다. 동문(東門)을 일화문(日華門)이라고 하고, 서문(西門)을 월화문(月華門)이라고 하였는데, 세자궁(世子宮)은 곧 그 바깥에 있었습니다. 빈 터로 보면 다른 대궐(大闕)에 비하여 진실로 협착하고 막힌 듯하고, 제각사(諸各司)가 모두 동·서로 포치(鋪置)되었으며, 또 지대(池臺)와 원유(苑囿)의 좋은 경치가 없었습니다. 북문(北門) 밖은 곧 회맹단(會盟壇)으로 그곳이 삼청동(三淸洞)에서 멀지 않은데도 이것이 모두 후원(後苑)에 들어가지 않았으니, 조종(祖宗)의 검소한 덕(德)을 생각할 수가 있으며, 비록 황란(荒亂)한 연산군(燕山君)도 또한 감히 개척(開拓)하지 못하였습니다."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9책 10권 13장 A면【국편영인본】 38책 474면
  • 【분류】
    왕실-국왕(國王) / 왕실-궁관(宮官) / 왕실-의식(儀式) / 인사-관리(管理)

○午時, 上詣會盟祭所。 出宮, 歷景福宮舊基, 御思政殿址幕次, 引見大臣金壽恒等。 上曰: "先王法宮, 荒廢至此, 見之慨然矣。" 壽恒曰: "祖宗積德累仁, 創基垂後, 而自經壬辰以來, 法宮荒廢, 今至百年, 始爲親臨, 自上宜切感慨之懷矣。 然豈惟法宮爲然? 祖宗良法美政, 亦皆廢壞不行, "此尤聖上所宜惕念者也。" 閔鼎重曰: "見祖宗之舊基, 思祖宗之遺澤, 則今日中興之責, 亶在於殿下矣。" 壽恒仍言: 此乃思政殿基址, 而此殿後面, 卽康寧殿, 乃寢殿也。 東門曰日華門, 西門曰月華門, 而世子宮, 卽其外也。 以空基見之, 比他闕固似狹隘, 而諸各司皆鋪置東西, 且無池臺苑囿之勝。 北門外乃會盟壇也。 其地不遠於三淸洞, 而此皆不入於後苑之中, 可想祖宗之儉德。 雖以燕山之荒亂, 亦不敢開拓矣。"


  • 【태백산사고본】 9책 10권 13장 A면【국편영인본】 38책 474면
  • 【분류】
    왕실-국왕(國王) / 왕실-궁관(宮官) / 왕실-의식(儀式) / 인사-관리(管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