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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종실록 6권, 숙종 3년 2월 28일 을해 1번째기사 1677년 청 강희(康熙) 16년

선왕의 능이 무너지자 위안제를 거행하고 개수하게 하다

예조(禮曹)에서 숭릉(崇陵)의 사초(莎草)가 무너진 것을 들어, 위안제(慰安祭)를 거행하고 대신 이하를 보내 봉심(奉審)하게 하기를 계청(啓請)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르고, 또 사관(史官)·중사(中使)를 보내 봉심하게 했다. 임금이 날을 받지 않고 행행(行幸)하여 봉심하려고 하므로, 약방(藥房)에서 아뢰기를,

"궂은 비가 지루하고 봄날씨가 아직도 차가우며 여염(閭閻)에는 또한 꺼리는 병이 많이 있으니, 동가(動駕)를 정지하시기 바랍니다."

하니, 답하기를,

"내 마음에 놀랍고 애통함이 한이 없는데, 어찌 대신들에게만 맡겨버리고 친히 봉심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임금이 또한 당초에 마음을 다해 굳게 봉분을 쌓지 않았기 때문에 이처럼 무너지는 변이 있게 되었다 하여, 그 때의 산릉 도감(山陵都監) 당상(堂上) 이정영(李正英)·민정중(閔鼎重)·김휘(金徽)와 도청(都廳) 이헌(李藼)·임규(任奎) 및 낭청(郞廳)·감조관(監造官)·감동 중사(監董中使)를 모두 잡아다가 추문(推問)하여 정죄(定罪)하고, 사초장(莎草匠)도 잡아다가 죄를 다스리도록 명했었다. 영의정 허적(許積)이 봉심하고 돌아와서 아뢰기를,

"능 위의 무너진 데가 9척이나 되고 주위는 57척 넓이인데 흙이 사초 따라 무너져서 꺼진 데도 있었는데, 만일 이번에 새 흙을 붙인다면 반드시 견고하지 못할 것이어서 이 점이 염려스럽습니다. 또 봉분이 사면을 깎아지른 듯이 가파르게 높이 쌓아 무너져 꺼지기 쉬우니, 이번에는 마땅히 덜 가파르게 다시 쌓아야 하겠습니다. 자지(子地)의 곡장(曲墻) 밖도 무너진 데가 너비는 68척이고 가장 높은 곳은 26척이나 되었는데, 이는 곧 능의 왼쪽이고, 전면의 무너진 곳은 너비가 40여 척에다 높이는 20여 척이었는데, 무너져 내리는 기세가 매우 급했었기 때문에 평지로 무너져 내린 것이 또한 80여 척이나 되고 더러는 50여 척이나 되어, 마치 산이 물로 사태가 난 모양과 같았습니다. 대개 해동(解凍)하는 때에 소나기가 덮치므로 이렇게 된 것입니다. 또 당초에 석물(石物)를 배치할 자리가 매우 좁았기 때문에 보토(補土)한 데가 있었는데, 그 보토를 한결같이 산 형세에 의해 또한 매우 가파르게 했기에 이런 병폐가 있게 된 것입니다. 이번에 마땅히 지사(地師)와 함께 상의(商議)하여 조금 판판하고 완만하게 한 다음에야 뒷날의 염려가 없게 될 것입니다."

하고, 허적이 또 아뢰기를,

"길 닦는 역사를 하려면 마땅히 백성들의 힘을 많이 써야 할 것인데, 이런 농사철에 당해서는 백성을 사역하기가 매우 민망합니다."

하고, 이어 친히 봉심하기로 한 명을 정지하기를 청하였으나 임금이 따르지 않으므로, 허적이 좌의정 권대운(權大運)과 함께 서로 극력 말하니, 임금이 비로소 윤허하고 봉분을 고친 뒤 8월 무렵에 전성(展省)051) 하겠다고 명하였다. 그뒤에 허적권대운과 함께 경연(經筵)에서 아뢰기를,

"봉분을 고칠 참에도 농시(農時)가 이미 박두해 버려 민간의 인부를 조용(調用)할 수가 없고, 모군(募軍)을 하면 모두 오합(烏合)인데다가 급하게 모으기도 어렵습니다."

