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관의 처벌에 대해 논의하다
주강(晝講)에 나아갔다. 참찬관(參贊官) 김덕원(金德遠)이 말하기를,
"시관(試官)이 의미없는 설(說)을 인용해 집어내서 제목으로 삼아 선비들을 시험하였으니, 성상(聖上)께서 엄하게 물으신다면 정위(情僞)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우상(右相)의 차사(箚辭)가 구구절절이 엄준하니, 이 시관들을 어떻게 처리해야 하겠습니까?"
하니, 지사(知事) 김석주(金錫胄)가 말하기를,
"과장(科場)에서 간사한 짓을 한 것이 이제 또 드러났는데, 이는 윤이익(尹以益)에 비교해 보아도 더욱 간교하므로 중벌(重罰)에 따라 처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차비관(差備官)이 하인(下人)을 거느리는 것을 전에 이미 엄하게 경계하였는데, 이번에 사동관(査同官)이 이에 감히 방자하게도 거느렸습니다. 간사한 유생(儒生)과 약속한 사람이 이와 같이 함께 농간하는 일을 하였으니, 붙잡아다가 심문하여 죄를 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자, 그대로 따랐다. 임금이 대간(臺諫)에게 입시(入侍)하도록 명하니, 정언(正言) 이명은(李命殷)이 들어와서 아뢰기를,
"《좌전(左傳)》에 기록된 바는 오로지 장자(長子)를 버리고 차자(次子)를 세운 것을 가지고 비유하였을 뿐인데, 이번에 이를 시관(試官)이 집어내어서 제목으로 삼아 은근히 비난을 가한 것입니다. 여러 유생들이 의(義)에 의거하여 짓지 않게 된 후에는 도리어 ‘반복해서 참조하여 생각해 보아도 끝내 그 말을 알 수 없다.’는 말을 하였으니, 그 방자함이 얼마나 심합니까? 이 시관을 써서 그대로 시험을 맡게 하기는 결단코 어려우며, 그 범한 죄를 찾는 것 역시 문비(問備)하여서는 죄상을 규명할 수 없으니, 청컨대, 일체 잡아다가 심문하도록 하소서."
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임금이 좌의정(左議政) 권대운(權大運)·대사헌(大司憲) 윤휴(尹鑴)를 불러 입시(入侍)하도록 명(命)하였다. 임금이 권대운에게 묻기를,
"대론(臺論)이 거듭 일어나고 있으니, 여러 시관을 어떻게 처리해야 하겠는가?"
하니, 권대운이 말하기를,
"시관이 감히 시험 제목에 있어서 은근히 비난하는 의도가 있었으므로 신은 청대(請對)하여 논죄(論罪)하고자 했으나, 다만 시관을 논죄한 후에는 그 형세가 파장(罷場)하기에 이르게 되고, 크게 경사스러운 과거를 재차 파하게 되면 사체(事體)가 매우 어렵게 되기 때문에 방(榜)을 내걸기를 기다리고자 하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또 민주도(閔周道)의 일이 있어 그 간교함이 무상(無狀)함은 이전에 들어보지 못한 바이니, 이러한데도 파(罷)하지 않는다면 일이 미봉책에 불과하게 될 것입니다. 더구나 대계(臺啓)가 이미 나왔으니, 파장(罷場) 외에는 달리 다른 계책이 없습니다. 그러나, 무과(武科)와 생진과(生進科)는 신도 그 처리할 방도를 생각지 못하였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또 윤휴(尹鑴)에게 물으니, 윤휴가 일체의 방(榜)을 모두 파하고 정시(庭試)를 실시하는 것이 좋겠다고 대답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오늘 일의 형세로 보아 파장(罷場)하지 않을 수는 없다. 여러 시관(試官)은 모두 붙잡아다가 심문하여 죄를 정하고, 감시관(監試官)은 파직시킨 후에 붙잡아다가 심문하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마침내 시관(試官) 이정영(李正英)·이홍연(李弘淵)·윤심(尹深)·목천성(睦天成)·김총(金璁)·이화진(李華鎭)·박태보(朴泰輔)·유정휘(柳挺輝)·신학(申㶅)을 의금부(義禁府)에 회부하고, 또 생진과(生進科)·무과(武科)를 파할지 그대로 둘지의 여부를 여러 대신에게 문의(問議)하도록 명하였다. 임금이 윤휴를 위유(慰諭)하여 연석(筵席)에 출입하도록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5책 6권 54장 A면【국편영인본】 38책 370면
- 【분류】왕실-경연(經筵) / 인사-선발(選拔) / 사법-행형(行刑)
○癸丑/御晝講。 參贊官金德遠曰: "試官引無義之說, 而拈出爲題以試士, 自上嚴問, 則可知情僞矣。 右相箚辭, 節節嚴峻, 此試官何以處之乎?" 知事金錫冑曰: "科場用奸, 今又發露。 此則比之尹以益, 尤爲奸巧, 不可不從重處分。 差備官所率下人, 前已嚴飭, 而今此査同官, 乃敢肆然帶率, 奸細儒生所約之人, 有此通同弄奸之事, 不可不拿問定罪。" 從之。 上命臺諫入侍。 正言李命殷入啓曰: "《左傳》所記, 專以捨長立次爲喩, 而今此試官, 拈出爲題, 隱加譏貶。 及諸生據義不製之後, 乃反以反覆參究, 終不得其說爲辭, 何其肆然之甚也? 決難以此試官, 仍令掌試, 而原其罪犯, 亦不可以問備而究覈。 請一倂拿問。" 不從。 上命招左議政權大運、大司憲尹鑴入侍。 上問大運曰: "臺論重發, 諸試官何以處之?" 大運曰: "試官敢於試題, 隱然有譏貶之意, 臣欲請對論罪。 而第論罪試官之後, 則其勢自至罷場, 再罷大慶之科, 事體重難, 故欲遲待其出榜矣。 今又有閔周道之事, 奸巧無狀, 前所未聞。 此而不罷, 事涉苟簡。 況臺啓已發, 則罷場之外, 更無他策。 而武科及生進, 臣亦未思其處之之道也。" 上又問鑴, 鑴以盡罷一榜, 而設庭試爲便對之。 上曰: "今日事勢, 不得不罷場。 諸試官竝拿問定罪, 監試官則罷職後拿問可也。" 遂下試官李正英、李弘淵、尹深、睦天成、金璁、李華鎭、朴泰輔、柳挺輝、申㶅于禁府。 又以生進、武科罷存與否, 命問議于諸大臣。 上慰諭鑴, 使之出入筵席。
- 【태백산사고본】 5책 6권 54장 A면【국편영인본】 38책 370면
- 【분류】왕실-경연(經筵) / 인사-선발(選拔) / 사법-행형(行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