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광수·윤인미에게 증직하고, 허적이 이조 판서 윤휴의 잘못을 논하다
대신(大臣)과 비국(備局)의 여러 신하를 인견(引見)하였다. 허적(許積)이 소매에서 한 장의 소장(疏章)을 내어 놓았는데, 바로 윤휴(尹鑴)가 심광수(沈光洙)·윤인미(尹仁美)·이유(李𣞗)를 추장(追奬)하고 증직(贈職)하기를 청하는 일이었다. 허적이 말하기를,
"심광수는 예우(禮遇)하는 신하로서 예론(禮論)으로 인하여 폐고(廢錮)되어 죽었으니, 포증(褒贈)할 만합니다."
하자, 허목(許穆)이 말하기를,
"신의 뜻도 같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증직(贈職)하라."
하였다. 허적이 말하기를,
"윤인미(尹仁美)는 윤선도(尹善道)의 아들인데, 아름다운 선비로서 글을 잘하지만, 윤선도 때문에 분관(分館)975) 을 허락하지 아니하였으니, 일이 진실로 놀랄 만하나, 증직은 명분이 없습니다."
하자, 민암(閔黯)이 말하기를,
"당(唐)나라 나은(羅隱)과 방간(方干)은 죽은 뒤에 급제(及第)를 주었는데, 윤인미(尹仁美)는 마땅히 맡겨야 할 벼슬을 맡기지 아니하였으니, 분관(分館)의 벼슬을 증직하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하고, 오정위(吳挺緯)와 허목은 모두 특별히 증직하는 것이 가하다고 하였는데, 허적이 아뢰기를,
"신의 뜻은 그렇지 아니합니다. 민암(閔黯)의 말이 옳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분관(分館)의 벼슬을 증직하라."
하였다. 허적이 말하기를,
"이유(李𣞗)는 사인(士人)으로서 형(刑)을 받고 정배(定配)되어 죽었으니, 비록 예(禮)를 논쟁한 데에서 나온 것이라 하더라도 또한 그 나쁜 한 조카[惡姪]가 있기 때문입니다."
하자, 윤휴가 아뢰기를,
"이유(李𣞗)는 경개(耿介)한 사람인데, 예(禮)를 논하여 세상을 거슬린 것으로 곤액(困阨)을 당하여 죽었으니, 만약 살았다면 반드시 수록(收錄)을 입었을 것입니다. 증직(贈職)하는 것이 무슨 불가함이 있겠습니까?"
하였다. 이동규(李同揆)가 말하기를,
"국체(國體)로서 말하면 그 조카는 마땅히 사예(四裔)976) 에 물리쳐야만 하니, 이유(李𣞗)를 증직하는 것은 신도 그 온당함을 알지 못하겠습니다."
하니, 허적이 말하기를,
"이유가 만약 살아 있다면 수록(收錄)할 수 있지만, 증직은 옳지 않습니다. 그 조카가 진실로 무상(無狀)하나, 지금 추죄(追罪)할 수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후일에 상의하여 처리하라."
하였다. 허적이 말하기를,
"이조(吏曹)에 잘못이 있어서 신이 마땅히 윤휴를 대하여 진언(陳言)하겠습니다. 이복(李馥)이 윤휴를 추고(推考)할 것을 청하자, 그 뒤에 윤휴가 대망(臺望)977) 에 주의(注擬)하지 아니하였고, 강여호(姜汝㦿)는 윤휴를 추고할 것을 진계(陳啓)하는 데 교묘히 피하고 참여하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마땅히 벌(罰)이 있어야 할 것인데, 곧 수찬(修撰)에 주의(注擬)하였으니, 모두 지극히 온당하지 못합니다. 어제 신경윤(愼景尹)을 대망(臺望)에 주의(注擬)하였는데, 신경윤은 세루(世累) 때문에 벼슬길이 막혔던 사람입니다. 그리고 권기(權愭)의 대망은 더욱 온당하지 못하니, 권기는 명망이 있는 아버지의 아들로서 사람됨이 용렬하고 비루하여 대론(大論)이 일어나자 앞뒤에 그 말을 변환(變幻)하였으니, 사판(仕版)에 두기가 어려운데, 어찌 대망(臺望)에 주의(注擬)할 수 있겠습니까? 윤휴가 대간(臺諫)을 가리지 않는 것이 이와 같으니, 기타 주의(注擬)의 마땅하지 못한 것은 어찌 다 말할 수 있겠습니까?"
하자, 윤휴가 말하기를,
"이복(李馥)이 사간(司諫)이 된 것은 신이 참으로 주의(注擬)하였는데, 뒤에 듣건대, 일찍이 송시열(宋時烈)을 붙좇았다 하여 비방이 있었기 때문에 주의하지 아니한 것이지 추고(推考)할 것을 청하였기 때문에 막은 것은 아닙니다. 강여호(姜汝㦿)는 정창후(鄭昌後)에게 죄가 없다고 생각하고 진계하는 데 참여하지 아니하려고 하였으니, 이것도 혹 일도(一道)인데, 이로써 도리어 청망(淸望)을 막는 것을 신은 옳은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신경윤(愼景尹)은 사람들이 말하기를, ‘그 양부(養父)가 폐모소(廢母疏)에 참여하였고, 김익경(金益炅)이 이를 증명하였다.’고 하지만, 마침내 증거될 만한 글이 없었습니다. 신은 본래 그가 재주있음을 알았고, 세루(世累)는 명백하지 아니하기 때문에 이를 썼습니다. 권기(權愭)는 신과 더불어 인척(姻戚) 관계이므로 그 순직(淳直)함을 아는데, 어찌 실언(失言)한 것으로써 이를 폐하겠습니까?"
