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양에 현을 다시 설치하고 대흥산성에 축성토록 하고, 곽세건·도신징 등을 제직하다
대신(大臣)과 비국(備局)의 여러 신하들을 인견(引見)하였다. 이 날에 영양(英陽)의 일을 논의하여 다시 설치하기로 결정하였다. 인하여 대흥(大興)에 성을 쌓는 일에 미치자, 윤휴(尹鑴)가 옳지 않다고 하며 말하기를,
"옛날에는 지키는 것이 사이(四夷)에 있었으니, 적변(賊變)이 국도(國都)에 전해진 후에 방비하는 것은 계책이 아닙니다."
하니, 허적이 희롱하여 말하기를,
"윤휴의 말은 과장이라고 이를 만합니다. 상책은 들어가 쳐서 소멸(掃滅)시키는 것이고, 다음은 사이(四夷)를 지키는 것인데, 간우(干羽)773) 로 양계(兩階)에서 춤추면 어찌 아름답지 아니하겠습니까? 그러나 만약 시돌(豕突)의 근심이 있으면, 왕공(王公)이 설험(設險)하는 것은 상고(上古)에도 그러하였습니다."
하였다. 윤휴가 또 아뢰기를,
"고(故) 정승 유성룡(柳成龍)이 말하기를, ‘남산(南山)에 성을 쌓을 만하다.’고 하였으니, 이 말이 옳습니다."
하니, 장령(掌令) 이동규(李同揆) 또한 남산에 성을 쌓을 만하다고 말하였다. 이동규는 윤휴에게 부화(附和)하기 때문에 윤휴가 하는 말에는 받들지 아니함이 없는 것이 이와 같았다. 윤휴가 또 체부(體府)를 설치하는 일을 말하니, 이동규 또한 이를 말하였는데, 윤휴가 더욱 착급(着急)774) 하여, ‘신의 마음이 경경(耿耿)775) 합니다.’라고까지 하였다. 이때 윤휴가 병권(兵權)을 잡으려고 도모한 지 이미 오래 되었으나, 김만기(金萬基)·김석주(金錫胄)·신여철(申汝哲) 등을 갑자기 쫓아내기가 어려워서 그 당류(黨類)와 체부(體府)를 설치하고자 꾀하고, 먼저 허적을 도체찰사(都體察使)로 삼고 자기는 부체찰사가 되려고 하였다. 또 개부(開府)776) 를 칭탁하여 허적으로 하여금 밖에 나가 지키게 하고는 자기가 조정 정권을 오로지 잡고 중병(重兵)을 안에서 통솔하려고 밤낮으로 몰래 모여서 은밀하게 의논하였으나, 사람들이 그 하는 짓을 헤아리지 못하였다. 윤휴가 아뢰기를,
"곽세건(郭世楗)과 도신징(都愼徵)에게 제직(除職)하라는 명령이 있었으나, 나이 늙어서 참하직(參下職)777) 에 의망(擬望)할 수는 없으니, 바로 6품을 내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국가에 공이 있다."
하였다. 윤휴가 아뢰기를,
"유세철(柳世哲)은 맨먼저 상소하여 예(禮)를 논하여 공의(公議)를 부식(扶植)하였고, 정동익(鄭東益)은 우상(右相)이 어질다고 하여 이를 천거하였습니다."
하자, 허적이 아뢰기를,
"바로 6품(品)을 내는 것은 비록 너무 많이 할 수는 없지만, 이 네 사람은 좋습니다."
하였는데, 임금이 말하기를,
"도신징(都愼徵)은 국가에 큰 공이 있으니, 종통(宗統)을 바로잡은 것은 바로 이 사람으로부터 말미암은 것이다. 네 사람 모두 6품으로 내어 보내라."
하였다. 곽세건(郭世楗)이란 자는 그 조부가 곽재기(郭再棋)이고, 그 아비가 곽융(郭瀜)인데, 정인홍(鄭仁弘)과 족척(族戚)이 된다. 혼조(昏朝) 때에 곽재기는 남대(南臺)778) 를 몹시 바랐는데, 정구(鄭逑)가 정인홍의 흉론(凶論)을 배척하자, 더불어 원수가 되었다. 곽융이 정인홍을 위해 시(詩)를 지어 정구를 꾸짖기를, ‘의관을 차리고 진퇴한 것은 진실로 유자이지만[衣冠進退眞儒者], 풍속을 손상한 짓은 이단보다 심하였네[敗俗傷風甚異端].’ 하였다. 곽세건(郭世楗)도 사람됨이 또한 간사하여 반드시 서인(西人)을 얽어 해치려고 하여 서울에 올라와서 틈을 엿보았는데, 여러 남인(南人)이 돌려가며 이를 용납하였다. 이원정(李元楨)이 소(疏)를 만들어 곽세건을 부추겨서 올리게 하니, 곽세건이 팔을 걷어 올리면서 스스로 담당하였다. 곽세건은 스스로 그 공(功)이 많다고 여겨, 바라는 바가 매우 높아서 참하직(參下職)에 나아가지 아니하였다. 도신징(都愼徵)도 벼슬이 낮다 하여 포기한 때문에, 윤휴(尹鑴) 등이 6품을 주도록 청한 것이었다. 유세철(柳世哲)은 유성룡(柳成龍)의 족손(族孫)이고, 정동익(鄭東益)은 허목(許穆)의 문객이며, 도신징은 영남의 비천한 성계(姓系)이었다.
