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적이 대흥산성을 축성하고, 신덕 왕후 본궁의 제사를 폐지할 것을 아뢰다
허적(許積)이 송도(松都)에서 돌아오자, 임금이 인견(引見)하고 물으니, 허적이 말하기를,
"그곳에 가서 보니, 형세가 지극히 좋아서 나는 새도 지나갈 수가 없었습니다. 외성(外城) 터는 천마산(天磨山) 밑에 있는데, 청석동(靑石洞)과의 거리가 6,7리(里)이니, 여기에 성을 쌓아서 한 장수를 정하여 지키게 하고 백성으로 하여금 성거산(聖居山)에 입보(入堡)767) 하게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성은 대흥(大興)으로 이름하는 것이 마땅하나, 다만 중흥(中興)은 곧 경성(京城) 근처이므로, 하루 아침에 사변이 있으면 도민(都民)을 버리고 갈 수가 없으니, 중흥성을 쌓아서 경도(京都) 백성의 〈의지할〉 땅으로 삼고, 대흥성을 쌓아서 송도 백성의 〈의지할〉 땅으로 삼는 것이 마땅합니다. 중흥도 마땅히 빨리 가서 보도록 하겠습니다."
하였는데, 임금이 이를 옳게 여겼다. 허적이 말하기를,
"신덕 왕후(神德王后)768) 본궁(本宮)의 제사는 곧 예(禮)에 어긋난 예이므로 인순(因循)할 수 없으니, 마땅히 폐지해야 하며, 또한 본궁에 추부(追祔)하지 않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니, 홍우원(洪宇遠)도 이를 힘써 말하였다. 북도(北道)769) 의 본궁에 묘(廟)를 설치한 것은 대개 남제(南齊)의 청계(靑谿)와 같아서 제례(祭禮)가 상전(常典)과 다르니, 그 근본을 잊지 아니하는 뜻이다. 신덕 왕후의 복위(復位)는 송시열(宋時烈) 등의 진청(陳請)으로 인한 것이기 때문에, 남인(南人)이 뜻을 얻자, 신덕 왕후를 추폐(追廢)하자는 의논이 있었다. 허적 등이 본궁에 추부(追祔)하지 말 것을 청하였으며, 인하여 제사를 폐지하기를 청한 것은 이 때문이다. 임금이 안주(安州)의 어선(漁船)을 명례궁(明禮宮)에 환속(還屬)하기를 명하자, 허적이 불가하다고 하고, 홍우원도 이를 말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일을 자유롭게 할 수 없으니, 그 사이에 또한 곡절(曲折)이 있을 것이다."
하자, 이옥(李沃)이 성난 목소리로 말하기를,
"인군(人君)이 어찌 임의(任意)로 못할 리 있겠습니까? 환속(還屬)하는 것은 옳지 못합니다."
하였는데, 유명천(柳命天)도 성난 목소리로 말하기를,
"곡절이 어떠한지 알지는 못하나, 환속함은 지극히 마땅하지 못합니다."
하였으며, 목창명(睦昌明) 또한 성난 목소리로 말하기를,
"신은 전하께서 자유롭게 하지 못하심을 알지만, 이미 주었다가 환속(還屬)함은 크게 신의(信義)를 저버리는 것입니다."
