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사 이정·권대재·박순 등이 연경에서 돌아와 오삼계 사건 등을 아뢰다
진주사(陳奏使) 복창군(福昌君) 이정(李楨)·권대재(權大載)·박순(朴純) 등이 연경(燕京)에서 돌아오니, 인견(引見)하도록 명하였다. 이정(李楨)이 말하기를,
"오삼계(吳三桂)158) 는 현재 장사부(長沙府)에 있고, 청장(淸將)과 두 친왕(親王), 두 군왕(郡王)이 많은 군사를 거느리고 요주(饒州)·형주(荊州) 등지를 막고서 지키고 있는데, 저쪽과 이쪽이 서로 버티면서 상호간에 이겼다 졌다 합니다. 북경(北京)은 백성들이 편안히 지내면서 조금도 소요가 없었으나, 다만 임금을 보좌하는 신하의 제본(題本)159) 을 보니 나라의 저축이 다 고갈될까 걱정하고 있었습니다. 또한 듣건대, 청(淸)나라 사람들이 모두 남쪽 정벌에 나갔기 때문에 숙위(宿衛)하는 것은 태반이 한(漢)나라 사람들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로써 나라 안이 텅 비어 있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하고, 권대재(權大載)가 말하기를,
"그 정령(政令)을 들어보니, 행동거지가 무리지어 모여 있는 무뢰한 도적과 같았습니다. 황제(皇帝)는 하배(蝦輩)160) 를 데리고 항상 태액지(太液池)에서 함께 목욕하고 수영하는 것을 즐거움으로 삼고 있다 합니다. 또 주색에 빠져 즐기고 유람하며 출입하는 데 절도가 없고, 그 의복의 색깔을 하배(蝦輩)와 같게 하고서 아울러 함께 말을 타고 내달리므로 사람들은 누가 황제인지 모른다고 합니다. 그 법도 없음이 이와 같은데도 아래에서는 간(諫)하는 자가 없어, 정권을 잡고 있는 대신(大臣)으로부터 그 아래로 탐욕한 것이 풍조를 이루고 뇌물이 공공연히 행해지고 있었습니다. 황제는 청(淸)나라 글만 알 뿐 문자(文字)를 해독하지 못했기 때문에 문서(文書)에 관계된 모든 것은 소홀히 여겨, 무슨 일인지 살피지도 않고서 일체 해당 부서의 저앙(低昂)161) 에 맡긴다고 합니다. 이런데 어떻게 오랫동안 천하(天下)를 소유할 수 있겠습니까? 남방(南方)의 사정은 비록 상세히 알 수 없으나, 국내의 형세는 오래 가지 못할 듯합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경(卿)들이 맡은 일을 잘 미봉(彌縫)했으니, 다행스럽다."
하니, 권대재가 말하기를,
"지도(地圖)의 일은 저쪽 사람들이 긴요한 것이라고 여기지 않았으나, 각로(閣老)162) 명주(明珠)163) 가 당초에 조사하여 묻고서 또한 옳지 않다고 하였는데, 예부 시랑(禮部侍郞)으로 배씨(拜氏) 성(姓)을 가진 자가 우리 나라 일에 생경(生梗)하여 처음에 벌금을 매기려 하였으나 다행히 무사할 수 있었습니다. 오정위(吳挺緯) 이하 세 명의 사신(使臣)은 단지 관직을 혁파하도록 하고, 지도를 가지고 간 사람인 신행건(愼行健)은 변방 지역에 충군(充軍)하도록 논하였습니다. 사책(史冊)의 일에 대해서는 크게 지난(持難)한 바가 있기 때문에 역관(譯官)의 무리로 하여금 여러 방면으로 주선하게 하였으나, 도리어 벌금을 매기자는 의논이 있었고, 그 논하고 아뢰는 행동거지와 말이 또한 매우 놀라운 것들이 많았으나, 황제께서 특별히 감해 주었으며, 사신(使臣) 이하 금법(禁法)을 범한 자는 모두 사유(赦宥) 전의 일이라 하여 논하지 않았습니다."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5책 6권 49장 B면【국편영인본】 38책 367면
- 【분류】외교-명(明) / 외교-야(野) / 군사-전쟁(戰爭) / 과학-지학(地學)
- [註 158]오삼계(吳三桂) : 청(淸)나라 요동(遼東)사람. 《청사(淸史)》 열전(列傳) 80권에 보면 다음과 같다. 명(明)나라 때 총병(總兵)까지 올라가 평서백(平西伯)에 봉해졌다. 이자성(李自成)이 서울을 함락시키자 청(淸)나라 군대를 이끌고 그를 격파한 공으로 평서왕(平西王)에 봉해졌다. 성조(聖祖)가 국경을 방치하였다고 책망하자 마침내 모반하였고, 인하여 주제(周帝)라 칭하고서 백관(百官)을 두었다. 그가 죽은 후 손자 오세번(吳世璠)이 청나라에게 멸망되었음.
