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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종실록7권, 숙종 4년 12월 3일 기사 3번째기사 1678년 청 강희(康熙) 17년

관방에 관한 황해도 관찰사 권수의 상소문

황해도 관찰사(黃海道觀察使) 권수(權脩)가 상소(上疏)하여 관방(關防)의 이해(利害)를 논하고, 이어서 도경(圖經)을 올렸다. 그 소(疏)에 대략 말하기를,

"신이 두루 도내(道內)의 산성(山城)을 보았더니, 해주(海州)의 수양 산성(首陽山城)과 문화(文化)의 구월 산성(九月山城), 재령(載寧)의 장수 산성(長壽山城), 서흥(瑞興)의 대현 산성(大峴山城)과 같은 데는 암석(巖石)으로 막히고 험준하고 협착하여 궁벽한 산협(山峽)에 있으니, 곧 고인(古人)의 이른바 산언덕에 피병(避丙)할 곳이지 결코 견고하게 막고 적의 침략을 방어할 요해처(要害處)는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정방성(正方城)은 오른쪽으로 동선(洞仙)의 재[嶺]와 연하였고 왼쪽으로는 극성(棘城)의 길을 베개하여 가장 편리한 형승지(形勝地)에 웅거하였습니다. 그러나 관서(關西)로부터 본도(本道)에 통하는 것은 여섯 갈래의 길이 있으니, 동선이 직로(直路)가 되며, 남쪽에는 극성이 있고, 북쪽에는 자비령(慈悲嶺)·판적원(板籍院)·색장(塞墻)·색남(塞南) 등의 관(關)이 있습니다. 그러니 좁다고 분둔(分屯)하여 막아서 지킬 계책은 세우지 않고서 홀로 정방성 한 곳만을 지키게 되면, 적병(敵兵)이 사납게 달려와도 구원할 길이 없어서 마침내는 병정(丙丁)172) 의 복철(覆轍)에 빠지게 될 것입니다. 동선령은 비록 높고 깊거나 중첩(重疊)된 막힘은 없더라도 곧 이는 협착 험조하고 높게 경사(傾斜)가 져서 기병(騎兵)·보병(步兵)이 대열(隊列)을 이룰 수가 없으니, 만약 수천의 정졸(精卒)을 그 가운데에 배치하면, 십만의 군사로서도 쓸모가 없을 것이니, 이는 진실로 우리에게 있어서는 반드시 지켜야 할 땅이옵니다. 과연 여기를 능히 지키게 되면, 적(敵)이 감히 전진(前進)하지 못할 것이니, 그 형세는 반드시 극성·정방성 기슭을 향하므로 평강(平崗) 남쪽을 잇따라서 해창포변(海倉浦邊)으로 달려가는 5리(里)가 될 만한 지역의 사방에는 옛사람이 성(城)을 쌓아 수어(守禦)하던 곳이었습니다. 또 황주(黃州)의 동북쪽에서 수십리(數十里)를 가면 길이 두 갈래로 나누어지는데, 잉어연[鯉魚淵]으로부터 자비령(慈悲嶺)을 넘어 서흥(瑞興)에 도달하는 이것이 한 갈래이고, 판적원(板籍院)으로부터 수안(遂安)으로 달려가는 이것이 또 한 갈래입니다. 자비령은 지금도 초목이 우거지고 험난(險難)하여 인마(人馬)가 통행하기 어려우므로, 무리 1려(旅)로써 적(敵)을 지킨다 하여도 또한 넘을 수 없으며, 판적원(板籍院)의 길목은 약간 넓은데다 또 길은 가로 막고 있는 재[嶺]조차 없으니, 반드시 보루(堡壘)를 쌓고 목책(木柵)을 세워서 중요한 곳을 지킨 뒤에야 갑자기 튀어나올 근심이 없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적(敵)이 수십리 산협(山峽)의 무인지경(無人地境)을 다니다가 갑자기 견고한 성(城)을 만나면 그들이 감히 오래도록 머무르지 못하고 반드시 높은 곳을 해 공격할 것입니다. 