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승 처경을 복주하다
요승(妖僧) 처경(處瓊)이 복주(伏誅)되었다. 처경은 평해군(平海郡)의 아전 손도(孫燾)의 아들이다. 용모는 자못 청수(淸秀)한 듯하나, 성질이 간교(奸巧)하고 사특하였다. 신해년340) 에 그 스승을 버리고 기전(畿甸)을 떠돌아 다니면서 자칭(自稱) 신승(神僧)이라 이르고 궤변(詭辯)으로 ‘곡식을 끊었다.’ 하고는 밤에 암혈(岩穴)에 들어가서 가만히 떡과 고기를 먹었으며, 또 여거사(女居士)341) 로 나이 젊은 자를 꾀어서 불경(佛經)을 가르친다 칭탁하고 간음(奸淫)을 자행하였다. 또 작은 옥(玉)으로 만든 불상(佛像)을 가지고 있으면서 선전하여 말하기를, ‘무릇 빌어서 구(求)하는 바 있으면,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 없다.’고 하였다. 이렇게 함으로써 어리석은 백성들이 물결처럼 달려가 생불(生佛)이라 일컬었고, 여러 궁(宮)의 나인(內人)들이 공불(供佛)하기 위해 사찰(寺刹)에 왕래(往來)하는 자들도 존신(尊信)하지 않는 자가 없어서 혹은 그와 더불어 사통하는 자도 있었다. 여거사로서 묘향(妙香)이라는 사람이 있었으니, 그는 곧 경성(京城) 사부(士夫) 집의 여종이었다. 일찍이 소현 세자(昭顯世子)의 유복자(遺腹子)가 물에 던져졌다는 말을 듣고는 곧 처경에게 말하기를, ‘소현 세자의 유복자가 혹은 물에 던져졌다고도 하고, 혹은 생존해 있다고도 말하는데, 이제 스승님의 얼굴이 매우 청수하여 왕자(王子)·군(君)의 얼굴 모습과 비슷하니, 혹시 그렇지 않습니까?’ 하였다. 처경이 이를 듣고 간사한 마음이 싹텄는데, 뒤에 복창군(福昌君)의 집안의 사람으로 공불 오는 자로 인하여 그 때의 일을 자세히 들었고, 또 요술(妖術)을 끼고 소민(小民)들의 미혹함을 얻고는 마음속으로 국가도 속일 수 있다고 여겨 드디어 왜능화지(倭菱花紙)를 일부러 더럽히고 언문으로 글을 써서 이르기를, ‘소현 유복자, 을유 4월 초 9일생’이라 하고, 그 아래에 또 ‘강빈(姜嬪)’이라는 두 글자를 썼다. 그리고 나서 영의정(領議政) 허적(許積)의 집에 가서 울면서 그 종이를 보이고 말하기를, ‘이는 곧 강빈의 수적(手迹)입니다. 매양 외구(畏懼)하는 생각을 품고 감히 내어놓지 못하였는데, 지금 성대(聖代)를 만나서 감히 와서 뵙니다.’ 하니, 때마침 허적(許積)은 병으로 정고(呈告) 중에 있었고, 좌의정(左議政) 권대운(權大運)이 청대(請對)하고 임금에게 아뢰기를, ‘작일(昨日)에 영상(領相)이 여러 재신(宰臣)과 더불어 그 글을 보고 그 사람을 힐문해 보았는데, 모두 다 말하기를, 「소현의 상(喪)이 4월 26일에 있었는데, 여기에는 4월 초 9일에 낳았다 하고 유복(遺腹)이라고 일컬었으니, 이미 크게 틀렸고, 또 강빈이라는 칭호도 그 당시에 일컬었던 바가 아니며, 그 글씨의 자획(子劃)도 분명히 상한(常漢)이 쓴 것인 데다가 그 음(音)을 따라 오서(誤書)한 것이 많아서 더욱 의심스러웠다.」고 합니다.’ 하니, 임금이 2품 및 삼사(三司)의 여러 신하들의 회합을 명령하고, 처치할 방도를 물었던 바, 모두 시험삼아 추문할 것을 청하므로, 곧 시임(時任)·원임(原任)의 대신(大臣)과 육경(六卿)·삼사(三司)로 하여금 훈련 도감(訓鍊都監) 북영(北營)에서 회동하여 추핵(推覈)하도록 하니, 이는 외인(外人)으로 하여금 모두 듣고 알게 하려고 한 것이다. 처경이 공술(供述)하기를, ‘당초에는 거짓 물에 던졌다고 속이고 다만 담았던 궤(櫃)만을 던지고는 가만히 내 몸을 뽑아내어 궁인(宮人) 정씨(丁氏)로 하여금 묘향에게 내주어서 숨겨두고 기른 지 10여 년에 묘향이 체발(剃髮)케 한 것입니다.’ 