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위 겸 진향사 이하진·정박 등이 청에서 돌아와 오삼계 사건 등을 아뢰다
진위 겸 진향사(陳慰兼進香使) 이하진(李夏鎭)·정박(鄭樸) 등이 청(淸)으로부터 돌아왔다. 이하진(李夏鎭) 등이 5월에 연경(燕京)에 도착했는데, 그 나라의 풍속이 6월절(六月節) 내에는 제사를 행하지 않는다 하여 진향(進香)을 허락하지 않아서 7월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제사를 행하였으며, 또 객관(客館)에 머물기를 1순(旬)을 하고 비로소 떠나기를 허락하였으니, 대개 남방(南方)의 패보(敗報)가 서로 잇달아 이르러서 공격과 방어를 의논하는 중이었으므로 나머지 일은 겨를을 내지 못하였다고 하였다. 서장관(書狀官) 안여석(安如石)이 문견 사건(聞見事件)을 올렸는데, 대략,
"오삼계(吳三桂)가 경정충(耿精忠)·정금(鄭錦)과 더불어 연결(連結)하여 서로 침략하여 전후(前後)로 해서 7성(城)을 함락하고, 장천(漳泉)이 포위를 당하여 청장(淸將) 의만(宜滿)이 수전(水戰)에서 대패(大敗)하였고, 부도통(副都統) 납색파니(拉色巴你) 등도 또 악주(岳州)에서 대패하여 사로잡혔습니다. 광서 순무(廣西巡撫) 마웅진(馬雄鎭)은 싸움에 패하여 스스로 목을 매었고, 광동 총병(廣東摠兵) 조택청(祖澤淸)이 모반(謀叛)하여 오삼계와 합하여 여러 성(城)을 침공하여 함몰하였습니다. 복건 대장(福建大將) 해징공(海澄公) 황방세(黃芳世)는 본디 웅용(雄勇)하여 전공(戰功)이 많았으나, 병(病)으로 죽으니, 이로부터 청병(淸兵)이 패함은 있고 승리는 없었습니다. 오삼계는 제(帝)라 칭하여 국호(國號)를 ‘대주(大周)’라 하고, ‘소무(紹武)’라고 개원(改元)하였으며, 그 손자 오세림(吳世霖)을 세워 황태손(皇太孫)으로 삼았습니다. 청주(淸主)는 황음무도(荒淫無度)하여 정사를 그의 신하 색액도(索額圖)에게 위임하였으며, 전쟁이 일어난 뒤로는 부역(賦役)이 번다하고 중하여 백성이 명(命)을 감내하지 못하여 국내(國內)가 소연(騷然)합니다."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6책 7권 27장 B면【국편영인본】 38책 391면
- 【분류】외교-야(野)
○戊子/陳慰兼進香使李夏鎭、鄭樸等回自淸。 夏鎭等以五月抵燕, 其國俗六月節內不祭, 不許進香, 至七月始行祭, 又留館一旬, 始許離發。 蓋以南方敗報相繼, 方議攻禦, 不遑餘事云。 書狀官安如石進聞見事件, 略言: "吳三桂與耿精忠、鄭錦連結, 侵軼前後, 七城見陷。 漳泉被圍, 淸將宜滿水戰大敗; 副都統拉色巴你等, 又大敗於岳州被禽; 廣西巡撫馬雄鎭戰敗自縊; 廣東摠兵祖澤淸叛, 與三桂合, 侵陷諸城; 福建大將海澄公、黃芳世, 素雄勇多戰功, 以病死。 自是淸兵有敗無勝, 三桂稱帝, 國號大周, 改元紹武, 立其孫世霖爲皇太孫。 淸主荒淫無度, 委政於其臣索額圖。 兵興以後, 賦役煩重, 民不堪命, 國內騷然云。"
- 【태백산사고본】 6책 7권 27장 B면【국편영인본】 38책 391면
- 【분류】외교-야(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