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과 회시에 부정한 자가 많아 징계하고 초시·회시를 파하다
이날은 곧 문과(文科) 회시(會試)의 종장(終場) 날인데, 유생(儒生)들이 허다히 수종(隨從)들을 데리고 들어와 더러 차서(借書)하거나 차술(借述)할 꾀를 부리는 자가 있었다. 거자(擧子)들이 일제히 고발함에 따라 시관(試官)이 거자들로 하여금 각자의 시권(試券)을 가지고 동쪽 마당으로 옮겨 가 서도록 하니, 그 중에서 시권이 없는 사람이 12인이었다. 연유를 물어보니, 여필진(呂必振)·윤상은(尹相殷)·임재(林梓)·윤빙삼(尹聘三)·최해원(崔海遠)·최욱(崔煜) 등 6인은 모두 초시(初試)를 보지 않은 사람으로, 최해원은 나주 목사(羅州牧使) 윤이익(尹以益)의 수종이고 윤상은은 유신(柳莘)의 수종이며, 임재와 최욱은 ‘수종이 아니고 관광(觀光)하기 위해 입장(入場)했다.’고 했었다. 이정창(李廷昌)·이장백(李長白)·이형(李蘅)·이한영(李漢泳)·이두상(李斗相)·양만상(楊萬祥) 등 6인은 모두 초시를 본 사람들로, 이정창은 윤상은에게 시권을 할급(割給)하고, 이장백도 다른 사람에게 시권을 할급하고, 이형과 이한영은 시권을 다른 사람이 정납(呈納)하게 하였는데, 끝내 할급받은 사람을 바른 대로 고하지 않았고, 이두상과 양만상은 원래 시권이 없었다. 이래서 형조(刑曹)와 의금부로 하여금 가두고 죄를 다스리도록 했다. 임금이 대신들과 비국 당상(堂上)을 인견(引見)했을 때 과거를 파할 것인지에 대하여 물으니, 영의정 허적(許積)이 아뢰기를,
"선비들의 풍습이 해괴하고 놀랍기가 전에 있지 않던 일입니다. 이번 과거를 파하지 않는다면 사람들의 마음을 복종시킬 수도 없고 선비들의 풍습을 바로 잡을 수도 없을 것입니다마는, 다만 7차례의 경사를 합치어 보인 과거이기에 파하기도 중난합니다. 또한 인조조(仁祖朝)에 정탈(定奪)한 것이 있는데, ‘죄가 거자(擧子)들에게 있으면 거자들을 죄주고, 죄가 시관에게 있으면 시관을 죄주어야 할 뿐, 방(榜)은 파하지 말아야 한다.’ 했습니다. 이번 과거에 비록 이런 일이 있기는 했습니다마는, 만일 종장(終場)만 이러했다면 종자의 글은 취하지 말고 초장(初場)에 지은 글만 가지고도 출방(出榜)을 할 수가 있는데, 사람들이 모두 말하기를, ‘초장에도 역시 외람하게 들어간 사람이 많았는데 미처 발각되지 않았다.’고 했으니, 그렇다면 초장과 종장의 글을 모두 취할 수가 없습니다. 또 아직 출방하지 않았으니 비록 지금 파하게 되더라도 곧 파장(罷場)이지 파방(罷傍)은 아닙니다. 신(臣)의 생각에는 즉시 파장만 하도록 하고 초시의 것은 그대로 두었다가 다시 날을 가려 회시(會試)를 보이는 것이 가하다고 여깁니다."
