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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종실록5권, 숙종 2년 4월 13일 을축 1번째기사 1676년 청 강희(康熙) 15년

대신과 비국의 여러 신하를 인견하여 군제 변통에 대해 의논하다

대신(大臣)과 비국(備局)의 여러 신하를 인견(引見)하였다. 영의정(領議政) 허적(許積)이 말하기를,

"새로운 출신(出身)이 그 많기가 1만 4천여 명에 이르니, 만약 모두 부방(赴防)하게 한다면 이제 변경이 흉년으로 굶주리는 날을 당하여 반드시 주객(主客)이 함께 곤궁하게 되는 근심이 있을 것이므로, 자원(自願)하는 데에 따라 부방(赴防)을 면제하고, 적당하게 헤아려 곡식을 받아서 군수(軍需)에 보충하는 것만 같지 못합니다."

하니, 임금이 이를 옳게 여겨, 곧 도성(都城)과 기내(畿內)로 하여금 쌀 5석을 경창(京倉)과 강화(江華)에 바치게 하고, 먼 도(道)는 각각 그 근처의 해변(海邊)의 창고에 수납(收納)하여 강도(江都)와 대흥산성(大興山城)으로 옮기게 하며, 땅이 궁벽한 산간 고을로서 쌀 운반이 어려우면 면포(綿布) 15필을 경사(京司)에 바치게 하되, 금년 안으로 모두 바치게 하며, 가난하여 바칠 수 없는 자는 부방하게 하였다. 허적이 또 말하기를,

"무과 출신(武科出身)으로 부대(部隊)를 만드는 것은 옛 제도인데, 오래 그만두었다가 행하기 때문에 새로 무과에 합격한 무리가 나라를 원망하는 마음이 없지 아니합니다. 또 체부(體府)에만 유독 이 일이 있고, 다른 군문(軍門)에는 부대를 만드는 일이 없기 때문에 체부에 예속된 자가 치우치게 괴롭다는 원망이 있으니, 사체를 헤아려 보면 또한 부당할 듯합니다. 그러니 여러 군문에도 모두 체부와 같이 부대를 만드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자, 좌의정(左議政) 권대운(權大運)이 말하기를,

"이전의 〈구방(舊榜)〉 출신(出身)은 편히 앉아서 아무 일이 없었는데, 홀로 신방(新榜)만 이와 같이 부대를 만드는 일이 있으니, 원망이 없기를 바라기가 어렵겠습니다."

하였다. 허적이 말하기를,

"그러면 신·구방(新舊榜)을 물론하고 고례(古例)에 의하여 모두 부대를 만드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가 그 뒤에 마침내 행하지 아니하였다. 이에 앞서 청인(淸人)으로서 강변(江邊)을 순시한 자가 의주 훈도(義州訓導) 정방립(鄭霶立)에게 말하기를,

"해주위(海州衛) 근처에 큰 섬이 있는데, 섬 가운데 요즈음 징과 북소리가 있으니, 당신도 들었는가? 지금 우려할 만한 일이 많이 있으니, 당신 나라도 모름지기 이를 조심할 것입니다."

하고, 그 무리가 또 귀에 입을 붙이고 서로 고하기를,

"어떤 이가 이르기를, ‘경왕(耿王)이 그 섬 안에 있다.’고 한다."

하자, 정방립이 이것을 의주(義州)에 돌아가서 보고하였다. 관찰사(觀察使) 민종도(閔宗道)가 사유를 갖추어 치계(馳啓)하여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해방(海防)의 융무(戎務)를 지휘하여 불의(不意)의 변(變)에 대비케 하기를 청하였는데, 허적이 임금에게 아뢰기를,

"청컨대, 비국(備局)의 쌀 운반선(運般船)을 연해(沿海)의 신설한 진(鎭)에 주고, 또 서울 군문(軍門)으로 하여금 기계(器械)를 보내어 이를 돕게 하소서."

하고, 또 말하기를,

"선천 부사(宣川府使) 양일한(楊逸漢)은 바야흐로 육군 방어(陸軍防禦)의 임무를 겸하고 있는데, 매우 명민(明敏)하고 일에 밝으니, 해방(海防)을 겸관(兼管)하게 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니, 임금이 곧 사람을 시켜 양일한에게 별유(別諭)하여 힘쓰라는 뜻을 갖추어 보였는데, 뒤에 끝내 그 실적이 없었다. 김석주(金錫胄)가 임금에게 아뢰기를,

"새로 설치한 신광(神光)·우현(牛峴)·시채(恃寨) 세 진(鎭)에 첨사(僉使)를 두고 또 만호(萬戶)를 차령(車嶺)에 두소서."

하였는데, 관서(關西)의 요지(要地)이기 때문이었다. 허적유혁연(柳赫然)이 또 백치(白峙)에 진(鎭)을 두고 조금 두서가 잡히기를 기다려서 첨사 한 사람을 둔 뒤에 성을 쌓을 것을 청하였는데, 임금이 모두 그대로 따랐다. 허적이 임금에게 아뢰기를,

"중원(中原)은 도독(都督)이 모든 군사(軍事)를 안팎없이 주관하는데, 우리 나라는 체부(體府)가 단지 외병(外兵)만 관장합니다. 만약 난리를 당하여 수가(隨駕)하면 어영(御營)과 훈국(訓局)을 논할 것 없이 아울러 총관(總管)할 수 있으나, 일이 없는 날에는 연하(輦下)의 친병(親兵)은 절제(節制)할 수 없습니다. 고례(古例)가 또한 이와 같습니다."

