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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종실록7권, 숙종 4년 윤3월 8일 무신 1번째기사 1678년 청 강희(康熙) 17년

시정·예론에 관한 교리 최석정의 상소문. 그의 관직을 삭탈하다

교리(校理) 최석정(崔錫鼎)이 상소(上疏)하기를,

"전하께서는 청명(淸明)함이 몸에 있으시고 기질(氣質)이 순수(純粹)하신데, 한 번 생각하는 사이에 편파적인 누(累)를 면치 못하는 것은 먼저 들은 말로 주장하기 때문입니다. 먼저 들은 말은 점점 스며든 지가 오래이니, 구신(舊臣)은 다 당사(黨私)라고 여겨서 의심하고, 신인(新人)은 다 충정(忠正)하다고 생각하여 신임합니다. 그러니 의심하는 자는 꺾고 부러뜨리며 꾸짖어도 부족해 하고, 신임하는 자는 높여 키워서 권장하고 발탁하여 주는 데 겨를이 없이 합니다. 근일의 일로써 이를 말하면, 정유악(鄭維岳)이 전일에 근습(近習)을 말하였다가 성상의 뜻에 거슬렸지만 다시 대언(代言)에 둔 것은 실로 성덕(聖德)을 빛내는 것이었는데, 대장(臺章)043) 이 갑자기 일어나서 체직(遞職)시키고야 말았으며, 조희맹(趙希孟)의 일은 자질구레한 일이라고 핑계하여 그에 대한 논핵을 정지하니, 예로부터 임금이 근습(近習)을 비호하는 일은 혹 있었지마는 어찌 근습을 비호(庇護)하는 대관(臺官)이 있었겠습니까? 그리고 김수흥(金壽興)은 견책을 받은 지가 오래이며 사명(赦命)으로 인하여 다시 서용하게 된 것은 실로 성상(聖上)의 지극한 뜻에서 나왔는데, 양사(兩司)에서 함께 일어나 급급하게 반대 논집(論執)합니다. 지난날을 조가(朝家)에서 수령(守令)이 함부로 가속(家屬)을 거느리고 가는 법(法)을 신명(申明)하였으나, 그 자수(自首)함으로 인하여 갑자기 파하지 말도록 하였습니다. 그러니 안렴(按廉)하는 관리는 사면(事面)을 더욱 분별해야 하는데 조정이 알면서도 묻지 않아서 끝내는 범법(犯法)한 신하로 하여금 편안히 자처하게 하고, 법을 모독(冒瀆)하고 기강(紀綱)을 범한 무리는 장차 이로부터 날로 방자해져서 처음부터 신명하지 않은 것만 못하게 되었습니다. 전하께서는 임어(臨御)하신 지 얼마 아니되어 대신(大臣)을 유배하여 경솔히 형극(荊棘)의 길을 열었습니다. 수년 사이에 일을 말하는 신하는 연달아 파출(罷黜)되었으며, 위포(韋布) 입은 가난한 선비를 계속 견벌(譴罰)하였으니, 인심이 어찌 흩어지지 않을 수 있으며, 선비의 기상(氣象)이 어찌 울억(鬱抑)하지 않겠습니까? 오늘날의 논자(論者)들은 송시열(宋時烈)이 군부(軍父)를 폄박(貶薄)하였다고 죄안(罪案)을 만들고, 김수항(金壽恒)이 골육(骨肉)을 이간(離間)하였다고 죄안을 만들고 있습니다마는, 대저 군신(君臣)의 대의(大義)는 천지(天地)의 강상(綱常)이니, 신하로써 임금을 폄척(貶斥)함이 과연 인정에 가까운 것이겠습니까? 더구나 효묘(孝廟)에게 비상한 은우(恩遇)를 입은 송시열과 같은 임하(林下)의 한 한사(寒士)야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 대현(大賢)을 대우하는 예의(禮義)로 대우하면 군신(君臣)의 정(情)이 부자(父子)와 같아 그 은혜에 보답하려는 정성이 반드시 보통 사람보다 만배(萬倍)를 더할 것인데 이들에게 죄목(罪目)을 더하였으니, 천하의 지극한 원한이 되지 않겠습니까? 김수항은 바로 선조(先祖)의 고명(顧命)을 받은 신하입니다. 봉장(封章)을 올려 논주(論奏)하니, 언사(言辭)가 개절(剴切)하고 여러 신료의 잘못된 일의 허물을 깊이 진술하였습니다. 윤휴(尹鑴)의 패리(悖理)한 말을 통렬히 배척하니, 국가를 근심하고 인군을 사랑하는 적심(赤心)이 교연(皦然)한데 편안하게 궁구하도록 내려주지 않으시고, 갑자기 차마 듣지 못할 교시를 내리었으며, 좌우(左右)의 신하들은 법망(法網)으로 종용(慫慂)하였습니다. 외로운 충성이 드러나지 않고 죄망(罪網)을 함부로 더하여 폭염이 내리 쬐는 벽촌에 한번 떨어져 여러해 한서(寒暑)를 겪었는데, 천애(天涯)에서 임금을 연모(戀慕)하며 외로운 그림자는 가련함을 감내(堪耐)하니, 전하의 민망히 여겨 덮어주시는 사랑으로 어찌 불쌍히 생각하시는 실마리가 없겠습니까? 송시열은 안치(安置)당한 지가 이미 4년이 되었습니다. 바다의 장독(瘴毒)과 천극(栫棘)으로 질병에 걸려 백수(白首)의 여생은 남은 날이 얼마 없는데, 하루아침에 갑자기 성명(聖明)으로 하여금 어진 선비를 죽였다는 이름이 있게 될까 깊이 두려우니, 오직 전하께서는 거의 죽게 된 지경에 이른 천식(喘息)에 슬픈 마음을 일으키시어, 다시 천일(天日)을 보고 고향에 돌아가 죽게 하여서 효묘(孝廟) 당일(當日)의 마음을 몸받으소서. 그리고 김수항을 은유(恩宥)하신 뜻은 실로 덮어서 감싸 기른 어지심에서 나왔는데, 전하께서 덕을 지키심이 굳지 못하여 갑자기 환수(還收)하라는 청을 윤허하시어 좌우로 하여금 그 오르내리는 마음을 엿보게 하시었으니 어찌 애석하지 않겠습니까?"

