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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종실록 9권, 숙종 6년 4월 17일 병자 2번째기사 1680년 청 강희(康熙) 19년

국청에서 복창군 이정의 사사를 청하다

이정(李楨)의 공사(供辭)에 이르기를,

"내가 허견정원로와 더불어 조금도 서로 아는 일이 없는데, 무릇 상소 및 예문(禮文)의 옳고 그름과 서얼(庶孽)의 통청(通淸)을 어찌 상의할 이치가 있겠습니까? 또한 어찌 어두운 밤에 왕래할 이치가 있겠습니까? 나는 자못 문자(文字)를 알아서 소장(疏章)에 이르러서는 일찍이 의 손을 빌린 적이 없습니다. 만약 허견과 서로 친하여 모든 일을 함께 하였으면, 전번에 이정청(釐正廳)의 일로써 대신(大臣)과 더불어 논쟁할 때에 허적(許積)의 업신여기고 짓밟음이 어찌 그처럼 심한 데 이르렀겠습니까? 내가 만약 무상(無狀)하여 허견의 집에 왕래하였다면, 아무 월일(月日)에 허견의 집에 가서 아무 일을 서로 의논한 것을 반드시 알 것이니, 청컨대 여러 사람과 더불어 면질(面質)하게 하소서."

하니, 국청에서 계청(啓請)하여 정(楨) 등을 대변(對辨)한 뒤에 아뢰기를,

"강만송이 서로 다투어 변명하면서 마침내 귀일(歸一)되지 아니하니, 을 형추(刑推)하여 실정을 알아 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이 연달아 네 차례 형신을 받았으나 불복하자, 국청에서 형신을 더하기를 청하니, 답하기를,

"강만송이 승복한 초사 가운데 의 이름자가 이미 추대(推戴)하는 데에 나왔고, 그의 초사 가운데 있기를, ‘정원로는 술사(術士)이고 허견은 요인(妖人)인데 이남(李柟)이 교분이 있으니, 어찌 염려할 만한 것이 아니겠느냐?’고 한 것은 비록 사실대로 말한 것은 아니지마는 함께 참여한 자취가 밝게 드러나서 숨기기 어려우니, 이는 반승복(半承服)이다. 형신을 다할 필요가 없다."

하였다. 국청에서 아뢰기를,

"국청은 사체(事體)가 중대하니, 수정(輸情)164) 을 다하지 않기 전에는 ‘반승복’이라고 하여 바로 논단(論斷)할 수 없습니다. 법률[三尺] 외에 가볍게 의논하기가 어려우니, 앞의 계청한 바에 의하여 형추(刑推)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여섯 차례 형신을 시행한 뒤에 또, ‘참작하여 의논해 아뢰라.’는 명이 있었는데, 뒤에 인견(引見)할 때에, 형신을 정지하고 사사(賜死)할 일을 정탈(定奪)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8책 9권 24장 B면【국편영인본】 38책 442면
  • 【분류】
    사법(司法) / 변란-정변(政變) / 왕실-종친(宗親)

  • [註 164]
    수정(輸情) : 죄인이 범죄 사실을 남김 없이 고백함.

供曰: "元老無一毫相知之分。 凡上疏及禮文是非, 庶孽通淸, 豈有相議之事, 而亦豈有昏夜往來之理乎? 頗識文字, 至於疏章, 未嘗借手。 若使與相親, 共爲凡事, 則向者以釐正廳事, 與大臣爭論時, 之凌踏, 豈至若彼之甚乎? 若無狀, 往來家, 則元老萬鐵必知某月日往家, 相議某事, 請與諸人面質。" 鞫廳啓請等對辨後, 啓曰: "萬松, 互相爭辨, 終未歸一。 刑推得情何如?" 上從之。 連受刑四次, 不服。 鞫廳請加刑, 答曰: "萬松承服招辭中, 之名字, 旣出於推戴, 渠之招辭中有曰: ‘元老術士, 許堅妖人, 而有交分, 豈非可慮?’ 云者, 雖未吐實, 同參之跡, 昭著難掩。 此是半承服也。 不必加刑。" 鞫廳啓曰: "鞫廳事體重大, 未盡輸情之前, 不可謂之半承服, 而直爲論斷。 三尺之外, 有難輕議, 依前啓請, 刑推何如?" 上從之。 六次加刑後, 又有參酌議啓之命。 後於引見時, 停刑賜死事定奪。


  • 【태백산사고본】 8책 9권 24장 B면【국편영인본】 38책 442면
  • 【분류】
    사법(司法) / 변란-정변(政變) / 왕실-종친(宗親)