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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종실록5권, 숙종 2년 12월 23일 신미 3번째기사 1676년 청 강희(康熙) 15년

변무사의 별단

변무사(辨誣使)의 별단(別單)에 이르기를,

"섬서(陝西)의 왕보신(王輔臣)은 이미 9월에 머리를 깎고 청국(淸國)에 항복하고 오삼계(吳三桂)가 준 인과(印顆)와 회갑(盔甲)을 바치고는 또 말하기를, ‘무슨 면목(面目)으로 다시 황제(皇帝)를 보겠는가?’ 하고, 밤에 스스로 목을 매었는데, 그의 처첩(妻妾) 및 자식들이 이를 깨닫고 끌러서 근근히 소생시켰다. 경정충(耿精忠)의 부자(父子)도 또한 항복하니, 정금(鄭錦)이 크게 성내어 글을 보내어 꾸짖고 군사를 일으켜 공격하였다. 상가희(尙可喜)는 병들어 죽고, 그 차자(次子) 상지효(尙之孝)가 봉작을 이어받으니, 장자(長子) 상지신(尙之信)이 성내어 그 매부(妹夫) 마화표(馬化豹)와 더불어 반란을 일으키고 조대수(祖大壽)의 손자 조택청(祖澤淸)과 가만히 연결하여 혜주(惠州)를 쳐서 함락시키니, 상지효도 또한 군사로 고전하다가 상지신과 더불어 연화(連和)하였다. 손연령(孫延齡)이 광동(廣東)을 침입하여 핍박하였고, 담(譚)씨 성을 가진 사람이 운양(鄖陽)에서 작란(作亂)하였다. 청나라 장수 사왕(四王)장사부(長沙府)를 공격하니, 오삼계의 장수 마보(馬寶)가 습격하여 크게 파하였다. 이때에 어떤 사람이 전하기를, ‘오삼계는 이미 죽었다.’고 해서 청나라 장수가 세작(細作)359) 을 시켜 정탐하다가 의 군사들에게 묶여서 장하(帳下)로 끌려갔다. 오삼계가 그가 온 뜻을 알고 드디어 풀어 보내면서 말하기를, ‘사람을 멀리 보내어 물으니 후의(厚意)에 많이 감사하다.’고 하였다. 5월 초1일에는 큰 바람소리가 우레와 같았고, 정양문(正陽門) 밖에는 집들이 무너졌으며, 사람과 가축도 날아갔다. 흠천감(欽天監)에서 아뢰기를, ‘요성(妖星)이 주성(主星)에 나타났으니 외신(外臣)이 가만히 들어올 것이므로 기찰(譏察)하기를 청합니다.’ 하였으나 청나라 황제가 따르지 아니하였다. 구문 제독(九門提督)이 간세(奸細)360) 를 단속하기 위하여 상민(商民)을 몰아내니, 청나라 황제가 크게 성내어 친히 펄쩍 뛰고, 크게 책벌(責罰)하였다. 오삼계의 병란이 있은 뒤로부터 요동(遼東)·심양(瀋陽)에서 갑군(甲軍)을 모두 조발(調發)하여 정남(征南)하는데 봉성(鳳城)에서는 군사를 보강했으며, 매월 갑군을 징발하여 압록강(鴨綠江)을 순시하면서, 칭탁해 말하기를, ‘해구(海寇)를 요찰(瞭察)한다.’고 하였으나 실제로는 우리 나라를 의심했던 것이다. 또 와전(訛傳)된 말에 조선(朝鮮)이 군사를 일으켜 온다고 하여 여리(閭里)가 의심하고 두려워한다고 하였다. 순치(順治) 8년361) 으로부터 팔고문(八股文)362) 으로 팔기(八旗)363) 의 자제(子弟)를 시험보아 뽑았는데, 만인(滿人)은 만문(滿文)으로 하고, 몽인(蒙人)은 몽문(蒙文)으로 하다가 이에 이르러 예부(禮部)에서 정지(停止)하기를 청하고, 무공(武功)을 장려한다고 한다. 청나라 황제가 국사(國事)를 돌보지 아니하고, 음희(淫嬉)만 날로 심하고 매양 사하궁(沙河宮) 빈후(嬪后)의 처소에 가서 운다고 하며, 화뢰(貨賂)364) 가 공공연하게 행해지는데, 관아(官衙)의 통역하는 무리들이 변무하는 일에 언급(言及)하며 이르기를 ‘2만금(二萬金)이 아니면 결단코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다.’ 하였다. 개주(蓋州)에 우리 나라 사람이 사로잡혀간 자가 수백 호(數百戶)가 있어 스스로 한 마을을 이루고 있는데, 서로 혼가(婚嫁)하면서 음식과 상장(喪葬)·요속(謠俗)이 아직도 우리의 제도가 존속되어 있다고 하였다."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4책 5권 49장 B면【국편영인본】 38책 341면
  • 【분류】
    외교-야(野)