하자, 김석주가 금려(禁旅)는 체부(體府)에 소속시킬 수 없음을 힘써 말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만일 사변이 있으면 절제(節制)하는 것이 가하지만 평상시에는 그럴 필요가 없으니, 이대로 행하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그 뒤에 체부 종사관(體府從事官) 이담명(李聃命)이 강석(講席)에 입시(入侍)하여 양국(兩局)139) 을 도로 체부에 소속시킬 것을 청하자, 김석주가 다시 굳게 다투며 불가하다고 하여 일이 마침내 시행되지 못하였다. 이때 체부에 대한 의논은 대저 이정(李楨)·이남(李柟)이 중권(重權)을 총관하기 위한 계책이었는데, 반드시 허적으로 하여금 중외(中外)를 모두 통솔하게 하려고 한 것은 허적남(柟)의 무리의 외원(外援)이 되기 때문이요, 김석주가 속으로 깊은 근심을 품은 것은 바야흐로 허적 등을 몰래 도모하려고 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다투기를 이와 같이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4책 5권 20장 B면【국편영인본】 38책 327면
  • 【분류】
    왕실-경연(經筵) / 정론-간쟁(諫諍) / 군사-군정(軍政) / 군사-부방(赴防) / 군사-관방(關防) / 재정-국용(國用) / 재정-창고(倉庫) / 행정-중앙행정(中央行政) / 역사-사학(史學)

  • [註 139]
    양국(兩局) : 어영청(御營廳)과 훈련 도감(訓鍊都監).

○乙丑/引見大臣、備局諸臣。 領議政許積曰: "新出身多至萬四千餘人, 若盡令赴防, 則當此邊塞飢荒之日, 必有主客俱困之患。 不如從自願除赴防, 量宜捧穀, 以補軍需之爲愈。" 上可之。 乃令都城及畿內納米五石于京倉與江華, 遠道則輸納於各其近處海倉, 移轉于江都及大興山城。 他僻山郡, 難於運米, 則以綿布十五疋, 納于京司, 限歲前畢納, 而貧不能辦者赴防。 又曰: "武出身作隊古制, 而以其行於久廢之餘, 故新出身輩不無怨國之心。 且體府獨有此擧, 而他軍門無作隊之事, 故隷於體府者, 有偏苦之怨, 揆以事體, 亦似不當。 諸軍門, 竝依體府作隊爲可。" 左議政權大運曰: "曾前出身, 安坐無事, 而獨新榜有此作隊之擧, 求其無冤難矣。" 曰: "然則勿論新舊榜, 依古例宜竝作隊。" 上從之。 其後竟不行。 先是, 淸人之巡視江邊者, 言于義州訓導鄭霶立曰: "海州衛近處有大島, 島中近有錚鼓聲, 爾亦聽之否? 目今多有可慮事, 爾國亦須愼之。" 其徒又附耳相告曰: "或云耿王在其島中。" 霶立以此歸報于義州, 觀察使閔宗道具由馳啓, 請令廟堂指揮海防戎務, 以備不虞。 白于上, 請給備局運米船於㳂海新設鎭, 又使京軍門送器械助之。 且言: "宣川府使楊逸漢方兼陸軍防禦之任, 而頗明敏曉事, 宜令兼管海防。" 上卽令別諭于逸漢, 備示奬勉之意, 後終無實。 金錫冑白上, 新設神光牛峴恃寨三鎭置僉使, 且置萬戶於車嶺, 以其關西要地也。 柳赫然又請設鎭於白峙, 待其稍成頭緖, 置僉使一人後築城, 上竝從之。 白上曰: "中原則都督諸軍事, 無內外主之, 而我國則體府只察外兵。 若當亂隨駕, 則無論御營、訓局, 竝可總管, 而無事之日, 則輦下親兵, 不可節制, 古例亦如此矣。" 錫冑力言禁旅不可屬諸體府, 上曰: "脫有事變, 節制可也, 常時不必然矣。 依此行之可也。" 其後, 體府從事官李聃命入侍講席, 請以兩局還屬體府, 錫冑復固爭以爲不可, 事竟不行。 時, 體府之議, 蓋以爲總重權之計, 而必欲令咸統中外者, 以輩外援故也。 錫冑內懷深憂, 方陰圖等故, 爭之如此。


  • 【태백산사고본】 4책 5권 20장 B면【국편영인본】 38책 327면
  • 【분류】
    왕실-경연(經筵) / 정론-간쟁(諫諍) / 군사-군정(軍政) / 군사-부방(赴防) / 군사-관방(關防) / 재정-국용(國用) / 재정-창고(倉庫) / 행정-중앙행정(中央行政) / 역사-사학(史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