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량에서 대규모 열무를 행하다
노량(露梁)에서 대규모의 열무(閱武)를 하는데, 임금이 융복(戎服)과 우립(羽笠) 차림으로 말을 타니, 모든 관원들도 융복 차립으로 어가를 따랐다. 노량의 교장(敎場)에 이르러 장전(帳殿)에 드니, 병방 승지(兵房承旨) 안여석(安如石)이 여러 중신들에게 북을 잡기를 청하고, 훈련 대장 유혁연(柳赫然)이 조련을 거행할 것을 청하였다. 중군(中軍) 윤천뢰(尹天賚)가 단(壇) 밑에 서서 승장포(升帳砲) 쏠 것을 청하고 또 깃발 올릴 것을 청한 다음 호각을 불어 관기(官旗)를 모으고는, 포(砲) 쏘는 소리와 함께 진세(陣勢)를 펼치고 가왜(假倭)를 편성하여 전진하고 후퇴하며 어울려 싸우는 형상을 만들었다. 오시수(吳始壽)가 아뢰기를,
"세종 때 선덕(宣德)157) 병오년158) 에 남교(南郊)에서 대규모의 열무를 할 적에, 왕세자 이하 모든 관원이 갑주(甲胄)를 갖추고서, 1품은 단 위에 오르고 2품 이하는 모두 단 밑에 있었으며, 진세(陣勢)를 다섯 번 바꾼 뒤에 해산시켰습니다. 오늘날 하는 것은 바로 평일의 사습(私習)으로서 이것으로는 잘하고 못하는 것을 알 수가 없습니다. 때문에 임인년159) 열무 때는 이완(李完)이 대장(大將)이 되어, 삼면에서 갑자기 적의 침입을 전달하니, 별장(別將)들이 대처할 바를 알지 못했습니다. 이번에도 별다른 호령이 있은 뒤에야 그 잘하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하고, 병조 판서 김석주(金錫胄)가 아뢰기를,
"예전에는 주장(主將) 외에 또 객대장(客大將)을 차출하여 두 진영을 서로 대치시켜서, 각기 기병(奇兵)을 내어 무예를 겨루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임진 왜란 이후부터 비로서 척계광(戚繼光)의 병법을 써서 가왜(假倭)를 편성하여 전투를 익혔던 것입니다."
하였다. 유혁연이 화차(火車)를 내어 별도로 한 진영을 편성할 것을 청하니, 〈이 화차는〉 지난해 훈련 도감(訓鍊都監)에서 새로 만든 것이다. 화차 한 대가 5층으로 되어 있으며, 층마다 열 매(枚)의 화총(火銃)을 설치하여 전진·후퇴하며 어울려 싸우는데, 50매의 화총을 한꺼번에 같이 쏘니, 참으로 평지의 이기(利器)이다. 임금이 군기시(軍器寺)와 훈련 도감에 명하여 더 만들게 하였다. 여러 군대가 막 영루(營壘)를 철수하여 퇴진하려고 하는데, 임금이 김석주에게 명하여 금군(禁軍)을 풀어 미처 퇴진하기 전에 침범하게 하였는데, 금군이 여러 차례 전진하고 후퇴하니, 임금이 금군을 철수하여 세 곳에 집결시켜 약속한 장소로 물러가도록 명하였다. 화차와 영루가 다시 늘어서자, 임금이 또 마병(馬兵)에 명하여 돌진하게 했으나 들어가지 못하였다. 어영군(御營軍) 및 정선한 잡색군(雜色軍) 두서너 초(哨)160) 를 합쳐서 포진시키고, 또 가왜(假倭) 한 초를 차출하여 어울려 싸우고 번갈아 포(砲)를 쏘게 하다가 한참 뒤에야 그쳤다.
허적(許積)이 나아와 아뢰기를,
"성삼문(成三問) 등의 육신(六臣)이 죽은 뒤 어떤 의사(義士)가 이 강의 남쪽 언덕에 시체를 거두어 묻고서 돌을 세워 표시를 하였으나, 감히 그 이름은 쓰지 못하고 다만 모씨(某氏)의 묘(墓)라고만 써 놓았는데, 그 무덤이 지금은 모두 허물어졌습니다. 선왕(先王)께서 그 자손을 녹용(錄用)하라고 명한 것은 대개 그 절의를 칭찬한 것입니다. 지금 임금의 행차가 바로 가까이 거둥하셨으니, 특별히 봉식(封殖)을 명하신다면 빛이 날 듯합니다."
하였다. 민희(閔熙)가 옳지 않다고 하니, 허적이 다시 아뢰기를,
"명 태종(明太宗)이 방효유(方孝孺) 및 그의 종당(宗黨) 70여 명을 죽였으나, 곧바로 그의 벼슬을 복직시키고 그의 묘를 세워 주었으니, 대개 절의는 군주로서 마땅히 포창해야 할 바이기 때문입니다."