색장(塞墻)삼등(三登)상원(祥原)의 경계에 있어 두 언덕의 골짝으로 속박되고 바위가 높아 위태한데, 30리(里)는 반드시 석혈(石穴) 속을 다녀야 하니, 지키기는 쉽되 통과하기는 어렵습니다. 한남(寒南)양덕(陽德) 땅의 경계에 있어 매우 위험하니, 약한 병사(兵士) 수백명으로 지키게 하면 비록 등애(鄧艾)가 다시 살아나더라도 또한 쉽게 군대를 거느리고 지나지는 못할 것입니다. 이 밖에는 오직 설한령(薛罕嶺)을 넘어서 함경도(咸鏡道) 지경에 들어가는 길이 있을 뿐입니다. 무릇 이 여섯 갈래의 관애(關隘)에서 동선(洞仙)은 군사의 요충으로 그 험준함을 비록 족히 믿을 만하더라도 지금 당장의 사세(事勢)로는 인력(人力)을 증보하여 거듭 차알(遮遏)하는 형세에 어려움이 있으니, 만약 수목(樹木)을 장양(長養)하여 울연히 우거져 가리도록 하면 병기를 감추고 복병(伏兵)을 설치하여도 모두 믿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 기회에 임하여 베어서 목책(木柵)을 세워 길을 막는 것도 또한 의지하기에 소용이 될 만한 까닭으로, 신이 벌써 황주(黃州)·봉산(鳳山) 두 고을로 하여금 별도로 산직(山直)을 정하여 불을 놓는다든가 별채함을 엄금(嚴禁)하여, 점차 양성(養成)하는 계책을 삼게 하였습니다. 자비령(慈悲嶺)은 형세가 비록 험준하나 길이 심히 빠르므로 역시 꼭 다투어야 할 땅이니, 둔병(屯兵)하고 설책(設柵)하는 것이 판적원(板籍院) 다음은 될 만하며, 색장(塞墻)·한남(寒南)과 같은 곳은 다시 한 덩어리의 돌과 한 웅큼의 흙을 허비함을 기다리지 않아도 견고히 할 수 있는 데입니다. 극성(棘城)에 이르러서는 땅이 평탄하고 막힌 데가 없는 데다 면적이 넓어 비록 지키더라도 반드시 모름지기 담을 높이고 구덩이를 깊이 파서 중험(重險)이 되도록 설치하여 우리에게는 믿을 만한 견고한 데가 되고, 적(敵)에게는 침범하기 어려운 형세가 있도록 한 뒤에야 적이 등 뒤에서 에워싸고 나오는 근심이 없어질 것입니다. 관서(關西)의 길은 심히 복잡하여 구적(寇賊)이 오는 갈래 길이 많은데, 관방(關防)의 중요함은 본도(本道)만 못합니다. 금천(金川)청석곡(靑石谷)은 비록 천험(天險)이라 하더라도 북쪽으로 연하거나 동쪽으로 달려가 토산(兎山)의 경계에 전입(轉入)하면 큰 길과 작은 길이 다 지킬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논(論)하건대, 관(關)을 지키고 적(敵)을 막는 계책을 삼으려면, 동선령 일대만큼 중요한 곳이 없으며, 주위를 방비하는데 드는 병력 또한 극성(棘城)한 길보다 중요한 곳이 없습니다. 신이 또 듣건대, 옛 성의 기지(基址)도 해방(海防)으로부터 극성(棘城)을 경유하여 산 등성이[山背]를 따라 일어나서 북쪽 강변(江邊)에서 그치었다고 하는데, 지금도 치첩(雉堞)이 이따금 아직도 남아있는 것을 토착민이 목격하고는 만리성(萬里城)이라 한다고 합니다. 비록 어느 시대에 창건하였는지를 알지는 못하더라도 옛사람이 국가를 위하는 원대한 심려가 이와 같음이 있습니다."