하고, 유혁연(柳赫然)이,

"별대(別隊) 17초(哨) 중에 7초를 쓰고 어영군(御營軍) 10초 중에 절반을 쓰고, 수어청(守禦廳)·정초청(精抄廳)·총융청(摠戎廳)의 군병(軍兵)과, 체부(體府)의 기고수(旗鼓手)들을 또한 다소에 따라 조용하기 바랍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르고, 이어 능(陵) 형태를 그전처럼 높이 깎아지른 듯하게 하지 말아 후환을 방지하게 하도록 명하고, 봉분 고치는 일이 끝나기 전에는 경연(經筵)을 정지하도록 명했다. 허적·권대운이 또 아뢰기를,

"역사가 끝난 다음에는 군병(軍兵)들을 마땅히 본아문(本衙門)으로 하여금 상을 주게 하고, 또한 조가(朝家)에서도 호궤(犒饋)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모두 그대로 따랐다. 드디어 권대운(權大運)을 수개 도감 도제조(修改都監都提調)로 삼아, 3월 초사흗날 역사를 시작하여 초아흐렛날 역사를 끝냈는데, 권대운이 등대(登對)하여 아뢰기를,

"사초(莎草)가 무너지게 된 것은 대개 얼었다가 풀어지는 참에 급하게 바람이 불고 비가 쏟아진 때문이고, 흙을 조심해서 쌓지 않은 소치는 아닌 듯했습니다. 만일 그전 흙을 모두 제거하고 새 흙으로 다시 쌓으려면 실로 완고하게 해야 할 것인데, 또한 감히 절구질하여 쌓을 수가 없었고, 장인(匠人)들도 모두의 말이 ‘그전의 흙위에다 새 흙을 덧붙이면 반드시 잘 붙지도 않고 견고하게 되지도 않는다.’고 했는데, 다시 다른 방책이 없기에 점토(粘土)를 더 붙이면서 조금 가파른 형세를 낮추기만 했습니다. 섬돌 아래 묘방(卯方) 쪽 땅이 항시 물기가 많아 흙이 매우 질기 때문에, 비록 보토(補土)를 하고 굳게 쌓기는 했습니다마는, 견고하게 되지 않았을 듯합니다."

하였다. 한때 유생(儒生) 이장(李㙊) 등이 상소하여, 숭릉(崇陵) 전알(展謁)은 마땅히 시급하게 해야 함을 말하니, 임금이 그의 말에 감동하여 좌상(左相)·우상(古相)에게 묻기를,

"이 상소의 말은 바로 나의 뜻과 맞는다. 당초에는 진실로 친히 가서 봉심(奉審)하려고 했다가, 봉릉(封陵)의 역사가 하루가 급한데, 만일 친히 가기를 기다렸다가 역사를 시작한다면 지체되겠다 싶기 때문에 대신들의 말에 따라 참으며 정지했었지마는, 이제는 봉분 역사를 이미 마쳤으니 이달 안으로 날을 가려 능을 참배해야 한다."

하매, 권대운 등이 모두 찬성하며 드디어 3월 17일에 능에 행행하기로 정했었다. 이때 임금이 장차 선성(先聖)을 배알(拜謁)하기로 하는데, 이장이 또 상소하여, 능소(陵所)에 나아가기 전에 먼저 반궁(泮宮)에 행행함은 미안한 일이라 하여 조금 날짜를 물리기를 청하니, 임금이 이 말도 옳게 여기어 먼저 능에 행행하고 다음에 알성(謁聖)하기로 명했다. 산릉 도감(山陵都監) 제신(諸臣)들의 죄를 의금부(義禁府)에서 ‘탈고신(奪告身)’으로 조율(照律)하니, 임금이 마음을 다해 하지 않은 소치는 아니라 하여 파직만 하도록 명하자, 허목이 아뢰기를,

"능침(陵寢)에 관한 일이므로 엄중하게 죄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제왕가(帝王家)의 일은 범인들의 집 일과는 다른 것이어서, 선수(膳羞)가 조금만 정결하지 못해도 선부(膳夫)의 죄가 매우 무거웠습니다. 《주례(周禮)》에 이렇게 되어 있는 것은 대개 후환(後患)을 방지하려 한 것일 것입니다. 하물며 지극히 중한 능침(陵寢)이겠습니까?"

하고, 권대운이 또한 허목의 말을 옳게 여기며 아뢰기를,

"만일 마음을 다한 것이 아니었더라면 죄가 어찌 ‘탈고신’에 그치게 되었겠습니까? 마땅히 해부(該府)에서 아뢴 대로 하는 것이 합당합니다."