하고, 좌의정 권대운(權大運)이 아뢰기를,
"과거는 남잡한 짓이 있으면 파방하는 것이 예(例)로서, 조종조(祖宗朝)에도 증광시(增廣試)를 파방한 일이 있었습니다. 이번에 생긴 통탄스럽고 해괴한 변도 엄중하게 다스리지 않을 수 없으니, 신의 생각에는 파방하는 것이 가하다고 여깁니다. 생원(生員)·진사(進士)가 파방되는 것은 원통하겠지만, 다만 전에도 생원·진사를 출방한 뒤에 동당(東堂)이 남잡했던 것 때문에 파한 일이 있었습니다. 하물며 이번은 회시(會試)가 남잡하게 된 것이겠습니까? 초시는 그대로 두었다가 다시 회시만 보이는 것은 일을 일시적으로 미봉하기만 하는 것이어서 결코 할 수 없는 일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입시(入侍)한 제신(諸臣) 장선징(張善瀓)·오시수(吳始壽)·민점(閔點)·조사석(趙師錫)·오시대(吳始大)에게 묻자, 허적이 한 말과 같았고, 오시수는 다시 아뢰기를,
"비용이 적지 않은 것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였으며, 민희(閔熙)·유혁연(柳赫然)·이우정(李宇鼎)·심벌(沈橃)·심단(沈檀)은 권대운이 한 말과 같았는데, 임금이 허적의 말대로 따르게 되매, 권대운이 다시 항쟁했으나 되지 않았다. 우의정 허목(許穆)이 차자(箚子)를 올리기를,
"이번의 과거는 초시 때에도 이미 말이 많아, 역서(易書)한 것을 도개(圖改)하는 짓이 이미 실패하여 드러났었지만, 유독 형세가 없는 사람 하나만 죄를 입었었습니다. 이번에 또 이런 해괴하고 놀라운 일이 생겼는데, 국초(國初) 이래 있지 않던 일로서 천하 후세에 듣게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오늘날의 국가 일은 한심스러워 조정의 행정이 문란해지고 벼슬길이 혼탁해졌는데, 과거의 폐단이 또한 이처럼 극도에 이르렀으니, 반드시 무거운 법으로 다스려 모든 범죄한 사람들이 하나하나 죄를 받게 된 다음에야 사람들이 법을 두려워할 줄 알게 되어 나라 일을 해 갈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이전에도 경사(慶事)로 인해 과거를 보였다가 더러는 파방하게 된 옛 사례가 있었으니, 법에 의해 시행하신다면 이보다 다행함이 없겠습니다."
하니, 답하기를,
"단지 회시만 파하기로 이미 참작하여 처리했다. 파방까지 하는 것은 과중할 듯하니, 경(卿)은 깊이 생각해 보라."
하였다. 대사간 조위명(趙威明), 장령 이석관(李碩寬)이 또한 상소하여, 초시도 아울러 파장하고 다시 초시와 회시를 보이기를 청하였으나, 임금이 모두 들어주지 않았다. 사간원에서 또 논계(論啓)하기를,
"과장(科場)은 사체가 엄중하게 되어야 하는 법이어서, 만일에 조금이라도 남잡한 짓이 있게 되면, 맑아야 하는 조정에 큰 누가 되는 것입니다. 이번의 문과(文科) 회시에 수종(隨從)했다가 탄로나 잡힌 사람이 매우 많았습니다. 이는 국가의 기강(紀綱)이 무너져 없어지고 선비들의 풍습이 간교(奸巧)해진 데에서 생긴 것이므로, 마땅히 초시도 아울러 파하여, 선거(選擧)가 엄중해지게 해야 합니다. 하물며 초시는 역서(易書)한 것을 도개(圖改)하다가 탄로나 죄를 입게 되어 외람함이 너무도 심했었으니, 마땅히 파장해야 할 까닭이 어찌 단지 회시에만 있겠습니까? 그 초시에 의거하여 재차로 복시(覆試)를 보이는 것입니다. 이는 진실로 국조(國朝)에는 있지 않던 일로서 뜻이 있는 선비들은 반드시 앞으로 과거 마당에 들어가기를 부끄러워하게 될 것이니, 시급히 초시도 파하기를 바랍니다."
