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광 별시 문과에서 이봉징 등 34명을 뽑다
증광 별시 문과(增廣別試文科)872) 에서 이봉징(李鳳徵) 등 34명을 뽑았다.
이때 시관(試官)이 거자(擧子)와 서로 악속을 하고, 혹은 시관이 그 하인(下人)으로 하여금 몰래 유건(儒巾)을 쓰고 뜰에 내려가서 거자(擧子)의 문두(文頭)를 가져오게 하고, 혹은 거자가 뜰의 흙을 파고 문두를 묻어서 시관으로 하여금 가져다 보게 하였다. 어떤 한 거자가 한 혁제(赫蹄)873) 를 떨어뜨렸으므로, 다른 선비가 주워 보니, 곁에 4, 5구(句)를 썼는데, 그 글에 이르기를, ‘이미 부제학(副提學)과 상의(相議)하였으니, 이를 생각하라.’ 하였으니, 식자(識者)가 말하기를, ‘이담명(李聃命)의 필적이다.’ 하였으며, 오정창(吳挺昌) 등이 윤휴의 아들 윤의제(尹義齊) 등과 서로 통하여 만들어 보낸 것이었다.
이로써 국사(國事)를 담당한 경상(卿相) 허적(許積)·권대운(權大運)·목내선(睦來善)·민희(閔熙)·민점(閔點)·윤휴(尹鑴)·이관징(李觀徵)·이원정(李元楨)·이당규(李堂揆)의 자질(子姪)들이 모두 과거에 뽑혔고, 서인(西人)은 다만 두세 사람만 참여할 수 있었는데, 그 지은 글이 모두 결점(缺點)이 없어서 저 무리들도 쉽사리 떨어뜨릴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어떤 한 서인의 거자(擧子)가 입장(入場)하자, 한 사람이 뜰 위에서 내려와 묻기를, ‘오 판서댁(吳判書宅) 진사(進士)인가?’라고 하였으니, 오정위(吳挺緯)의 아들 오시만(吳始萬)도 초시(初試)에 합격한 때문이었다. 그 사람이 그렇다고 건성으로 대답하였는데, 방(榜)이 나오자 그 사람이 과연 등제(登第)하였으니, 한때에 이를 비웃어서 오 선달(吳先達)이라고 일컬었다. 【권시경(權是經)이다.】 오시만은 이 때문에 혼자 떨어지게 되었는데, 오정위가 크게 분개(憤慨)하여 여러 시관(試官)을 꾸짖었다.
뒤에 정시(庭試)에서 오정위가 호조(戶曹)로부터 별도로 오시만의 시지(試紙)를 만들어 이를 표시하고, 과차(科次) 때에 ‘시만(始萬)’ 두 글자를 손바닥에 써서 오시만의 지은 것이 나오자, 손바닥을 들어 여러 시관에게 보였다. 윤이도(尹以道)의 지은 글을 장차 장원으로 삼으려고 하는데, 오정위가 고의로 호봉(糊封)한 것을 얼른 뜯고서 말하기를, ‘이 작품이 비록 좋다 하나, 호봉하지 아니하였다.’고 하여, 윤이도를 마침내 낙방(落榜)시키니, 오시만이 장원이 되었다. 오정위가 돌아가서 그 대문에 이르러 하인(下人) 수십 명으로 하여금 일시에 함께 소리지르기를, ‘내 아들이 신래(新來)874) 이다.’ 하게 하였는데, 듣는 이가 전하여 비웃으며, 오씨의 아들이 손바닥을 보고 급제하였다[吳子掌鑑及第].’ 하였으니, 오(吾)를 오(吳)로 하고 장(將)을 장(掌)으로 한 것이다.
