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신과 비변사의 제신을 인견하다
대신(大臣)과 비국(備局)의 제신(諸臣)을 인견(引見)하였다. 형조 참판(刑曹參判) 이하진(李夏鎭)도 또 명하여 입시(入侍)하게 하였다. 권대운(權大運)이 아뢰기를,
"대전(大殿)의 탄일(誕日)을 전후하여 각각 1일 동안 금형(禁刑)한다는 글이 있는 까닭으로 이날에는 형옥(刑獄)의 아문(衙門)에서 모두 폐좌(廢坐)124) 하나, 효묘조(孝廟朝)에는 폐좌는 법문(法文)의 본의(本意)가 아니라 하여, 명하여 개좌(開坐)125) 하게 하였습니다. 하지만 용형(用刑)하지 않았을 따름이니, 청컨대 선조(先朝)의 고사(故事)에 의하여 탄일을 전후하여 각각 1일 동안은 모든 공사(公事)를 봉입(捧入)하되 형옥의 아문에서는 단지 용형(用刑)만 하지 말고 그대로 개좌(開坐)하는 일을 정식(定式)으로 시행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임금이 서북(西北)의 융비(戎備)가 소우(踈虞)하다 하여 어사(御史)를 보내어 군기(軍器)를 점고하려고 하니, 권대운이 아직은 먼저 감사(監司)와 병사(兵使)를 신칙(申飭)하여 수선(修繕)하도록 하고, 뒤를 따라 사신을 보내어 순시(巡視)하기를 청하고, 또 서전(西銓)126) 으로 하여금 변장(邊將)을 뽑아 차송하기를 청하였다. 또 말하기를,
"이전에 수령(守令)으로 하직(下直)하는 자를 성상께서 인견(引見)하심은 그 현부(賢否)를 살펴서 출척(黜陟)한 바가 있었던 까닭으로 전관(銓官)이 삼가서 가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요사이는 오래도록 인견하는 일이 없는 까닭으로 차수(差授)하는 자가 택인(擇人)하지 않음이 허다하니, 청컨대 다시 신칙(申飭)하소서."
하니, 임금이 모두 옳다고 하였다. 예조 판서(禮曹判書) 목내선(睦來善)이 북로(北路)의 봉수(烽燧)가 허소(虛踈)함을 진달하니, 임금이 명하여 해도(該道)의 감사(監司)가 수시로 순시(巡視)하고, 또 불시(不時)로 군관(軍官)을 보내어 적간(摘奸)하게 하라고 하였다. 이하진(李夏鎭)이 또 말하기를,
"신(臣)이 연경(燕京)에 있으면서 저들을 보니 사세(事勢)가 항상 경급(警急)한 근심이 있어 생각이 다른 일에 미칠 겨를이 없었습니다. 전두(前頭)의 사행(使行)이 비록 변무(辨誣)를 청하였더라도 반드시 허락을 얻을 리가 없었고 한갓 미비(靡費)127) 가 될 따름이었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무함(誣陷)을 받고 변명하지 못하고서 어찌 미비(靡費)라 하여 마침내 그만둘 수가 있겠느냐?"
하였다. 권대운이 말하기를,
"신(臣) 등의 뜻도 또한 미비(靡費)로써 근심하지 않고 그 이룰 수 없음을 근심하였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미 시작한 뒤에는 정지할 수 없는 것이다."
하였다. 임금이 흉년이라 하여, 명하여 제도(諸道)의 방물 진상(方物進上)을 정지시켰으니, 권대운(權大運)의 소청을 따랐던 것이었다. 제도(諸道)에 하유(下諭)하기를,
"재상 경차관(災傷敬差官)과 도사(都事)의 재상 사목(災傷事目) 중 급재(給災)하게 된 고을 외에, 만일 재상을 입음이 더욱 심하였는데도 급제를 주지 않은 자가 있으면 소견을 따라 헤아려 8,9분재(分災)를 주도록 하라."
하였으니, 목내선의 말을 따른 것이었다.
- 【태백산사고본】 6책 7권 28장 A면【국편영인본】 38책 392면
- 【분류】왕실-국왕(國王) / 사법-재판(裁判) / 행정-중앙행정(中央行政) / 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 / 군사-군정(軍政) / 군사-통신(通信) / 외교-야(野) / 재정-국용(國用) / 재정-진상(進上) / 과학-천기(天氣) / 구휼(救恤)
- [註 124]폐좌(廢坐) : 관청 사무를 폐하는 것.
- [註 125]
○引見大臣及備局諸臣。 刑曹參判李夏鎭亦命入侍。 權大運曰: "大殿誕日, 前後各一日, 有禁刑之文, 故刑獄衙門, 於是日皆廢坐。 孝廟朝以廢坐, 非法文本意, 命開坐, 但不用刑而已。 請依先朝故事, 誕日前後各一日, 凡公事捧入, 刑獄衙門只不用刑, 仍爲開坐事, 定式施行。" 上從之。 上以西北戎備踈虞, 欲送御史點軍器, 大運請姑先申飭監、兵使, 使之修繕, 隨後遣使巡視。 又請令西銓, 擇差邊將, 又曰: "在前守令下直者, 自上引見, 察其賢否, 有所黜陟。 故銓官不得不謹擇, 近日久無引見事, 故差授者多不擇人, 請更加申飭。" 上竝是之。 禮曹判書睦來善陳北路烽燧之虛踈, 上命該道監司, 時時巡視, 又不時發遣軍官摘奸。 夏鎭又言: "臣在燕見彼中事勢, 常有警急之憂, 未暇念及他事。 前頭使行, 雖請辨誣, 必無得許之理, 徒爲靡費而已。" 上曰: "受誣未辨, 何可以靡費而遂已也?" 大運曰: "臣等之意, 亦非以靡費爲慮, 憂其不得成也。" 上曰: "旣如之後, 不可停止也。" 上以年凶, 命停諸道方物進上, 從大運之請也。 下諭於諸道, 災傷敬差官及都事災傷事目中, 給災邑外, 如有被災尤甚而不與給災者, 使之從所見, 量給八九分災, 從來善言也。
- 【태백산사고본】 6책 7권 28장 A면【국편영인본】 38책 392면
- 【분류】왕실-국왕(國王) / 사법-재판(裁判) / 행정-중앙행정(中央行政) / 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 / 군사-군정(軍政) / 군사-통신(通信) / 외교-야(野) / 재정-국용(國用) / 재정-진상(進上) / 과학-천기(天氣) / 구휼(救恤)
- [註 1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