하니, 답하기를,
"단지 회시만을 파한 것은 진실로 경비가 고갈되었음을 생각한 것이니, 변경할 수 없다."
하고, 여러 차례 아뢰었으나 윤허(允許)하지 않았다. 마침 유생(儒生) 이장(李㙊) 등이 상소하여 숭릉(崇陵)에 전알(展謁)하는 일에 관하여 아뢰고, 이어 이번 과거는 파하지 않을 수 없음을 말했다. 좌의정(左議政) 권대운(權大運)이 경연(經筵)에서 아뢰기를,
"우리 나라의 사람 등용하는 길은 오직 과거인데, 이 길이 바르지 못하게 되면 어떻게 나라를 다스릴 수 있겠습니까? 대계(臺啓)에 생원·진사도 아울러 파하기를 청하지 않은 것은 오히려 구간(苟簡)하기는 합니다마는, 그러나 만일 모두를 파하기가 어렵다면 차라리 대계대로 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하고, 우의정 허목이 또한 아뢰기를,
"선비된 사람들이 대부분 이번 과거는 보고 싶지 않다고 했었으니, 이 과거는 파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고, 이어 합사(合辭)하여 극력 청하기를 그만두지 않으니, 임금이 드디어 초시도 파하도록 명하였다. 권대운이 아뢰기를,
"비록 광명 정대(光明正大)하게 되지는 못했습니다마는, 그 다음은 됩니다."
하고, 이어 가을 무렵에 다시 초시와 회시를 보이기를 청하니, 그대로 따랐다. 간사한 짓을 하다가 갇히게 된 자 16인 등과 제신(諸臣) 중에 말한 사람을 모두들 엄하게 죄를 다스리기를 청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요사이의 선비들 풍습은 해괴하고 놀랍다. 인일(人日)의 일과 초시 때에 역서(易書)한 것을 도개(圖改)한 짓은 모두가 통탄스럽기만 하다. 그러나 사형(死刑)으로 처리할 수는 없으니, 그 중에 차서(借書)나 대술(代述)을 자복한 자는 모두 먼 변방에 충군(充軍)하되 물간 사전(勿揀赦前)039) 하고, 바른 대로 공술하지 않아 실정을 숨기는 것이 있는 자는 두어 차례 형신(刑訊)한 다음에 역시 같은 죄를 주라."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5책 6권 12장 A면【국편영인본】 38책 349면
- 【분류】인사-선발(選拔) / 사법-행형(行刑) / 왕실-국왕(國王) / 정론-간쟁(諫諍) / 정론-정론(政論) / 교육-인문교육(人文敎育)
- [註 039]물간 사전(勿揀赦前) : 사령(赦令)이 내리기 전에 지은 죄는 사령이 내리면 사면(赦免)이 되는 것이 상례이나, 특수한 죄에 대하여는 사령 이전에 지은 죄라도 사면을 받지 못하게 하는 것.