이때 유생(儒生)이 결과(決科)875) 하면서 적자(摘髭)876) 하듯이 하고, 벼슬하는 자가 관직을 지내면 체전(遞傳)하는 것같이 하였다. 방안(榜眼)877) 이 아직 나오지 아니하였는데, 과명(科名)이 먼저 전파되고, 제목(題目)을 아직 내리지 아니하였는데, 물색(物色)이 먼저 정해져 서로 세력(勢力)을 겨루고 앞을 다투어 혼란이 극도에 달하였다. 또 앞에는 이미 관등이 뛰어 올랐는데, 뒤에는 묘(卯)에 미치지 못하기 때문에, 당상(堂上) 2품은 지나치게 많고 당하(堂下)·참하(參下)는 적었는데, 이 방(榜)이 나오자 서로가 경사라고 일컬었다.
- 【태백산사고본】 3책 4권 59장 A면【국편영인본】 38책 308면
- 【분류】인사-선발(選拔) / 사법(司法)
- [註 872]증광 별시 문과(增廣別試文科) : 정례(定例)로 행하는 과시(科試) 이외에 별례로 행하는 문과 별시. 본디 식년시(式年試) 외의 과시는 모두 별시로서, 제도가 확장됨에 따라 증광시(增廣試)·정시(庭試)·알성시(謁聖試) 등의 이름이 고정되었음. 별시는 이러한 과시 외에 중시(重試)의 대거(對擧)로 또는 나라에 경사가 있을 때에 특별히 요하는 과시 등을 뜻하게 되었음.
- [註 873]
혁제(赫蹄) : 얇고 작은 종이.- [註 874]
신래(新來) : 문과에 새로 급제한 사람.- [註 875]
결과(決科) : 과제(科第)를 정함.- [註 876]
적자(摘髭) : 과거에 합격하는 것이 턱밑의 수염을 뽑듯이 쉽다는 뜻.- [註 877]
방안(榜眼) : 과거에서 갑과(甲科)에 둘째로 합격한 사람.○朔乙酉/增廣別試文科, 取李鳳徵等三十四人。 時, 試官與擧子相約, 或試官使其下人, 潛着儒巾, 下庭取擧子文頭; 或擧子穿庭土埋文頭, 令試官取見。 有一擧子落一赫蹄, 他儒拾見之, 寫表四五句書曰: "已與副學相議, 念之。" 識者曰: "聃命筆。" 挺昌等, 與鑴子義濟等相通, 而構送者也。 以此, 當國卿相許積、權大運、睦來善、閔熙、閔點、尹鑴、李觀徵、李元禎、李堂揆之子姪, 無不擢第, 西人只數三人得參。 以其所製, 俱完善, 渠輩亦不得容易黜落故也。 有一西人擧子入場, 一人自庭上下, 問吳判書宅進士耶? 以挺緯子始萬亦中初試也。 其人漫應之, 及榜出, 其人果登第, 一時嗤之, 稱爲吳先達。 【權是經也。】 始萬以此獨見落, 挺緯大憤, 詬罵諸試官。 後於庭試, 挺緯自戶曹, 別造始萬試紙而識之, 科次時, 書始萬二字於手掌, 始萬所製出, 擧掌示諸試官。 尹以道之製將爲魁, 挺緯故爲閃破其糊封曰: "此作雖好, 不爲糊封矣。" 以道遂落, 始萬爲魁。 挺緯歸至其門, 令其下人數十, 一時齊呼曰: "吾子新來。" 聞者傳笑以爲吳子將鑑及第, 以吾爲吳, 以將爲掌也。 是時, 儒生決科如摘髭, 仕者歷官如遞傳, 榜眼未出, 科名先播; 題目未下, 物色先定, 相與鬪勢爭先, 淆亂極矣。 且前旣超陞, 後未及卯, 故堂上二品過多, 而堂下參下稀少。 是榜之出, 相與稱慶。
- 【태백산사고본】 3책 4권 59장 A면【국편영인본】 38책 308면
- 【분류】인사-선발(選拔) / 사법(司法)
- [註 87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