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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종실록 4권, 숙종 1년 10월 29일 계미 3번째기사 1675년 청 강희(康熙) 14년

복선군 이남이 헌관에 제수되어 궁궐에 출입하기를 예전처럼 하다

복선군(福善君) 이남(李柟)이정(李楨)868) ·이연(李㮒)869) 의 사건이 있은 뒤 절대로 조알(朝謁)에 참여하지 아니하였는데, 윤휴(尹鑴)·오정창(吳挺昌) 등이 비로소 다시 써서 헌관(獻官)으로 삼으니, 이로부터 궁금(宮禁)에 출입하기를 예전과 같이 하였다. 이보다 앞서 선왕(先王)께 병환이 있고, 왕실(王室)이 단약(單弱)한데, 남(柟) 등의 형제가 많고 성하여 나라 사람이 모두 위의(危疑)함을 품었으니, 선왕께서 대점(大漸)870) 하던 날에는 한편의 조사(朝士)들이 이미 그 문(門)에 가득찼었다. 임금이 처음 즉위(卽位)하여, 남(柟) 등이 비상(非常)을 엿보았는데, 정(楨)·연(㮒)이 귀양가자, 그 무리가 조금 꺾였으나, 남(柟)이 비록 집안에 있을망정 안으로는 환관과 결탁하고 밖으로는 윤휴·허목(許穆)을 의지하여 당원(黨援)이 오히려 성하였다. 남(柟)은 본래 영남 사람들에게 존숭받았는데, 영남 사람 최덕기(崔德基)라는 자가 상소(上疏)하여 위망(威望)이 있는 종실(宗室)로 영남(嶺南)에 나와서 진무(鎭撫)할 것을 청하였으니, 바로 남(柟)을 가리킨 것이었다. 윤휴 등이 자주 서로 모이면서 자취가 매우 음비(陰秘)하였으니, 윤휴는 산림(山林)에서 일어나 바야흐로 표치(標致)를 스스로 높게 하려는데, 사람들이 그 형상을 알 것을 두려워하여 문득 그 관복(冠服)을 고치고 밤중을 이용하여 오정일(吳挺一)의 첩(妾)의 집에 모여서 남(柟) 등과 더불어 서로 보았다. 윤휴의 이름은 해를 찌르는 형상을 응하였는데, 임금의 청문(聽聞)을 현혹(眩惑)시켜 밖으로는 오랑캐를 친다는 이름을 핑계하고서 종친과 결합하기를 꾀하니, 뭇사람의 마음이 흉흉(洶洶)하여 화(禍)가 급박(急迫)할까 두려워하였다. 김만기(金萬基)김석주(金錫胄)가 그 집을 기찰(譏察)하니, 윤휴도 사람을 시켜 두 김(金)의 집을 기찰하였다. 이때 임금께서 병환이 나니, 내수(內竪)의 무리가 소주(燒酒)를 복용하여 추위를 막을 것을 청하고, 정(楨)의 집으로 하여금 진공(進供)하게 하자, 임금이 받아들이도록 명하였다. 장선징(張善瀓)이 이를 듣고 초주(椒酒)의 변(變)871) 이 있을 것을 의심하여 허적(許積)에게 말하니, 허적이 그 일이 탄로될 것을 알고 그만두게 하지 않을 수 없었다.


  • 【태백산사고본】 3책 4권 58장 B면【국편영인본】 38책 308면
  • 【분류】
    왕실-종친(宗親) / 정론-간쟁(諫諍)

  • [註 868]
    이정(李楨) : 복창군(福昌君).
  • [註 869]
    이연(李㮒) : 복평군(福平君).
  • [註 870]
    대점(大漸) : 임금의 병이 위독해짐.
  • [註 871]
    초주(椒酒)의 변(變) : 전한(前漢)의 권신(權臣) 왕망(王莽)이 납일(臘日)에 평제(平帝)에게 독약을 넣은 초주(椒酒)를 올려 시해(弑害)한 일을 말함.

福善君 事後, 絶不參朝謁。 挺昌等, 始復用爲獻官。 自是, 出入宮禁如故。 先是, 先王寢疾, 王室單弱, 而等兄弟衆盛, 國人皆懷危疑。 屬先王大漸之日, 一邊朝士, 已盈其門。 上初卽位, 等辟睨非常, 及竄, 其黨少沮, 而雖在家, 內連保閹, 外仗, 黨援猶盛。 素爲嶺南人所宗, 有嶺人崔德基者上疏, 請以有威望宗室, 出鎭嶺南, 卽指也。 等數相聚會, 迹甚陰秘。 起自山林, 方高自標, 致恐人知其狀, 輒變其冠服, 乘夜會于吳挺一妾家, 與輩相見。 名應剌日之象, 眩惑君聽, 外託伐胡之名, 謀結宗親, 衆心洶洶, 恐禍急。 金萬基金錫冑譏察其家, 亦令人譏察兩之家。 時, 上未寧, 內竪輩請服燒酒禦寒, 令家進供, 上命取入。 張善澂聞之, 疑有椒酒之變, 以語許積, 知其事露, 不得不止之。


  • 【태백산사고본】 3책 4권 58장 B면【국편영인본】 38책 308면
  • 【분류】
    왕실-종친(宗親) / 정론-간쟁(諫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