하였다. 허적 등이 다시 번갈아 힘써 청하였으나, 임금이 따르지 아니하였다. 허적이 이에 청하기를,
"이것은 환속(還屬)시키고, 다른 곳의 배를 안주(安州)에 바꾸어 주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명례궁(明禮宮)은 궁 이름인데, 전부터 대비전(大妃殿)의 사재(私財)가 되었었다. 오시수(吳始壽)가 안주의 명기(名妓) 수정(水晶)을 첩으로 삼아 고혹(蠱惑)되어 집에 데리고 있으면서 말하는 바를 모두 따랐는데, 안주가 수정의 고향이라 하여 수정을 위해 생색(生色)내는 땅으로 삼고 모든 일을 돌보아 주었다. 그리고 안주가 탕패(蕩敗)하기 때문에 안주에 있는 명례궁에 소속된 두 배를 안주에 줄 것을 청했으니, 비록 공사(公事)를 핑계대어 말하지마는 실은 수정 때문이었다. 자전(慈殿)에게 만약 매우 미안한 뜻이 있으면, 임금이 마땅히 본궁에 돌려주도록 할 것이고, 만약 그대로 안주에 주고자 하면 마땅히 방편(方便)으로서 자전에게 청할 것인데, 이에 허적 등에게 공공연하게 말하고, 이옥(李沃)·목창명(睦昌明)·유명천(柳命天)이 틈을 엿보아 자유롭게 할 수 없다는 것으로써 임금을 격노(激怒)시켜 이간하는 계책을 쓰고자 하니, 여러 사람이 일어나서 어지럽히고 시끄럽게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3책 4권 45장 A면【국편영인본】 38책 301면
- 【분류】왕실-국왕(國王) / 왕실-의식(儀式) / 왕실-비빈(妃嬪) / 군사-관방(關防) / 정론-간쟁(諫諍) / 수산업-어업(漁業) / 신분-천인(賤人)
- [註 767]입보(入堡) : 변방에 거주하는 사람들이 적이 침입해 오면 성(城)·보(堡) 안으로 들어가서 보호를 받고 피하던 일.
- [註 768]
신덕 왕후(神德王后) : 태조의 계비(繼妃).- [註 769]
북도(北道) : 함경도(咸鏡道).○許積自松都還。 上引見問之, 積曰: "往彼見之, 形勢極好, 飛鳥不能過。 外城之基, 在天磨山下, 距靑石洞六七里, 築此而定一將守之, 令民入保聖居好矣。 城宜名大興, 但中興乃京城近處, 一朝有變, 不可棄都民而去之, 築中興爲京都民地; 築大興爲松都民地爲宜。 中興亦當速往見之。" 上可之。 積言神德王后本宮祭, 乃是非禮之禮, 不可因循, 宜罷, 亦勿追祔本宮爲宜。" 洪宇遠亦力言之。 北道本宮設廟, 蓋似南齊 靑谿, 祭禮異於常典, 不忘其本之意也。 神德復位, 因宋時烈等陳請, 故南人得志, 有追廢神德之議。 積等請勿追祔本宮, 仍請罷祀。 以此, 上命安州漁船, 還屬明禮宮, 積力爭以爲不可, 宇遠亦言之, 上乃曰: "事有不得自由, 其間亦有曲折。" 李沃厲聲曰: "人君豈有不得任意之理? 還屬不可矣。" 柳命天又厲聲而進曰: "未知曲折如何而還屬, 極不當。" 睦昌明亦厲聲曰: "臣知殿下不得自由, 而旣給還屬, 失信大矣。" 積等更迭力請, 上不從。 積乃請: "此則還屬, 而換給他處船於安州。" 上允之。 明禮宮宮名, 自前爲大妃殿私財, 吳始壽以安州名妓水晶爲妾蠱惑, 率畜于家, 所言皆從。 以安州 水晶本鄕, 爲水晶生色地。 凡事皆顧恤, 以安州蕩敗, 請出安州所在明禮宮二船與安州, 雖託公言, 實以水晶故也。 慈殿如深有未安之意, 則上宜令還給本宮, 如欲仍給安州, 則宜方便以請于慈殿, 乃揚言于積等。 沃、昌明、命天窺見間隙, 以不得自由激怒上, 欲爲離間之計, 群起紛擾。
- 【태백산사고본】 3책 4권 45장 A면【국편영인본】 38책 301면
- 【분류】왕실-국왕(國王) / 왕실-의식(儀式) / 왕실-비빈(妃嬪) / 군사-관방(關防) / 정론-간쟁(諫諍) / 수산업-어업(漁業) / 신분-천인(賤人)
- [註 76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