하니, 임금이 해당 관사에 명하여 봉식(封殖)하게 하였다. 임금이 이어 상(賞)을 내리는데, 양국(兩局)161) 의 대장과 중군 및 금군의 별장·도감, 마병의 좌우 별장에게 각각 숙마(熟馬)한 필씩을 내렸다. 대사간 민취도(閔就道)가 아뢰기를,
"삼군(三軍)의 이목(耳目)이 금고(金鼓)와 정기(旌旗)에 있는데, 단 위의 호령을 군중에서 제대로 알아듣지 못하여 반드시 교련관이 내려가서 말로 전달한 뒤에야 비로소 앉고 일어나는 동작을 취하니, 어디에다 기고(旗鼓)를 쓰려는 것입니까? 훈련 대장 유혁연과 중군 윤천뢰를 모두 추고하소서."
하니, 임금이 따르지 않다가, 이튿날 이르러 윤허하였다. 윤휴(尹鑴)가 아뢰기를,
"주상께서 이미 몸소 대장의 일을 행하셨으니, 두 대장은 마땅히 갑주(甲胄)를 갖추고 중군(中軍)의 일을 행했어야 했는데, 버젓이 단 위에 눌러 있어 신들과 다름이 없었습니다. 근일의 예규(例規)가 비록 이렇다 하더라도 이는 잘못된 예규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전례가 그래왔던 것이지, 오늘날 처음 만든 것은 아니다."
하였다. 저녁에 궁궐에 돌아왔다.
- 【태백산사고본】 7책 8권 42장 B면【국편영인본】 38책 422면
- 【분류】왕실-행행(行幸) / 왕실-사급(賜給) / 윤리(倫理) / 군사-병법(兵法) / 역사-전사(前史) / 인사-관리(管理) / 정론-간쟁(諫諍) / 사법-탄핵(彈劾)
- [註 157]선덕(宣德) : 명(明)나라 선종(宣宗)의 연호.
- [註 158]
병오년 : 1426 세종 8년.- [註 159]
○癸卯/大閱于露梁。 上具戎服, 羽笠乘馬, 百官亦以戎服隨駕, 至露梁敎場, 御帳殿。 兵房承旨安如石請宰樞執鼓, 訓鍊大將柳赫然請行操, 中軍尹天賚立壇下, 請放升帳砲, 又請升旗掌號笛, 聚官旗, 聽發放, 布列陣勢, 作假倭爲進退合戰之狀。 吳始壽曰: "世宗朝宣德丙午, 大閱于南郊, 王世子以下, 百官皆具甲冑, 一品則上壇, 二品以下竝下壇, 命五變陣勢而罷, 如今日所爲。 乃平日所私習者, 以此無以知其能拙, 故壬寅年閱武時, 李浣爲大將, 三面猝然報敵, 則別將輩莫知所以爲應。 今亦有別號令, 然後可知其能也。" 兵曹判書金錫冑曰: "古者主將之外, 又出客大將, 爲兩陣相對, 各出奇兵較藝矣。 自倭亂以後, 始用戚繼光兵法, 作假倭, 習戰鬪矣。" 柳赫然請出火車, 別爲一陣, 去年自訓局新造者也。 一車爲五層, 每層置十枚火銃, 進退合戰, 五十火銃一時齊發, 眞平地利器也。 上命軍器寺、訓鍊都監加造。 諸軍方收營退陣, 上命金錫冑縱禁軍, 及其未陣而犯之, 禁軍屢進屢退。 上命收禁軍, 聚三處, 退歸信地, 車營已布。 上又命馬兵突陣, 而不得入。 御營軍及精抄、雜色軍合數哨布陣, 又出假倭一哨, 合戰輪放, 良久而止。 積進曰: "成三問等六臣死後, 有義士收瘞於此江南岸, 立石以表, 而不敢書其名, 只曰某氏之墓。 其墳塋, 今皆頹圮, 先朝命錄用子孫, 蓋嘉其節義也。 今車駕迫臨近地, 特令封殖, 似有光矣。" 閔熙以爲不可, 積曰: "明 太宗殺方孝孺及其宗黨七十餘人, 而卽令復其官, 樹其墓。 蓋以節義人君之所宜褒故也。" 上命有司封殖焉。 上仍行賞, 面賜兩局大將、中軍及禁軍別將、都監馬兵、左右別將各熟馬一匹。 大司諫閔就道曰: "三軍耳目, 在於金皷旌旗, 而壇上號令, 軍中不能解聽, 必敎鍊官下去口授而後, 始爲坐作之節, 將焉用旗鼓乎哉? 請訓鍊大將柳赫然、中軍尹天賚竝推考。" 上不從, 至翌日允之。 尹鑴曰: "自上旣躬行大將事, 則兩大將所當具甲冑, 行中軍事, 而偃然在壇上, 與臣等無異。 近例雖如此, 此謬規也。" 上曰: "前例旣然, 非今日創始也。" 夕還宮。
- 【태백산사고본】 7책 8권 42장 B면【국편영인본】 38책 422면
- 【분류】왕실-행행(行幸) / 왕실-사급(賜給) / 윤리(倫理) / 군사-병법(兵法) / 역사-전사(前史) / 인사-관리(管理) / 정론-간쟁(諫諍) / 사법-탄핵(彈劾)
- [註 15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