하고, 민희(閔熙)·이우정(李宇鼎) 등이 또한 모두 말을 하니, 임금이 비로소 그대로 따랐다. 이에 사간원에서 논쟁(論爭)하기를,

"감동(監董)한 제신(諸臣)들을 무겁게 죄를 과하지 않아서는 안되는데도 옥사(獄事)를 다룬 신하들이 조율(照律)을 매우 가볍게 했으니, 추고(推考)하기 바랍니다."

하니, 그대로 따랐다. 또 아뢰기를,

"선왕(先王)의 능이 무너지게 된 것은 진실로 당초에 봉분 쌓기를 조심해서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추위가 지나가고 해동하는 판에 거센 바람과 쏟아지는 비가 그렇지 않은 곳이 없었지만 일반 사람들의 묘역(墓域)은 무너졌음을 들어 볼 수 없는데 유독 새 능에만 이런 변이 있었으니, 봉분을 조심해서 쌓지 않은 죄를 조금도 용서할 수 없습니다. 산릉 도감의 당상(堂上)과 낭청(郞廳)을 모두 정배(定配)하도록 명하시기 바랍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흙 쌓은 것은 견고했었으니, 마음을 다하지 않은 소치는 아니다. 이미 참작하여 조율한 것이니, 정배하는 것은 지나치다."

하고, 끝내 윤허하지 않았다. 또 개수 도감(改修都監)의 당상과 낭청을 가자(加資)하도록 명하매, 사간원에서 또한 도로 거두기를 청하여 아뢰기를,

"개수(改修)하는 역사는 사초(莎草)를 고쳐 덮고 이지러진 데를 보완하기에 지나지 않는 것인데, 산릉 도감에게 상전(賞典)을 내리는 예(例)를 인용함은 진실로 과당합니다."

하니, 답하기를,

"전례가 있기도 하고, 또 정자각(丁字閣)을 개조한 때에도 또한 상전을 내렸었다. 능 위의 봉분 개수는 사체(事體)가 더욱 중하니, 외람한 상이 아니다."

하고, 오래도록 따르지 않았다. 권대운(權大運)이 매양 경연(經筵)에서 아뢰기를,

"이 상은 산릉 도감에게 주는 상전과 차별이 없게 함은 진실로 과람한 일입니다. 또한 성(城)을 쌓았을 적에도 역시 장마를 겪었어도 완전하고 튼튼한 것을 본 다음에야 상주었으니, 설사 상을 주더라도 아직은 후일을 기다려야 합니다."

하니, 그 뒤에 한 달이 지나서야 비로소 대계(臺啓)대로 윤허했다.


  • 【태백산사고본】 5책 6권 14장 B면【국편영인본】 38책 350면
  • 【분류】
    왕실-종사(宗社) / 왕실-행행(行幸) / 왕실-의식(儀式) / 왕실-국왕(國王) / 군사-중앙군(中央軍) / 인사-임면(任免) / 인사-관리(管理) / 사법-탄핵(彈劾) / 정론-간쟁(諫諍)