하니, 임금이 그 소(疏)를 비국(備局)에 내리었다. 그 뒤에 연중(筵中)에서 대신(大臣)이 먼저 사리(事理)를 잘 이해하는 장교(將校)를 보내어 형편(形便)을 살펴보기를 청하니, 임금이 가(可)하다고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6책 7권 43장 A면【국편영인본】 38책 399면
  • 【분류】
    정론-정론(政論) / 군사-관방(關防) / 군사-군정(軍政) / 과학-지학(地學) / 교통-마정(馬政)

  • [註 172]
    병정(丙丁) : 병자년에 시작되어 정축년에 끝났던 호란(胡亂), 즉 병자 호란을 가리킴.

黃海觀察使權脩上疏, 論關防利害, 仍進圖經, 其疏略曰:

臣遍觀道內山城, 則如海州首陽文化九月載寧長壽瑞興大峴, 巖阻險狹, 而僻在山峽, 卽古人所謂山塢避兵之處, 決非固圉禦敵之要害也。 惟正方城右聯洞仙之嶺, 左枕棘城之路, 最據形勝之便者也。 然由關西, 通本道者, 有六條路, 洞仙爲直路, 南有棘城, 北有慈悲嶺板籍院塞墻寒南等關隘, 不爲分屯拒守之計, 而單守正方一城, 則無救於敵兵之橫騖, 而終陷於丙丁之覆轍。 洞仙嶺雖無高深合沓之阻, 直是狹阻峻仄, 騎步不能成列。 若以數千精卒置其中, 十萬之師無所用其衆, 此固在我必守之地。 果能守此, 則敵不敢前進, 其勢必向棘城正方山麓, 迤爲平崗南走, 揷入海倉浦邊, 延袤可五里, 古人築城守禦處也。 又自黃州東北, 行數十里, 路分兩岐, 由鯉魚淵, 踰慈悲嶺, 達于瑞興, 此一岐也; 由板籍院, 趨遂安, 此又一岐也。 慈悲嶺今已榛塞, 犖确險澁, 人馬難行, 有衆一旅以守敵, 亦不可踰。 板籍院路口稍闊, 且無當路橫攔之嶺, 必待築堡立柵, 以守其隘, 然後保無攙出之憂。 然而敵行數十里山峽無人之境, 猝遇堅城, 其不敢久頓而仰攻也決矣。 塞墻三登祥原之界, 兩崖峽束巉巖, 三十里必行石穴中, 易守而難過。 寒南陽德地界, 危險殊絶, 守以羸卒數百, 則雖使鄧艾更生, 亦未易過軍也。 外此則惟有踰薛罕嶺, 入咸鏡地境而已。 凡此六條關隘, 洞仙爲兵衝其險, 雖有足恃, 而卽今事勢, 有難以人功增補, 以重遮遏之勢者。 若使長養樹木, 蔚然叢薈, 則藏兵設伏, 皆有可恃。 臨機斫取, 樹柵拒路, 亦可藉以爲用。 故臣已令兩邑, 別定山直, 嚴禁火伐, 以爲漸次養成之計。 慈悲嶺形勢雖險, 路逕甚捷, 亦是必爭之地。 其所屯兵設柵, 可次於板籍, 而如塞墻寒南, 則不須更費一塊石一撮土, 而可以爲固者也。 至於棘城, 地平無阻, 面闊難守, 必須峻墉深塹, 設爲重險, 使在我爲可恃之固, 於敵有難犯之勢, 然後敵無繞出背後之患矣。 關西路逕甚雜, 賊來多岐, 關防之要, 不如本道, 而金川靑石谷雖曰天險, 迤北趨東, 轉入兔山之界, 則大逕小路, 有不可勝守者。 由此論之, 欲爲守關拒敵之計, 無要洞仙一帶, 而周防費力, 亦莫重於棘城一路也。 臣又聞, 古城基址, 起自海防, 由棘城, 循山脊而北, 止于江邊。 至今雉堞往往猶存, 土人目之爲萬里城。 雖未知創于何代, 古人爲國深遠之慮, 有如是矣。

上下其疏于備局。 其後筵中, 大臣請先遣解事將校, 審視形便, 上可之。


  • 【태백산사고본】 6책 7권 43장 A면【국편영인본】 38책 399면
  • 【분류】
    정론-정론(政論) / 군사-관방(關防) / 군사-군정(軍政) / 과학-지학(地學) / 교통-마정(馬政)