하니, 답하기를,

"인주(人主)의 지나친 거동과 시정(時政)의 시비(是非)를 숨김없이 다 진달함은 바로 맡은 바 직분이나, 이미 바르게 한 예론(禮論)을 다시 제기함은 온당하지 못하다."

하였다. 이때 양사(兩司)와 옥당(玉堂)이 일제히 일어나 최석정(崔錫鼎)을 원찬(遠竄)하기를 청하였으나, 임금이 윤허(允許)하지 않았다. 열여섯 차례나 아뢰어서야 비로서 명하여 삭탈 관작(削奪官爵)하고 문외 출송(門外黜送)하였으니, 대신(大臣)의 말을 따른 것이었다.


  • 【태백산사고본】 6책 7권 9장 A면【국편영인본】 38책 382면
  • 【분류】
    정론-정론(政論) / 왕실-국왕(國王) / 사법-행형(行刑) / 사법-탄핵(彈劾) / 인사-임면(任免) / 인사-관리(管理) / 인물(人物)

  • [註 043]
    대장(臺章) : 대간(臺諫)의 탄핵 상소.

○戊申/校理崔錫鼎上疏曰:

殿下淸明在躬, 氣質純粹, 而一念之間, 未免有偏係之累者, 以先入之言爲主也。 先入之言漸漬日久, 舊臣則盡以爲黨私而疑之; 新人則盡以爲忠正而信之。 疑之者摧折譴何之不足; 信之者崇長奬拔之不暇。 以近日事言之, 鄭維岳前日以言近習而忤旨, 復置代言, 實光聖德, 而臺章遽發, 必遞乃已, 趙希孟之事, 則諉以細故而停其論, 自古人君之庇護近習者或有之, 安有庇護近習之臺官乎? 金壽興被譴已久, 因赦命敍, 實出於聖上至意, 而兩司俱發, 汲汲論執。 頃日朝家申明守令濫率之法, 而因其自首, 輒令勿罷。 按廉之官, 事面尤別, 而朝廷知而不問, 終使犯科之臣, 晏然自處, 冒法干紀之徒, 將自此而日肆, 不如初不申明之爲愈也。 殿下臨御未幾, 竄逐大臣, 輕開荊棘之路。 數年之間, 言事之臣罷黜聯翩; 韋布之士譴罰相續, 人心安得不渙散, 士氣安得不鬱抑乎? 今之論者, 以貶薄君父爲宋時烈之罪案; 以離間骨肉爲金壽恒之罪案。 夫君臣大義, 天地之綱常也。 臣而貶君, 果近於人情乎? 況如時烈, 林下之一寒士, 蒙孝廟不世之遇, 待之以待大賢之禮義, 則君臣情猶父子, 其欲報效之誠, 必萬倍恒人。 而加以此等罪目, 不爲天下之至冤乎? 金壽恒乃先朝顧命之臣也。 上封論奏, 言辭剴切, 深陳諸臣誤事之咎, 痛斥尹鑴悖理之言, 憂國愛君, 赤心皦然。 而不賜舒究, 遽下不忍聞之敎, 左右之臣慫慂羅織, 孤忠未暴, 罪網橫加。 一落炎陬, 屢經寒暑, 天涯戀闕, 隻影堪憐。 以殿下閔覆之慈, 豈無矜念之端乎? 時烈之安置, 今已四年, 瘴海栫棘, 疾病沈嬰, 白首殘齡, 餘日無幾。 深恐一朝溘然, 使聖明有殺賢士名。 惟殿下興哀於垂死之喘, 俾得復見天日, 歸死故里, 以體孝廟當日之心焉。 壽恒恩宥之旨, 實出覆燾之仁, 而執德不固, 遽允還收之請, 使左右窺其俯仰, 豈不惜哉!

答曰: "人主過擧、時政是非, 盡陳無隱, 乃其職也。 已正之禮論, 更爲提起, 則未穩也。" 於是, 兩司、玉堂齊起, 請遠竄錫鼎, 上不允。 至十六啓, 始命削奪官爵, 門外黜送, 從大臣言也。


  • 【태백산사고본】 6책 7권 9장 A면【국편영인본】 38책 382면
  • 【분류】
    정론-정론(政論) / 왕실-국왕(國王) / 사법-행형(行刑) / 사법-탄핵(彈劾) / 인사-임면(任免) / 인사-관리(管理) / 인물(人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