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경을 거행하려 할 때 비바람이 일어 온종일 그치지 않다
임금이 장차 적전(籍田)에서 친경(親耕)하려 하여 장엄(裝嚴)040) 이 끝났는데, 큰 비가 온종일 내려 거행하지 못했다. 대신이 날짜를 고쳐 물리어 거행하기를 청하니, 그대로 따랐었는데, 그 이튿날 숭릉(崇陵)의 봉분(封墳)이 비로 인해 무너졌음을 듣고 드디어 거행을 정지하도록 명했다. 당초에 우의정 허목(許穆)이 아뢰기를,
"친경은 곧 삼대(三代) 시절의 아름다운 법이므로 마땅히 거행하여 백성들이 관감(觀感)하게 해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허목이 또 상소하기를,
"예법이 정월 원일(元日)에는 황종(黃鍾)을 연주하고 대려(大呂)를 노래하고 운문(雲門)을 춤추며 천자(天子)가 상제(上帝)에게 기곡(祈穀)041) 할 때 후직(后稷)을 배향(配享)하고 원신(元辰)042) 을 가리어 몸소 뇌거(耒耟)를 지고 삼공(三公)·구경(九卿)·제후(諸侯)·대부(大夫)를 거느리고 적전에 나아가 몸소 갈되, 천자는 삼퇴(三推)043) 하고 삼공은 오퇴(五推)하고 제후와 대부는 구퇴(九推)하고 돌아와, 태침(太寢)에서 술잔을 들고 삼공·구경·제후·대부가 모두 술을 마시는데, 이를 노주(勞酒)라 합니다. 구퇴한 뒤에는 농부(農夫)가 마무리합니다. 옛적에 동(穜)044) ·육(稑)045) 종자를 후궁(后宮)에 간수한 것은, 씨를 전하여 퍼지게 되는 상서로움이 있기 때문이었고, 생으로 바쳐 왕을 도와서 교제(郊祭)와 체제(禘祭)를 올리게 했었으니, 이는 제왕들의 훌륭한 예절입니다."
하고, 이어 한(漢)나라와 진(晋)나라 때의 고사 및 우리 나라 중종(中宗)·명종(明宗)이 친경을 한 예절을 일일이 들며 아뢰기를,
"왕자(王者)의 상서는 풍년 드는 것보다 더한 것이 없습니다. 선농단(先農壇)에 제사하고 몸소 1천 이랑의 적전을 갈아 보는 것은 백성들을 위해 기곡(祈穀)하기도 하고 또한 몸소 솔선하기를 보이기 위해서인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우악(優渥)하게 답했다. 영상(領相)·좌상(左相) 및 병조 판서 김석주(金錫胄)와 예조 판서 이지익(李之翼) 등이 알성(謁聖) 및 영릉(寧陵) 행행(行幸)과 남별전(南別殿)의 작헌례(酌獻禮)는 모두들 마땅히 봄 동안에 거행해야 함을 여러 차례 말하며 친경은 다음 해로 물려 거행하기를 청했고, 허적·권대운이 또 천연두(天然痘)가 마구 번지고 있음을 들어 물려 거행하기를 청하며,
"우상(右相) 역시 한 번은 거행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지만 반드시 올해에 거행했으면 하는 것은 아닙니다."
라고까지 하였으나, 임금이 모두 받아들이지 않았다. 허적이 또 아뢰기를,
"마음만 태만해지지 않고 황천(皇天)을 대한 듯이 해가면 비록 친경하지 않더라도 백성들이 자연히 감화(感化)되고 연사가 자연히 풍년들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서 형식으로 거행한다면 하지 않는 것만 못한 것입니다."
하고, 참찬(參贊) 홍우원(洪宇遠)이 또한 아뢰기를,
"친경은 진실로 훌륭한 일인 것입니다마는, 다만 지금 민간의 원성이 길거리에 널려 있는데, 이런 때에 친경을 하신들 어찌 관감(觀感)하게 되겠습니까? 마땅히 먼저 백성들이 편하게 될 국정을 시행하면서 백성들이 회복되기를 기다렸다 거행하셔야 합니다."
하였으나, 임금이 모두 살펴 듣지 않고 예의(銳意)하여 거행하기로 하며, 번거로운 예문을 삭제하고 모든 일을 간략하게 하도록 명했다. 대신이, 도감(都監)도 설치하지 말고 노주연(勞酒宴)046) 도 차리지 말며, 또 전례에는 친경을 한 뒤 과거를 보였었지만 《오례의(五禮儀)》에 실려 있는 것은 아니니 또한 하지 말아야 한다고 청하니, 그대로 따랐다. 또 아뢰기를,
"2월 상해일(上亥日)은 아직도 추워 성상께서 밤을 새울 수 없으실 것이니, 상해일에는 예(例)대로 관원을 보내 선농제(先農祭)를 거행하게 하고, 날을 가려 친경을 하시고서 이어 기곡(祈穀)하는 뜻으로 따로 한 제사를 차리기 바랍니다."
