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
상세검색 문자입력기
숙종실록8권, 숙종 5년 11월 29일 경신 3번째기사 1679년 청 강희(康熙) 18년

사은사 낭원군 이간 등이 연경에서 돌아와 소식을 전하다

사은사(謝恩使) 낭원군(郞原君) 이간(李偘)과 부사(副使) 오두인(吳斗寅)과 서장관(書狀官) 이화진(李華鎭)이 연경(燕京)에서 돌아오니, 임금이 인견하고 노고를 치하하였다. 이어 지진의 재해를 물으니, 낭원군 이 대답하기를,

"통주(通州)·계주(薊州) 등은 완전한 집이 하나도 없습니다. 특히 통주는 물화(物貨)가 집결되고 인물이 매우 많은 곳인데도 지금은 성첩(城堞)이나 성문(城門)이 하나도 완전한 곳이 없고 좌우의 줄행랑도 모두 무너져서, 허물어진 성벽은 보기에도 참담하였습니다. 북경(北京)은 통주에 비해 조금 성하기는 하나 성문과 성가퀴 및 성 안팎의 인가(人家)가 많이 붕괴되어 있고, 궁전의 대문 한 곳 및 황극전(皇極殿)의 층루, 그리고 봉선전(奉先殿)도 무너졌으며, 옥하관(玉河館) 담장과 여러 아문(衙門)도 무너진 데가 많았습니다. 개수의 공사가 워낙 호대(浩大)하다보니, 이로부터 인심이 흉흉하여져서 진정시킬 수 없을 정도입니다. 사람이 깔려 죽은 자는 3만여 명인데, 이는 한낮에 교역을 하고 있는 즈음에 갑자기 무너졌기 때문에 죽은 사람이 이처럼 많았다고 합니다. 신들이 돌아올 적에 통관(通官) 무리들이 수역관(首譯官)에게 말하기를, ‘이것은 예전에 없었던 변고로서 황제께서도 크게 놀라셨으니, 조선에서 위문의 사절이 올 것이다.’고 하였다 합니다."

하였다. 임금이 대신에게 물어서 처리하라고 하였다. 임금이 남방의 소식을 물으니, 오두인이 대답하기를,

"오삼계(吳三桂)의 생사(生死)는 아직 알 수 없으나, 진주(辰州)는 겨우 수복이 되자 곧바로 마보(馬保)에게 빼앗겼고, 악주(岳州)장사(長沙)는 비록 공격하여 되찾기는 하였어도 오삼계의 장수들이 그 집을 불사르고 인민을 잡아갔기 때문에 얻은 것이라고는 빈 성에 불과할 뿐이라고 합니다. 서달(西㺚)도 반란을 일으켰는데, 아직 접전(接戰)은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일찍이 들으니 색액도(索額圖)가 권력을 마음대로 쓴다고 하던데, 지금도 그러하던가?"

하니, 대답하기를,

"색액도는 지금도 권력을 마음대로 쓰고 있는데, 도찰원(都察院)의 위상주(魏尙周)는 황제의 신임을 받는 사람으로서, 강성한 세력을 두려워하지 않고 지진이 있은 뒤에 색액도 및 병부(兵部)·형부 상서(刑部尙書)가 사정을 따르고 뇌물을 받은 죄를 탄핵하니, 황제가 크게 노하여 그 주문(奏文)을 땅에 내던지고 이어 위상주를 내쳤다가, 수일 후에 다시 그 탄핵의 글을 가져다 위상주로 하여금 면주(面奏)하게 하고, 이어 근시(近侍)로 하여금 색액도를 부축해 나가게 하고 병부·형부 상서도 문 밖으로 내쳤는데, 그 뒤 끝내 사실 무근한 일이 되어 색액도 등 여러 사람의 관직을 복직시키고, 또한 위상주가 뜬소문을 듣고 상주(上奏)한 죄도 다스리지 않았다고 합니다."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7책 8권 52장 B면【국편영인본】 38책 427면
  • 【분류】
    왕실-국왕(國王) / 외교-야(野)

    ○謝恩使朗原君 、副使吳斗寅、書狀官李華鎭回。 上引見勞勉, 仍問地震之變, 對曰: "通州薊州等處, 無一完舍。 通州物貨所聚, 人物極盛, 而今則城堞城門, 無一完處, 左右長廊皆頹塌, 崩城破壁, 見之慘目。 北京則比通州稍完, 而城門女墻及城內外人家, 多崩頹, 殿門一處及皇極殿層樓及奉先殿亦頹。 玉河館墻垣及諸衙門, 亦多頹毁, 改造之役, 極其浩大。 自此以後, 人心洶洶, 不能定矣。 人口壓死者三萬餘, 蓋白日交易之際, 猝然頹壓, 故死者如是云矣。 臣等回還時, 通官輩謂首譯曰: ‘此乃前所未有之變, 皇帝大驚動。 朝鮮似有慰問之擧。’ 云矣。" 上令問大臣處之。 上問南報, 斗寅對曰: "吳三桂死生, 姑未可知, 而辰川纔復, 旋爲馬保所奪, 岳州長沙雖曰攻取, 三桂之將燒其室廬, 掠其人民而去, 所得者不過空城耳。 西㺚亦叛, 而姑未接戰云矣。" 上曰: "曾聞索額圖擅權, 今亦然乎?" 對曰: "索額圖尙擅權, 而都察院魏尙周以皇帝信任之人, 不畏强禦, 地震之後, 彈論索額圖及兵部、刑部循私受賂之罪, 皇帝大怒, 擲其奏於地, 仍黜魏尙周。 後數日, 取其彈章, 使尙周面奏, 仍令近侍, 扶出額圖, 兵刑尙書, 亦黜門外。 其後事竟無實, 故復額圖、諸人之官, 而亦不治尙周風聞之罪云矣。"


    • 【태백산사고본】 7책 8권 52장 B면【국편영인본】 38책 427면
    • 【분류】
      왕실-국왕(國王) / 외교-야(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