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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종실록8권, 숙종 5년 3월 7일 임인 2번째기사 1679년 청 강희(康熙) 18년

복평군 이연 등이 중국의 사정을 염탐한 별단을 올리다

이연(李㮒)039) 등이 중국의 사정을 염탐한 별단(別單)에서 이르기를,

"무령현(撫寧縣)에 붙인 방(榜)에 ‘오삼계(吳三桂)는 8월 17일에 죽었다.’ 하고 또 ‘형주부(衡州府) 성안의 성문이 4일 동안 열리지 않았는데, 21일에 위장군(僞將軍) 마보(馬寶)·호국주(胡國柱)·왕장군(王將軍) 등이 영흥(永興)으로부터 와서 성문을 열었다.’ 하였습니다. 또 들으니. 차인(差人)이 악주(岳州)로 가서 오응기(吳應期)·삼랑랑(三娘娘)을 악주로 부르고 오세종(吳世琮)광서(廣西)로 불렀다고 합니다. 또 김거군(金巨軍)은 말하기를, ‘장사부(長沙府)는 이미 차지했으니 4월이나 5월 사이에 마땅히 오적(吳賊)040) 을 평정한 뒤 사면령(赦免令)을 반포할 것이다.’고 하였는데, 이 말을 믿기는 어렵습니다. 또 성이 방씨(房氏)란 사람에게 얻은 책을 보니, ‘지난해 4월에 오삼계가 즉위하여 장사에 도읍을 정했다.’고 했습니다. 또 ‘마보오세림(吳世霖)의 밀지(密旨)를 받들어 오삼계를 운남(雲南)에 장사지냈으며, 같은 도독(都督) 진수(陳壽)는 군마(軍馬)를 조련하였는데, 그 후 진수가 청나라 군사를 격파했으므로 신출귀몰(神出鬼沒)하다는 말을 들었다.’고 했습니다. 또 ’청나라 군병이 마보에게 패하고 급히 원병(援兵)을 청했다.’하였으며, 또 ‘오응기오삼계의 조카이고, 오세림오삼계의 손자이며, 삼랑랑오삼계의 희첩(姬妾)으로 오세림을 길렀다.’고 했습니다. 또 한인(漢人) 중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오삼계는 사실 죽지 않았고, 청나라 사람들이 만들어낸 말이다.’고 했으며, 또 어떤 사람은, ‘오삼계는 비록 죽었지만 오세림이 그 할아버지보다 나으며, 마보·진수 등도 승리하여 오주(梧州)를 함몰시켰으며, 광서의 전 지역이 오(吳)에게로 돌아갔고, 왕보신(王輔臣)이 여러 차례 오지무(吳之茂)에게 괴로움을 당했으며, 정금(鄭錦)이 바다로 도망하고 경정충(耿精忠)이 패하여 달아났으며, 더구나 위에서는 놀이에 법도가 없고 여색을 탐함에 만족을 모르며, 아래에서는 탐욕이 풍조를 이루어 뇌물이 공공연하게 오고가니, 나라의 위급함이 조석(朝夕)에 다가왔다.’고 말했습니다."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7책 8권 9장 B면【국편영인본】 38책 405면
  • 【분류】
    외교-야(野)

  • [註 039]
    이연(李㮒) : 복평군(福平君).
  • [註 040]
    오적(吳賊) : 오삼계(吳三桂).

等探彼國情形別單曰: "撫寧縣榜文云: ‘吳三桂八月十七日身死。’ 又言: ‘衡州府城內城門, 四日不開, 二十一日僞將軍馬寶胡國柱王將軍永興來, 開城門。’ 又聞差人往岳州, 喚吳應期三娘娘岳州, 喚吳世琮廣西云。 而金巨軍曰: ‘長沙府旣已得之, 四五月間, 當以賊之平, 將頒赦。’ 此言難信。 又得房姓人冊子, 上年四月三桂卽位, 定都長沙, 又言: ‘馬寶吳世霖密旨, 葬三桂雲南, 同都督陳壽組練軍馬, 其後陳壽殺破兵, 而至稱陳壽以神出鬼沒。’ 又言: ‘兵爲馬寶所敗, 急請援兵。’ 又言: ‘應期, 三桂之姪; 世霖, 三桂之孫; 三娘 , 三桂之姬妾, 而鞠育世霖。’ 漢人或云: ‘三桂實不死, 淸人做出誑言。’ 或云: ‘三桂雖死, 世霖勝於其祖, 馬寶陳壽等, 亦頗獲勝。 梧州陷沒、廣西全省歸吳輔臣, 屢爲吳之茂所窘, 鄭錦跳梁海上, 而耿精忠敗走。 況上以盤遊無度, 漁色無厭, 下以貪饕成風, 賄賂公行, 國之危亡, 迫在朝夕。’ 云。"


  • 【태백산사고본】 7책 8권 9장 B면【국편영인본】 38책 405면
  • 【분류】
    외교-야(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