하니, 그대로 따랐다. 허목이 또 아뢰기를,
"옛적에는 대순(大詢)047) 의 예(禮)도 있었습니다."
하매, 허적 등이 아뢰기를,
"《오례의》에 실려 있지 않는 일은 또한 시행하기 어렵습니다."
하니, 그대로 따랐다. 또 구경하는 사람들을 금하지 말기를 청하니, 윤허했다. 이때 사민(士民)들이 친경하는 날짜가 정해진 것을 듣고 먼 지방에서까지 구경하러 온 사람들이 매우 많았었다. 이날 새벽에 신농씨(新農氏)와 후직(后稷)의 위판(位版)을 모셔다가 제단 위에 봉안(奉安)하고 제물(祭物)과 의장(儀仗)을 모두 갖추었는데, 비바람이 크게 일어 온종일 그치지 않아, 관경대(觀耕臺)에 설치한 어좌(御座)의 오악(五岳) 그림 병풍이 모두 찢어지므로, 대신이 아뢰기를,
"논밭이 질척거려 결코 친경하시기 어렵겠으니, 마땅히 날이 개어 건조되기를 기다렸다 하셔야 하겠습니다."
하였다. 마침 숭릉(崇陵)의 사초(莎草)가 비로 인해 무너져 능 형태가 부수어졌다. 임금이 떨며 두려워하고 놀래어 애통해 하므로, 허적 등이 아뢰기를,
"이변(異變)이 마침 친경하시려는 날에 생겼으니, 마땅히 소심(小心)하고 공묵(恭默)하여 하늘의 꾸지람에 응답해야 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백성을 위해 기곡(祈穀)하고 권농(勸農)하려 했던 것인데 결국 이렇게 되었으니, 어떻게 해야 하겠는가? 그리고 장차 숭릉을 봉심(奉審)하려 한다. 친경은 마땅히 정지해야 한다."
하매, 허적 등이 아뢰기를,
"친경을 하신 다음에는 본시 경기(京畿)의 수미(收米)와 전세미(田稅米)를 각각 2말씩 감해 주어 백성들을 위로하려고 했었습니다. 비록 지금 친경은 정지하게 되었지만 마땅히 그대로 세미는 감해 주어야 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나의 뜻도 진실로 그렇게 여긴다."
하고, 드디어 감해 주었다. 이때 좨주(祭酒) 윤휴(尹鑴)가 상소하기를,
"친경 때 파종(播種)하는 곡식이 아홉 가지인데 대부분 이때 심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친경하고 파종한 다음에 부득이 갈아버리고 다시 심어야 한다고 했었으니, 이때 심어야 하는 곡식을 심으소서."
하고, 또 노주연(勞酒宴)도 거행하기를 청하고 또 친잠(親蠶)도 시행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예조(禮曹)로 하여금 대신들과 의논하도록 하였다. 예조에서 아뢰기를,
"파종한 다음에 다시 갈아버림은, 절목(節目)에 마련된 것이 아니기에, 어디에 의거한 것인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하고, 대신이 또한 아뢰기를,
"노주연은 비록 《오례의》에 실려 있기는 하지만, 정월·동지와 같은 가장 중요한 모임에도 오히려 폐하고 거행하지 않은 것은 연사가 풍년과 흉년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오히려 전폐(全廢)하는 것은 섭섭하게 여겨, 기로(耆老) 및 친경 때 따라온 서민들에게는 술과 음식을 먹이도록 했었으니, 이는 또한 노주의 의의를 대략 모방한 것입니다. 친잠은 비록 옛 예법이기는 하지만, 《오례의》에는 실려 있지도 않은 것이고, 그 내용에 ‘내관(內官)을 갖춘다.’는 한 조항은 더욱 오늘에 있어서는 거론할 것 없는 것입니다."