- [註 159]
제본(題本) : 청(淸)나라 제도에, 성례(成例)에 비추어 일을 행할 수 있는 경우 서울 이외 성(省)의 각 관청(官廳)의 장관(長官)이 황제(皇帝)에게 아뢰는 사서(伺書).- [註 160]
하배(蝦輩) : 하는 청나라의 관명(官名).- [註 161]
저앙(低昂) : 고저(高低)를 정하는 일.- [註 162]
각로(閣老) : 당(唐)나라 때부터 명(明)나라 때까지 재상(宰相)으로 일컫던 명칭.- [註 163]
명주(明珠) : 청(淸) 성조(聖祖) 때의 명신(名臣). 형부(刑部)·병부(兵部)의 상서(尙書)를 지내고, 《청회전(淸會典)》·《일통지(一統志)》·《명사(明使)》 등의 편찬을 맡아서 통괄하였음.○陳奏使福昌君 楨、權大載、朴純等自燕還, 命引見。 楨曰: "吳三桂方在長沙府, 淸將兩親王、兩郡王率大兵, 拒守饒州、荊州等地, 彼此相持, 互相勝負。 北京則人民按堵, 小無騷屑, 而但得見王輔臣題本, 輒以國儲匱竭爲慮。 且聞淸人皆赴南征, 故宿衛太半漢人云, 此可知國內虛耗也。" 大載曰: "聞其政令、擧措, 有同屯聚無賴之盜。 皇帝率蝦輩, 常同浴于太液池, 游泳爲戲。 且耽樂遊觀, 出入無節, 與蝦同其服色, 而竝騎馳逐, 人不知何者爲皇帝, 其無度如此, 而下未有諫之者。 自執政大臣以下, 貪黷成風, 賄賂公行, 皇帝只知淸書, 不解文字, 故凡干文書, 漫不省何事, 一任該部之低昻云, 是安能久有天下乎? 南方事情, 雖未能詳知, 而國內形勢, 似不得長久矣。" 上曰: "卿等所榦事善爲彌縫, 是可幸也。" 大載曰: "地圖事, 彼人不以爲關緊。 閣老明珠則當初, 査問亦以爲不可, 而禮部侍郞拜姓者, 於我國事, 輒爲生梗, 初欲罰金, 而幸得無事。 吳挺緯以下三使臣, 只令革職, 地圖持去者愼行健, 則論以邊地充軍。 至於史冊事, 大有所持難, 故使譯官輩, 多方周旋, 而猶有罰金之議, 其論奏措語, 亦多痛駭者。 皇帝特減罰金, 而使臣以下犯禁者, 皆以赦前事勿論矣。"
- 【태백산사고본】 5책 6권 49장 B면【국편영인본】 38책 367면
- 【분류】외교-명(明) / 외교-야(野) / 군사-전쟁(戰爭) / 과학-지학(地學)
- [註 15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