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패법을 시행하다
호패법(號牌法)을 시행했다. 이에 앞서 영의정 허적이 아뢰기를,
"지패(紙牌)는 구애되는 일이 있으니, 곧 사대부(士大夫)가 상한(常漢)의 통수하에 들어가게 되어, 사세가 매우 불편합니다. 지패의 첫째 줄에 ‘아무 방(坊) 아무 통수(統首) 아무’라고 쓰게 되는데 이 통수는 곧 상한입니다. 그 다음에 ‘제 몇 호(戶) 아무 재상(宰相) 또는 아무 경사(卿士)’라 쓰고서 모두 이름을 쓰며, 한성부(漢城府) 관원이 착압(着押)하여 내주니, 사대부들이 보고서 해괴하게 여기지 않는 사람이 없습니다. 일이 역시 체통(體統)에 관계가 있는 것이니, 신(臣)의 생각에는 위로 공경(公卿)과 관직이 있는 사람으로부터 아래로 생원(生員)·진사(進士)에 이르기까지 지패 대신 호패를 차는 것이 좋겠다고 여깁니다."
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서울 안은 이날부터 시행하기 시작했고, 외방(外方)은 5월 초하루에 시행하게 했었다. 이조 판서 목내선(睦來善)이 일찍이 등대(登對)하여 민간이 소란스러워짐을 들어 정지하기를 청하니, 허적 등이,
"이 일이 끝내 서민(庶民)에게 미치지 않는다면 떠도는 말들이 저절로 없어지게 될 것이므로 변경하여 고칠 것이 없습니다."
하매, 홍우원(洪宇遠)·윤휴(尹鑴) 등이 또한 상소하여, 불가함을 말했었다. 상참(常參)이 있던 날 임금이 대신들에게 이르기를,
"아직은 지패(紙牌)의 효과를 보다가 천천히 시행하고 싶다."
하매, 허적이, 널리 2품(品) 이상에게 물어보기를 청했는데, 하는 말이 같지 않으므로 허적이 다시 물러가 상확(商確)하기를 청했었다. 그 뒤 등대할 때에 허적이 아뢰기를,
"모든 재상들의 의논 중에 오직 김석주(金錫胄)만이 혁파해야 한다고 여겼고 나머지는 모두들 마땅히 시행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하고, 광성 부원군(光城府院君) 김만기(金萬基)가 또한 아뢰기를,
"이번의 원망과 비방은 사천(私賤)과 서리(書吏)들에게서 나온 것입니다. 국가가 시행하는 법을 어찌 이 무리들로 인해 흔들리게 하겠습니까?"
하였다. 이는 옳은 말이었다. 대개 서리는 본래는 양인(良人)들에게 시켰는데 근래에는 사천들도 또한 많이 하고 있었다.
일단 호패를 차면 구별이 분명해지게 되기 때문에, 혹시 앞으로 저희들 무리에게도 또한 차게 할까 싶으므로, 미리 격동시키는 말을 하여 저지하려고 한 것이었다. 지패를 시행할 적에도 원망한 사람들은 또한 이 무리와 시정(市井) 사람들이었는데, 이번에 이르러서 더욱 심하게 된 것은 호패가 지패에 비해 더욱 표가 나기 때문이었다. 권대운(權大運)이 아뢰기를,
"호패와 대군적(大軍籍)은 이전에 아울러 시행했었기 때문에, 혹시 대군적을 하게 되는 것인가 싶어 이 때문에 소란해진 것이므로 오래지 않아 마땅히 스스로 안정될 것입니다. 다만 잡직(雜職)들이 차는 것은 조사(朝士)들의 것과 다르기 때문에 구별나는 것을 싫어한다고 했습니다."
하고, 유혁연(柳赫然)이 아뢰기를,
"잡직들도 장복(章服)이 조사들의 것과 같은데, 어찌 유독 호패가 상아(象牙)인가 뿔인가에 있어서만 다툴 것이 있겠습니까?"
하였다. 이는 옳은 말이었다. 이에 절목(節目)을 고쳐 단지 관직이 있는 사람만 차게 했는데, 잡직의 무리들이 차는 것도 조사들의 것과 같게 하도록 명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5책 6권 16장 A면【국편영인본】 38책 351면
- 【분류】호구-호적(戶籍) / 신분(身分) / 군사-군역(軍役)
○朔丁丑/行號牌法。 先是, 領議政許積言: "紙牌有拘礙之事, 士夫入於常漢統下, 事甚不便。 紙牌第一行, 書某坊、某統首, 某卽常漢也。 而其下書第幾戶, 某宰相、卿士, 皆書其名, 漢城府官着押以給, 士夫見之者, 無不爲駭, 事亦關係體統。 臣意上自公卿有職人, 下至生進, 佩號牌以代紙牌可矣。" 上允之。 京中自是日始行, 外方則以五月初一日行之。 吏曹判書睦來善嘗登對, 以民間騷擾, 請停之, 積等以爲: "此事終不及於庶民, 則浮言自當止息, 不可撓改。" 洪宇遠、尹鑴等亦上疏言其不可。 常參日上諭大臣, 欲姑觀紙牌效驗徐行之, 積請廣詢二品以上, 所言不同, 積更請退而商確。 其後登對, 積曰: "諸宰之議, 唯金錫冑以爲可罷, 餘皆以爲當行矣。 光城府院君 金萬基亦言: ‘今此怨詛, 出於私賤、書吏。 國家之法, 豈可爲此輩所撓奪?’ 云, 此言是矣。 蓋書吏, 本以良人爲之, 近來私賤亦多爲之。 一佩號牌, 區別分明, 故恐或前頭, 使渠輩亦佩, 預爲皷說, 欲沮止之。 紙牌時怨望者, 亦此輩及市井之類矣。 到今益甚者, 以號牌比紙牌, 尤爲表著故也。" 權大運曰: "號牌、大軍籍, 古者竝行。 故恐或爲大軍籍, 以此騷擾, 不久當自定矣。 但雜職所佩, 異於朝士, 故嫌其區別云矣。" 柳赫然云: "雜職章服, 與朝士同, 何獨於號牌之牙角而爭之乎? 此言是矣。" 於是, 命改節目, 只令有職人佩之, 而雜職類所佩, 亦與朝士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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