○乙亥/禮曹以崇陵莎草崩頹, 啓請行慰安祭, 遣大臣以下進去奉審, 上從之。 又遣史、官中使奉審。 上欲不卜日親幸奉審, 藥房以淫雨支離, 春日尙寒, 閭間且多拘忌之疾, 請寢動駕, 答曰: "予心驚悼罔極, 豈可委諸大臣而不爲親審乎?" 上又以當初不能盡心堅封, 有此崩頹之變, 命其時山陵都監堂上李正英閔鼎重金徽, 都廳李藼任奎及郞廳、監造官、監董中使, 幷拿問定罪, 莎草匠拿治。 領議政許積奉審歸奏曰: "陵上崩頹處九尺, 而周回則五十七尺之廣, 土隨莎頹, 亦有崩陷處。 今若附以親土, 則必不牢固, 此可慮。 且封陵四面如削, 峭峻高築, 易於崩陷。 今宜少殺峭峻之勢而改築之。 子地曲墻外崩圮處, 廣六十八尺、最高處二十六尺, 此乃陵之左邊也。 前面頹圮處, 廣四十餘尺、高二十餘尺, 其頹圮之勢甚急, 故崩下於平地者, 亦至八十餘尺, 或五十餘尺, 有似山水沙汰之形。 蓋解凍時, 驟雨乘之, 至於如此。 且當初以石物排置頗狹, 故有補土處, 而其補土, 一依山形, 亦甚峻急, 致有此患。 今宜與地師商議, 稍令平緩, 然後可無後患矣。" 又言: "治道之役, 當大用民力, 當此農時, 役民極悶。" 仍請停親審之命, 上不從。 與左議政權大運交口極言, 上始許之。 命改封, 後以八月間展省。 其後大運筵白曰: "改封時, 農時已迫, 不可調用民夫。 募軍則皆烏合, 且難急聚矣。" 柳赫然請別隊十七哨用七哨, 御營軍十哨用其半, 守御精抄、摠戎廳軍兵及體府旗皷手, 亦隨其多少調用。" 上從之。 仍命陵形勿令如前高峻峭急, 俾防後患, 而封陵未畢前, 命停經筵。 大運又言: "畢役後, 軍兵似當令本衙門給賞, 而亦自朝家犒饋。" 上皆從之。 遂以大運爲修改都監都提調。 三月初三日始役, 初九日畢役。 大運登對言: "莎草崩頹, 蓋緣凍釋之際, 風雨急遽, 似非築土不審之致也。 若盡去舊土, 以新土改築, 則固當完固, 而亦不敢杵築。 匠人輩皆言, 舊土上加封新土, 必不襯合堅牢云, 而更無他策。 以粘土加封, 少殺其峻急之勢矣。 階砌下卯地, 常多水氣, 其土甚濃, 故補土雖堅築, 而恐不牢固矣。" 時, 儒生李㙊等上疏, 言崇陵展謁宜急。 上感其言, 問左右相曰: "此疏正合予意。 當初固欲親往奉審, 而封陵之役, 一日爲急。 若待親往而始役, 則恐致遲延, 故從大臣言, 隱忍而止之。 今封陵旣畢, 以今月內擇日, 拜陵可也。" 大運等皆贊之, 遂以三月十七日, 定行陵幸。 時, 上將謁先聖, 疏又以未詣陵所, 先幸泮宮爲未安, 請差退日字。 上是其言, 故命先幸陵而後謁聖。 山陵都監諸臣之罪, 禁府以奪告身照律, 上以爲非其不盡心之致, 命罷職。 言: "事係陵寢, 罪不可不嚴。 帝王家事, 異於凡人, 膳羞少不精, 則膳夫之罪甚重。 周禮如此, 蓋以防後患也。 況陵寢至重乎?" 大運亦以言爲是曰: "若不盡心, 則罪豈止於奪告身乎? 宜從該府奏當。" 閔熙李宇鼎等, 亦皆言之, 上始從之。 於是, 諫院爭論曰: "監董諸臣, 不可不從重科罪, 而按獄之臣擬律太輕, 請推考。" 從之。 又啓曰: "先陵崩頹, 實由於當初封築之不謹。 經寒解凍, 疾風暴雨, 無處不然, 而凡人塋域, 未聞有崩頹。 獨新陵有此變, 封築不謹之罪, 少無可恕。 請山陵都監堂上、郞廳, 竝命定配。" 上以爲: "土築堅固, 非不盡心之致。 旣已參酌照律, 定配則過矣。" 終不允。 又命改修都監堂郞加資。 諫院又請還收曰: "修改之役, 不過改覆莎草, 補其虧缺, 而援用山陵都監賞典之例, 誠爲過當。" 答曰: "前例有之。 且丁字閣改造時, 亦施賞典。 陵上改封, 事體尤重, 非濫賞也。" 久而不從。 大運每於筵席言: "此賞與山陵都監賞典, 無差別, 實爲僭也。 且築城亦觀經霖完固, 然後賞之。 設令可賞, 亦當姑待後日。" 其後逾月, 始允臺啓。


  • 【태백산사고본】 5책 6권 14장 B면【국편영인본】 38책 350면
  • 【분류】
    왕실-종사(宗社) / 왕실-행행(行幸) / 왕실-의식(儀式) / 왕실-국왕(國王) / 군사-중앙군(中央軍) / 인사-임면(任免) / 인사-관리(管理) / 사법-탄핵(彈劾) / 정론-간쟁(諫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