○是日乃文科會試終場也。 儒生多率隨從而入, 或有爲借書、借述之計者, 因擧子之齊告, 試官使擧子, 各持其試券, 移立於東庭, 則其中無試券者十二人。 問其由則呂必振、尹相殷、林梓、尹聘三、崔海遠、崔煜等六人, 皆不參初試, 而海遠爲羅州牧使尹以益隨從, 尹相殷爲柳莘隨從, 林梓、崔煜稱以非隨從, 而爲觀光入場云。 李廷昌、李長白、李衡、李漢泳、李斗相、楊萬祥等六人, 皆參初試, 而李廷昌割給其試券於尹相殷, 李長白亦割給試紙於人, 李蘅、李漢泳則試券使他人呈納, 而所給之人, 終不直告, 李斗相、楊萬祥則元無試券。 於是令刑曹、禁府囚治。 上引見大臣、備局堂上時, 問科擧罷否, 領議政許積曰: "士習駭愕, 前所未有。 不罷此科, 則無以服人心、正士習, 但合七慶之科, 罷之重難。 且自仁祖朝有定奪, 罪在擧子, 則罪擧子; 罪在試官, 則罪試官而已, 勿罷其榜。 此科雖有此事, 若終場只如此, 則勿取終場文, 只以初場所製出榜亦可。 而人皆言初場亦多濫入, 未及發覺云, 然則兩場文, 俱不可取。 且時未出榜, 則今雖罷之, 乃罷場, 非罷榜也。 臣意, 卽令罷場, 而仍存初試, 更擇日會試可矣。" 左議政權大運曰: "科擧有濫雜, 則罷之, 例也。 祖宗朝亦有增廣罷榜之事, 今逢痛駭之變, 不可不嚴治。 臣意罷榜可矣, 生進之見罷, 冤矣。 但自前生進出榜後, 因東堂濫雜, 而罷者有之。 況此會試濫雜乎? 仍存初試而更設會試, 事甚苟簡, 決不可爲也。" 上問入侍諸臣, 張善澂、吳始壽、閔點、趙師錫、吳始大如積言, 而始壽則更言, 靡費不貲, 亦不可不慮。 閔熙、柳赫然、李宇鼎、沈橃、沈檀如大運言。 上從積言, 大運復爭之不得。 右議政許穆箚曰:
此科初試, 亦已多言。 圖改易書之事, 旣敗露, 而獨無形勢者一人得罪。 到今又有此可駭可愕之事, 國初以來所未有者, 不可使聞於四方後世。 今日國事, 可謂寒心。 朝政紊亂, 仕路汚濁, 科擧之弊, 又至此極, 必用重法治之, 諸犯罪者, 一一服罪, 然後人知畏法, 國事可爲也。 自古因慶設科, 或罷榜者, 自有古事, 照法施行幸甚。
答曰: "只罷會試事, 旣已參酌處之。 至於罷榜, 似過重, 卿其深思焉。" 大司諫趙威明、掌令李碩寬亦上疏, 請竝罷初試, 更設初、會試, 上皆不從。 諫院又論啓曰: "科場事體嚴重, 如有一毫濫雜, 則其爲淸朝之累大矣。 今此文科會試, 隨從現捉甚多。 此出於國綱之頹廢、士習之奸巧, 所當竝罷初試, 以嚴選擧。 況初試易書圖改, 現露被罪, 已甚冒濫, 則其所當罷, 豈但在於會試乎? 因其初試, 再設覆科, 此實國朝未有之事。 有志之士必將羞入試庭, 請亟罷初試。" 答曰: "只罷會試, 實念經費之罄竭, 不可撓改矣。" 累啓, 不允。 適儒生李㙊等上疏, 言崇陵展謁事, 因言此科不可不罷。 左議政權大運白于筵中曰: "我國用人, 惟科擧。 此路不正, 則何以爲國? 臺啓不竝請罷生進, 猶爲苟簡, 然若以盡罷爲難, 則寧從臺啓可矣。" 右議政許穆亦曰: "爲士者多不欲赴此科云, 此不可不罷。" 仍合辭力請不已, 上遂命罷初試。 大運曰: "雖未能光明正大, 而抑其次也。" 因請以秋間, 更設初、會試, 從之。 其用奸被囚者十六人等, 諸臣言者, 皆請痛治, 上曰: "近來士習駭愕。 人日事及初試易書圖改, 皆可痛也。 然不可待之以死矣。 其自服借書、代述者, 竝邊遠充軍, 勿揀赦前。 其不直招, 似有隱情者, 刑訊數次後, 亦同罪。"
- 【태백산사고본】 5책 6권 12장 A면【국편영인본】 38책 349면
- 【분류】인사-선발(選拔) / 사법-행형(行刑) / 왕실-국왕(國王) / 정론-간쟁(諫諍) / 정론-정론(政論) / 교육-인문교육(人文敎育)