  • [註 359]
    세작(細作) : 간첩(間諜).
  • [註 360]
    간세(奸細) : 간첩(間諜).
  • [註 361]
    순치(順治) 8년 : 1651 효종 2년.
  • [註 362]
    팔고문(八股文) : 명(明)나라 중엽(中葉) 이후 관리 등용 시험에 쓰던 문체(文體). 그 결구(結構)는 대구법(對句法)에 의하여 여덟으로 나뉨.
  • [註 363]
    팔기(八旗) : 청(淸)나라의 병제(兵制)의 일대 조직(一大組織). 태조(太祖)가 제정한 것으로 총군(總軍)을 기(旗)의 빛깔에 따라 편제(編制)한 여덟 부대(部隊). 곧 정황(正黃)·정백(正白)·정홍(正紅)·정람(正藍)·양황(鑲黃)·양백(鑲白)·양홍(鑲紅)·양람(鑲藍).
  • [註 364]
    화뢰(貨賂) : 뇌물.

○辨誣使別單云:

陝西 王輔臣已於九月剃髮, 降款于淸國, 納吳三桂所授印顆盔甲。 且曰: ‘何面目, 復見皇帝?’ 夜自縊, 其妻妾及子覺之, 救解僅甦。 耿精忠父子亦降, 鄭錦大怒, 移書責之, 擧兵攻之。 尙可喜病死, 以其次子之孝襲封, 長子之信怒, 與其妹夫馬化豹同叛, 句連祖大壽之孫澤淸, 攻陷惠州, 之孝亦苦兵, 與之信連和。 孫延齡侵逼廣東, 譚姓人作亂鄖陽四王長沙府, 馬寶襲擊大破之。 時, 或傳三桂已死, 將使細作探之, 兵縛致之帳下, 三桂認其來意, 遂解遣曰: ‘送人遠問, 多謝厚意。’ 云。 五月初一日, 大風聲如雷, 正陽門外家舍傾倒, 人畜飛去。 欽天監奏: "妖星見主, 外臣私入, 請譏察。" 皇不從。 九門提督爲撿奸細, 驅逐商民, 皇大怒, 親踢之, 厚加責罰。 自兵後, 甲軍, 皆調發征南, 而鳳城則又復添兵, 每月發甲軍, 巡視鴨江以下, 託言瞭察海寇, 而實疑我國。 且訛言朝鮮擧兵來, 閭里疑懼云。 自順治八年, 以八股文, 試取八旗子弟, 而滿人滿文, 蒙人文, 至是禮部請停之, 以勵武功云。 皇不恤國事, 淫嬉日甚, 每往哭沙河宮殯后之所, 貨賂公行。 衙譯輩言及辨誣事曰: "非二萬金, 決不成。" 云。 盖州有我人被擄者數百戶, 自成一村, 相與婚嫁, 言語飮食、喪葬謠俗, 尙存我制云。


  • 【태백산사고본】 4책 5권 49장 B면【국편영인본】 38책 341면
  • 【분류】
    외교-야(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