하였다. 윤휴가 다시 상소하기를,
"다시 갈아버리는 것은 곧 잘못하고 있는 사례인데, 어찌 절목(節目) 속에 실려 있겠습니까? 이는 조정이 살피지 않고 전인(甸人)들이 하는 대로 맡겨 두므로 그랬던 것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또 이미 때가 아닌 것을 심었다면 결코 싹이 나서 자라게 될 리가 없으니, 변통하지 않아서는 안될 것입니다. 노주에 있어서도 예법은 본래 시기에 따라 풍성하게도 간략하게도 할 수 있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큰 원칙으로 말하면 신명(神明)과 사람의 사이가 다스려지고 상하(上下)의 관계가 화합되게 하기 위한 것이므로, 연사가 흉년인 것 때문에 폐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오늘날 국가에서 북쪽으로는 여산(廬山)의 계학(溪壑)048) 을 채워야 하고 남쪽으로는 교악(鮫鰐)의 먹이049) 를 주어야 하는데, 가운데서는 미려(尾閭)의 누설050) 이 금단되지 않고 있습니다. 군신(群臣)들이 마땅히 이에 있어서 음양(陰陽)을 섭리(燮理)하여 연사(年事)가 충족해지게 하고, 예의를 밝히고 부비(浮費)를 억제할 방도를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마는, 구구하게 공식(公食)하고 의향(儀享)하고 하는 예절을 삭감하는 것을 절약으로 여겨 경솔하게 선왕(先王)들의 전례(典例)를 폐지할 수는 없습니다. 친잠(親蠶)은 비록 《오례의》에는 실려 있지 않지만, 또한 ‘선잠단(先蠶檀)에 제사하고 섭사(攝事)한다.’는 문구(文句)가 있고, 우리 나라 열성(列聖)들께서 또한 거행하여, 성종(成宗)께서 6년에는 친경(親耕), 8년에는 친잠하셨고, 중종(中宗)께서는 8년에 친경하고 이해에 친잠도 하셨으며, 선조(宣祖)께서도 5년에 친경하고 친잠하시어, 이미 거행해온 전례임을 분명하게 고찰할 수 있으니, 마땅히 그대로 준행해야 합니다. 이른바 ‘내관을 갖춘다.’는 말은 더욱 신(臣)의 본의가 아닌 말입니다. 《예기》에 ‘제사는 반드시 부부가 친히 지내는 것이다.’ 한 것은, 내외(內外)의 관(官)을 갖추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하였는데, 상소를 입계(入啓)했을 때 이미 친경을 정지하기로 의논했었기에, 임금이 정지했다는 뜻으로 답했다.
- 【태백산사고본】 5책 6권 13장 B면【국편영인본】 38책 349면
- 【분류】왕실-행행(行幸) / 왕실-의식(儀式) / 정론-정론(政論) / 농업-권농(勸農) / 농업-양잠(養蠶) / 재정-전세(田稅) / 역사-전사(前史)
- [註 040]장엄(裝嚴) : 거동 준비를 뜻함.
- [註 041]
기곡(祈穀) : 농사가 잘 되기를 빎.- [註 042]
원신(元辰) : 좋은 때.- [註 043]
삼퇴(三推) : 쟁기를 세 번 미는 것.- [註 044]
동(穜) : 늦벼.- [註 045]
육(稑) : 올벼.- [註 046]
노주연(勞酒宴) : 임금이 적전(籍田)에 나가 친경(親耕)하고 나서 삼공(三公)·육경(六卿)·대부(大夫) 등의 수고를 위로하기 위해 베푸는 연회.- [註 047]
대순(大詢) : 국가의 큰일에 있어 대중에게 물어보는 것.- [註 048]
여산(廬山)의 계학(溪壑) : 여산은 중국의 명산이고 계학은 한이 없는 욕심을 뜻하는 말. 이는 여산의 골짜기가 한없듯이 청나라 사람들의 요구가 한없음을 암시한 말.- [註 049]
교악(鮫鰐)의 먹이 : 교악은 사람도 해치는 수가 있는 상어와 악어. 이는 수시로 우리 나라에 와서 곡물 등을 달라고 한 왜인(倭人)들을 암시한 말.- [註 050]