- 【태백산사고본】 3책 4권 46장 B면【국편영인본】 38책 302면
- 【분류】왕실-국왕(國王) / 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 / 군사-관방(關防) / 정론-간쟁(諫諍) / 인사-임면(任免) / 인사-관리(管理) / 인물(人物)
- [註 773]간우(干羽) : 하(夏)나라 우왕(禹王)이 시작한 무악(舞樂)의 이름. 방패[干]를 쥐고 추는 춤과 깃[羽]을 쥐고 추는 춤. 우왕이 삼묘(三苗)를 정복하면서 무력(武力)을 사용하지 않고 문덕(文德)을 사용하였다는 고사(故事)가 있음.
- [註 774]
착급(着急) : 마음이 급함.- [註 775]
경경(耿耿) : 마음이 편안하지 못한 모양.- [註 776]
개부(開府) : 관아(官衙)를 설치하고 속관(屬官)을 둠. 한(漢)나라 제도로서 삼공(三公)만이 개부(開府)할 수 있었음.- [註 777]
참하직(參下職) : 조참(朝參)에 참여하지 못하는 7품 이하 종9품까지의 관원의 총칭. 참외(參外).- [註 778]
남대(南臺) : 학문과 덕이 뛰어나서 대관으로 천거된 사람.○戊申/引見大臣、備局諸臣。 是日論英陽事, 以復設爲定。 仍及大興築城事, 尹鑴以爲不可曰: "古者守在四夷, 賊傳國都而後防之, 非計也。" 積戲之曰: "鑴言可謂大矣。 上則入擊掃滅, 次則守在四夷, 舞干羽於兩階, 豈不美哉? 而如有豕突之患, 王公設險, 上古亦然。" 鑴又曰: "故相柳成龍言, 南山可城, 此言是矣。" 掌令李同揆亦言南山可城。 同揆附鑴, 故凡鑴發言, 無不承奉如此矣。 鑴又言設體府事, 同揆亦言之。 鑴尤着急, 至云: "臣心耿耿。" 時, 鑴圖握兵權已久, 而以金萬基、金錫冑、申汝哲等, 難以遽逐, 與其黨謀欲設體府, 先以積爲都體察使, 而自除爲副。 又托以開府, 令積出鎭於外, 己專執朝政, 擁重兵於內, 日夜潛聚密議, 人莫測其所爲。 鑴曰: "郭世楗、都愼徵除職有命, 而年衰不可擬參下職, 宜直出六品。" 上曰: "有功國家矣。" 鑴曰: "柳世哲首上疏論禮, 扶植公議; 鄭東益右相以爲賢而薦之。" 積曰: "直出六品, 雖不可太多, 此四人則好。" 上曰: "都愼徵有大功於國家, 宗統之正, 由此人。 四人竝出六品。" 世楗者, 其祖曰再祺、其父曰瀜, 與仁弘爲族戚。 昏朝時, 再祺養望南臺, 鄭逑斥仁弘凶論, 與爲仇敵, 瀜爲仁弘作詩誚逑曰: "衣冠進退眞儒者, 敗俗傷風甚異端。" 世楗爲人亦憸邪, 必欲構害西人, 上京伺釁, 衆南傳客之。 李元禎構疏, 嗾世楗上之, 世楗攘臂自當。 世楗自多其功, 意望甚高, 不就參下職。 愼徵亦以官卑而棄之, 故鑴等請出六品。 世哲, 成龍之族孫; 東益, 乃許穆門客; 愼徵者, 嶺南卑姓。
- 【태백산사고본】 3책 4권 46장 B면【국편영인본】 38책 302면
- 【분류】왕실-국왕(國王) / 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 / 군사-관방(關防) / 정론-간쟁(諫諍) / 인사-임면(任免) / 인사-관리(管理) / 인물(人物)
- [註 77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