하였고, 묘향은 공사(供辭)에서 이르기를, ‘처음에 처경을 보니, 당시에 처경은 이미 삭발하여 중이 되어 있었고, 그가 신이(神異)하다는 말을 듣고 스승으로 섬겼으며, 이름을 묘향이라 한 것도 역시 처경이 명한 것입니다.’ 하였다. 함께 면질(面質)을 시켰더니, 처경이 말이 막히는 데도 오히려 불복(不服)하였다. 판의금(判義禁) 유혁연(柳赫然)이 포청 군관(捕廳軍官)으로 하여금 그의 바랑 속을 뒤져서 그의 친척(親戚)과 서로 통한 편지에서 성명(姓名)을 상고할 수 있는 것을 얻어내고, 또 능화지에 위서(僞書)할 때의 초본(草本) 수건(數件)을 얻어내어 간사한 정상이 모두 드러나서 비로소 실토(實吐)하므로 드디어 그 친척과 서신을 통한 자들을 잡아와서 그가 손도의 아들인 것을 물어서 알게 되었는데, 그 생년(生年)은 임진년342) 이었다. 손도와 그 아내는 이미 다 죽었고, 처경의 외삼촌[舅父] 및 그의 스승 지응(智膺)을 잡아다가 처경으로 하여금 보게 하였더니, 처경이 눈을 감고 보지 아니하였다. 사람을 시켜서 그의 눈을 억지로 뜨게 하고 물으니, 처경이 비로소 응답하기를, ‘과연 스승이요, 과연 외숙(外叔)입니다.’ 하였다. 드디어 목을 베었는데, 묘향은 형신(刑訊)받다 죽었으며, 처경과 더불어 교결(交結)하고 용접(容接)한 자는 모두 유배(流配)시켰다. 그리고 포도 군관으로 바랑 속에서 글을 찾아낸 자는 논상(論賞)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4책 5권 46장 A면【국편영인본】 38책 340면
- 【분류】사법-행형(行刑) / 사법-치안(治安) / 사상-불교(佛敎) / 인물(人物) / 왕실-종친(宗親)
- [註 340]
○朔己卯/妖僧處瓊伏誅。 處瓊, 平海郡吏孫燾之子也。 容貌頗似淸秀, 性奸巧邪慝。 歲辛亥, 棄其師, 雲遊畿甸, 自稱神僧, 詭云絶粒, 而夜入巖穴, 潛啗餠肉。 又誘女居士年少者, 託以敎誨佛經, 恣行奸淫。 又持小玉佛宣言: "凡有禱求, 無不獲遂。" 以此愚氓奔波, 稱之以生佛。 諸宮內人, 以供佛往來寺刹者, 莫不尊信, 或與之有私。 有女居士妙香, 乃京城士夫家婢也。 嘗聞昭顯世子遺腹子投水之說, 乃謂瓊曰: "昭顯遺腹子, 或言投水、或言生存。 今師貌甚淸秀, 似王子君貌樣, 無乃是耶?" 瓊聞之, 遂萠奸心, 後因福昌君家內人供佛者, 細聞其時事, 且挾妖術, 得小民迷惑, 意謂國家亦可欺。 遂取故汚倭菱花紙, 以諺書書曰: "昭顯遺腹子, 乙酉四月初九日生。" 其下又書姜嬪二字, 往于領議政許積家, 泣示其紙曰: "此乃姜嬪手迹也。 每懷畏懼不敢出。 今逢聖代, 敢來謁。" 時, 積呈病。 左議政權大運請對白上曰: "昨日領相與諸宰觀其書, 詰其人, 皆以爲: ‘昭顯之喪, 在四月二十六日。’ 此云四月初九日生, 而稱遺腹, 已大謬。 且姜嬪之號, 非其時所稱。 且其書字畫, 分明是常漢所寫, 而從其音誤書者, 多尤可疑也。" 上命會二品及三司諸臣, 問處置之道, 皆請試爲驗問。 乃令時任、原任、六卿、三司, 會同推覈於訓鍊都監北營, 蓋欲使外人, 皆得聞知也。 瓊納供曰: "當初詐爲投水, 而只投所盛之櫃, 潛拔我身, 使宮人丁氏, 出給妙香, 隱置養育, 年十餘, 妙香使之剃髮云。" 妙香供辭則曰: "初見處瓊時, 瓊已削髮爲僧, 而聞其神異, 以師事之。 名以妙香, 亦瓊之所命云。" 使與面質, 瓊語塞, 猶不服。 判義禁柳赫然使捕廳軍官, 搜其橐中, 得渠親戚相通書, 姓名可考, 又得僞書菱花紙。 時, 草本數件, 奸情畢露, 始乃吐實。 遂捉致其親戚通書者, 問知其爲孫燾之子, 而生年則壬辰也。 時, 燾及其妻皆已死, 乃得瓊母舅及其師智膺, 使瓊見之, 瓊合眼不視。 使人批開其目而問之, 瓊乃應之曰: "果師也。 果外叔也。" 遂誅之。 妙香斃於刑訊, 與瓊交結容接者皆流配。 捕盜軍官之搜得橐中書者, 論賞。
- 【태백산사고본】 4책 5권 46장 A면【국편영인본】 38책 340면
- 【분류】사법-행형(行刑) / 사법-치안(治安) / 사상-불교(佛敎) / 인물(人物) / 왕실-종친(宗親)