하고, 허적이 말하기를,
"윤휴가 나이 늙은 무인(武人)을 잇달아 수령(守令)으로 제수하였는데, 이것도 마땅치 못합니다. 대관(臺官)이 그 수령을 바꿀 것을 논청하려고 하면서도 윤휴가 노여워할 것을 두려워하여 실행하지 못한다고 합니다."
하자, 윤휴가 말하기를,
"조정에서는 노성(老成)한 사람을 써야 마땅합니다."
하고, 허적가 말하기를,
"노성한 사람을 쓰는 것이 어찌 쇠패(衰敗)한 무부(武夫)를 가리켜서 말하는 것이겠습니까? 매사를 스스로 옳다고 여기니, 윤휴의 고집이 이와 같습니다."
하자, 윤휴가 이판(吏判)을 사임하니, 허적이 말하기를,
"윤휴의 뜻은 신의 말을 그 관직을 바꾸려고 하는 것으로 생각하니, 심히 가소(可笑)롭습니다."
하였다. 윤휴가 아뢰기를,
"척리(戚里)가 군사를 거느리는 것은 마침내 성세(盛世)의 일이 아닙니다."
하자, 허적이 말하기를,
"윤휴의 말은 진실로 정당하나, 당초에 임명하게 한 자는 신입니다. 임금이 어리고 나라가 위태로울 때에 외척(外戚)도 군사를 거느리는 것은 여급(呂伋)의 일에서도 또한 볼 수 있습니다."
하였는데, 윤휴가 말하기를,
"외척이 군사를 거느리면 그 해(害)를 받지 아니하는 일이 없었습니다. 이제 마땅히 후세(後世)의 법을 써야 할 것이니, 사직하는 것을 인하여 허락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니, 허적이 말하기를,
"윤휴의 말이 엄정(嚴正)합니다."
하였다. 이동규가 말하기를,
"여급(呂伋)의 일은 삼대(三代) 위의 일이므로, 본받을 것이 못됩니다. 또 신이 광성(光城)에게 매우 개연(慨然)한 바가 있습니다. 신의 집은 광성과 더불어 한 하늘 밑에 같이 살 수 없는 원통함이 있는데, 광성은 일찍이 한마디 말도 복수(復讐)하는 데 미치지 아니하고, 오로지 부귀만 보전하려고 하니, 어찌 광성에게 바라는 바이겠습니까?"
하자, 윤휴가 말하기를,
"광성은 빈청(賓廳) 회의에서 홀로 죄를 받지 아니하였으니, 지금 그가 사직한 것을 인하여 체직(遞職)하도록 허락하면, 사체(事體)가 마땅함을 얻고 광성 또한 편할 것입니다."
하였는데, 허적이 말하기를,
"군사를 거느리는 것과 예(禮)를 논하는 것은 다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훈척(勳戚)도 군사를 거느린 때가 있었다."
하였다. 윤휴가 말하기를,
"《변간록(辨奸錄)》을 옥당(玉堂)의 여러 신하들로 하여금 찬술(撰述)해 내도록 하였는데, 오정창(吳挺昌)도 같이 찬술하도록 할 만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동규(李同揆)와 같이 하도록 하라."
하였다. 임금이 허적에게 이르기를,
"여러 신하들로 하여금 한 장의 글을 지어 올리도록 하려고 하는데, 어떻겠는가?"
하니, 허적이 아뢰기를,
"좋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두 개의 제목(題目)을 써서 내렸는데, 첫째는 ‘중화(中和)에 이르게 하는 잠(箴)’이라고 하였고, 둘째는, ‘순(舜)이 칠기(漆器)를 만들고, 우(禹)가 그 조(俎)를 조각하니, 간(諫)하는 사람이 십여 명이었다.’고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옥당(玉堂)의 상번(上番), 하번(下番) 및 승지(承旨)로 하여금 지어서 올리게 하라."
하였는데, ‘중화에 이르게 하는 잠(箴)’에서는 강석빈(姜碩賓)이 수석(首席)이 되었고, ‘순이 칠기(漆器)를 만들었다.’에서는 정창도(鄭昌燾)가 수석이 되었다. 각기 호피(虎皮)를 하사하고, 그 나머지는 필묵(筆墨)을 하사하였는데, 차등이 있었다.