미려(尾閭)의 누설 : 미려는 바다 바닥에 있는, 쉴 사이 없이 물이 빠져 나간다는 곳. 즉 국가의 재정이 낭비되고 있음을 지적한 것.○甲戌/上將親耕籍田, 裝嚴訖, 大雨終日, 不果行。 大臣請改日退行, 從之。 翌日聞崇陵封墓, 因雨崩頹, 遂命停行。 初, 右議政許穆言: "親耕乃三代美法, 宜行之, 使民觀感。" 上許之。 穆又上疏言:
禮, 正月元日奏黃鍾, 歌大呂, 舞雲門。 天子祈穀于上帝, 配以后稷, 乃擇元辰, 天子躬載耒耟, 帥三公、九卿、諸侯、大夫, 躬耕帝籍, 天子三推, 三公五推, 諸侯、大夫九推, 反執爵于太寢。 三公、九卿、諸侯、大夫皆銜命曰: "勞酒。" 九推之後, 農夫終畝。 古者藏穜稑之種于后宮, 以其有傳類蕃孶之祥也, 生而獻之, 以佐王共郊禘, 此帝王盛節也。
王者之瑞, 莫如豊年。 祀先農, 躬籍千畝, 所以爲百姓祈穀, 而亦示以身先之也。
上優答之。 領左相及兵判金錫冑, 禮判李之翼等, 屢言謁聖及寧陵行幸, 南別殿酌獻禮, 皆當行於春間, 請退行親耕於後歲。 積、大運又以痘疾熾盛, 請退行, 至謂: "右相亦以爲不可不一行, 非必欲今年行之也。" 上皆不納。 積又言: "一心不懈, 對越皇天, 則雖不親耕, 民自感化, 歲自豐登。 不然而行以文具, 則不如不爲。" 參贊洪宇遠亦言: "親耕固盛擧, 而但今民怨載路, 此時親耕, 有何觀感? 宜先行便民之政, 待民蘇息而行之。" 上皆不省, 銳意行之, 命刪去繁文, 凡事從簡。 大臣請勿設都監, 勿行勞酒宴。 且前例親耕後設科, 而不載於《五禮儀》, 亦宜勿設, 從之。 又以爲二月上亥日尙寒, 自上不可經宿, 請於上亥, 依例遣官, 行先農祭, 擇日親耕, 仍以祈穀之意, 別設一祭, 從之。 穆又言: "古有大徇之禮。" 積等以爲: "不載《五禮儀》, 事又難行。" 從之。 又請勿禁觀光人, 許之。 時, 士民聞親耕有日, 自遠方來觀者甚衆。 是日曉, 奉出神農、后稷位版, 安于壇上, 祭物儀仗皆具, 而風雨大作, 終日不止, 觀耕臺所設, 御座五岳屛, 皆裂破。 大臣言: "田野泥濘, 決難親耕。 宜俟晴乾而行之。" 適崇陵莎草, 因雨傾圮, 陵形隳損, 上震懼驚痛。 積等言: "變異適在親耕之日, 宜小心恭默, 以答天譴。" 上曰: "爲民祈穀, 且欲勸農矣。 畢竟至此, 奈何? 且將奉審崇陵, 親耕宜停之。" 積等言: "親耕後, 固欲除減京畿收米、田稅米各二斗, 以慰民矣。 親耕今雖停, 宜仍減稅。" 上曰: "予意固然。" 遂減之。 時, 祭酒尹鑴上疏言:
親耕播種之穀, 凡九種, 多非今時所種。 故親耕播種之後, 不得已翻耕改種云。 請以今時宜種之穀種之。
且請行勞酒宴, 又請行親蠶。 上令禮曹, 議大臣。 禮曹以爲: "播種後翻耕, 非磨鍊節目, 未知何所據而云。" 大臣亦以爲: "勞酒宴雖載《五禮儀》, 如正至會之最重者, 猶廢不行, 以時有豐儉故也。 然猶以全廢爲歉, 耆老及從耕庶人, 命饋以酒食, 此亦略倣勞酒之義也。 親蠶雖古禮, 而不載於《五禮儀》, 其中備內官一款, 尤不當擧論於今日。" 云。 鑴復上疏曰:
翻耕乃謬例, 豈載於節目中乎? 此不過朝廷不之察, 任甸人所爲爾。 且旣有非時之種, 則決無生成之理, 不可不變通也。 至於勞酒, 則禮固有隨時豐殺者, 然其大經所在, 所以治神人、和上下者, 不可以年時之貧儉而廢焉。 今國家北塡廬山之壑, 南投鮫鰐之食, 中不禁尾閭之泄。 群臣於此, 宜思爕理陰陽, 充美年時, 明禮義, 抑浮費之道可也, 不當區區割削於公食儀享之禮, 以爲節損, 而輕廢先王之典也。 親蠶雖不載《五禮儀》, 亦有祭先蠶攝事之文, 而我列聖亦行之。 成廟六年親耕, 八年親蠶; 中廟八年親耕, 其年親蠶; 宣廟五年親耕、親蠶。 已行之典, 斑斑可考, 正宜遵而行之。 所謂備內官之說, 尤非臣本意。 禮曰: "祭也者, 必夫婦親之。" 所以備內外之官也。
疏入而親耕已議停矣。 上以停止之意答之。
- 【태백산사고본】 5책 6권 13장 B면【국편영인본】 38책 349면
- 【분류】왕실-행행(行幸) / 왕실-의식(儀式) / 정론-정론(政論) / 농업-권농(勸農) / 농업-양잠(養蠶) / 재정-전세(田稅) / 역사-전사(前史)
- [註 04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