- 【태백산사고본】 3책 4권 72장 A면【국편영인본】 38책 315면
- 【분류】왕실-국왕(國王) / 왕실-사급(賜給) / 정론-간쟁(諫諍) / 인사-관리(管理) / 인물(人物) / 사법(司法) / 군사(軍事) / 출판-서책(書冊)
- [註 975]분관(分館) : 조선조 때 새로 문과에 급제한 사람을 승문원(承文院)과 성균관(成均館)·교서관(校書館)에 배치시켜 권지(權知)라는 이름으로 실무(實務)를 익히게 하던 일.
- [註 976]
사예(四裔) : 사방의 먼 변경.- [註 977]
대망(臺望) : 대간(臺諫)의 의망(擬望)에 든 사람.○丙寅/引見大臣、備局諸臣。 許積袖出一疏, 乃尹鑴請沈光洙、尹仁美、李𣞗追奬贈職事也。 積曰: "光洙以禮遇之臣, 因論禮廢錮而沒, 可褒贈。" 許穆曰: "臣意亦同。" 上曰: "贈職。" 積曰: "仁美, 善道之子, 佳士能文, 而以善道之故, 不許分館, 事固可駭, 而贈職則無名。" 閔黯曰: "唐之羅隱、方干, 死後賜第。 仁美不付當付之職, 贈以分館之官似宜矣。" 挺緯、許穆皆以特贈爲可。 積曰: "臣意不然。 黯言是。" 上曰: "贈分館之官。" 積曰: "𣞗以士人, 受刑定配而死。 雖曰出於爭禮, 而亦以其有惡姪也。" 鑴曰: "𣞗耿介人也。 以論禮忤世, 困阨而死。 若生則必蒙收錄, 贈職有何不可?" 李同揆曰: "以國體言之, 其姪宜逬四裔, 而𣞗之贈職, 臣亦未知其穩當。" 積曰: "𣞗若生存, 可以收錄, 而贈職則不可。 其姪固無狀, 而今不可追罪。" 上曰: "後日商議處之。" 積曰: "吏曹有失, 臣當對鑴陳之。 李馥請推尹鑴, 而其後鑴不擬臺望; 姜汝㦿於推鑴之啓, 巧避不參, 此當有罰, 而卽擬修撰, 俱極未安。 昨以愼景尹擬臺望, 景尹初以世累被塞人也。 權愭臺望, 尤未安。 愭以名父之子, 爲人庸陋, 大論之發, 前後變幻其說。 置諸仕版難矣, 何可擬於臺望乎? 鑴之不擇臺諫如此, 其他注擬之失當, 何可盡言?" 鑴曰: "馥之爲司諫, 臣實擬之。 後聞以曾附時烈, 多有訾毁, 故不擬, 非以請推而塞之也。 汝㦿以鄭昌後爲無罪, 不欲參啓, 是或一道, 以此還塞淸望, 臣未知其可也。 景尹則人言其養父參廢母疏, 金益炅證之, 而終不得可據之文。 臣素知其有才, 世累不明白, 故用之。 愭, 臣與之連姻, 知其淳直, 何可以失言廢之也?" 積曰: "鑴以年老武人, 連除守令, 此亦不當。 臺官欲論遞其守令, 而畏鑴怒, 不果云矣。" 鑴曰: "朝廷當用老成人。" 積曰: "用老成, 豈指衰敗武夫而言也? 每事自以爲是, 鑴之固執如此。" 鑴辭吏判。 積曰: "鑴意以臣言, 欲遞其職, 甚可笑也。" 鑴曰: "戚里將兵, 終非盛世事。" 積曰: "鑴之言, 固正矣, 而當初任之者臣也。 主少國危之時, 外戚亦將兵, 呂伋事, 亦可見也。" 鑴曰: "外戚將兵, 未有不受其害者。 今當用後世法, 因其辭而許之可矣。" 積曰: "鑴之言嚴正。" 同揆曰: "呂伋事, 乃三代之事, 非可法。 且臣於光城, 深有慨然。 臣家與光城, 俱有不共戴之冤, 而光城則未嘗一言及於復讎, 專欲保全富貴, 豈所望於光城者乎?" 鑴曰: "光城於賓廳會議, 獨不被罪。 今因其辭許遞, 則事體得宜, 而於光城亦便。" 積曰: "將兵與論禮, 異矣。" 上曰: "勳戚亦有將兵時矣。" 鑴曰: "《辨奸錄》使玉堂諸臣撰出矣。 吳挺昌亦可使之同撰。" 上曰: "與李同揆一體爲之。" 上謂積曰: "欲使諸臣, 製進一文何如?" 積曰: "好矣。" 上書下二題, 一曰: "致中和箴", 二曰: "舜造漆器, 禹雕其俎, 諫者十餘。" 上曰: "使玉堂上下番及承旨製進。" 致中和箴, 姜碩賓爲首; 舜造漆器, 丁昌燾爲首, 各賜虎皮, 其餘賜筆墨有差。
- 【태백산사고본】 3책 4권 72장 A면【국편영인본】 38책 315면
- 【분류】왕실-국왕(國王) / 왕실-사급(賜給) / 정론-간쟁(諫諍) / 인사-관리(管理) / 인물(人物) / 사법(司法) / 군사(軍事) / 출판-서책(書冊)
- [註 97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