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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종실록 4권, 숙종 1년 6월 4일 신유 1번째기사 1675년 청 강희(康熙) 14년

남인이 허목·윤휴를 수반으로 한 청남과 허적·권대운을 수반으로 한 탁남으로 갈리다

부응교(副應敎) 오정창(吳挺昌)이 상소(上疏)하기를,

"대신(大臣)의 직임은 그 지위가 대단히 높고 그 세력이 아주 무거워서 비록 잘못이 있더라도 오직 대간(臺諫)만이 이를 말합니다. 이러하므로 〈대간은〉 반드시 고고(孤高) 결개(潔介)하고 항직(抗直)한 사람을 언론(言論)하는 자리에 두고 절연(截然)히 서로 보지 않게 함은 그 뜻의 소재(所在)가 있는 것입니다. 이제 삼사(三司)가 서로 호창(呼唱)하면서 재상[宰揆]의 문(門)에 함께 출입하고 연소(年少)한 사람들의 논의(論議)가 간혹 정승의 자리에 관계된다면, 이는 곧 나라의 체통(體統)과 조정의 기강(紀綱)을 엄숙하게 하는 것이 못됩니다. 옛 말에 이르기를 ‘군자(君子)는 서로 화(和)하면서도 〈소견(所見)은〉 같이 하지 않고 소인(小人)은 〈소견은〉 같이 하면서도 서로 화(和)하지 아니한다.’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주(周)나라의〉 주공(周公)과 소공(召公)은 서로 기뻐하지는 않지만 그러나 서로 손상(損傷)하지 아니했으며, 〈한(漢)나라〉 엄연년(嚴延年)곽광(霍光)을 논박(論駁)하였지마는 곽광(霍光)은 성내지 아니하였습니다. 〈진(晉)나라〉 왕도(王導)는 사람들이 다 잘한다고 일컬었습니다마는, 왕술(王述)은 ‘사람이 요(堯)·순(舜)이 아닌 다음에야 어떻게 매사를 다 잘한다 하리요?’ 하였습니다. 만일 오늘날 서로 말만 많고 잘못을 교정(矯正)하지 아니한다면 이는 국가의 복(福)이 아닙니다. 전하께서 마땅히 여러 신료(臣僚)들을 정량(貞亮)해서 아부하지 않는 가운데서 살피시와, 예(禮)를 숭상하고 책임을 다해 힘쓰는 이 두 가지 일을 병행(並行)하면서 과오를 짓지 않으시면, 조정은 스스로 바르게 되고 여러 사람의 마음도 다 복종할 것입니다."

하였다. 처음에 서인(西人)들이 이미 패하여 물러섰을 적에, 허적(許積)이 맨 먼저 권대운(權大運)을 정부(政府)에 끌어들여 허목(許穆)·윤휴(尹鑴) 등과 합류하여 하나가 되었는데, 두 복(福)587) 이 실지로는 종주(宗主)가 되었다. 대개 변국(變局)하려는 계모(計謀)에 어려 남인(南人)들이 힘을 모아 양성(釀成)하였지마는, 그러나 허목윤휴(尹鑴)오씨(吳氏)588)복(福)589) 의 힘이 가장 많았기 때문이다. 그 때에 환관들은 궁 안에서 〈변국의 일을〉 주도하였는데, 복(福)은 환관들과 결합하고, 여러 오씨(吳氏)들과 허목윤휴 등은 복(福)과 연결을 지었는데, 여러 오씨(吳氏)들은 주로 중간에서 전하여 주는 역할을 하였고, 허목윤휴 등은 주로 논의를 지시하고 사주하는 일을 하였는데, 윤휴 등이 세력을 떨치어 조정의 정사를 전천(專擅)하려는 데 급급하였기 때문에 허적(許積) 등은 그 세력이 너무 커져서 자기의 권세를 뺏을 것을 두려워하여 드디어 서로 시기하고 의심하게 되었고, 이로 말미암아 청남(淸南)·탁남(濁南)의 명목(名目)이 있게 되었다.

그래서 한편에서는 허목윤휴가 괴수(魁首)가 되고 오정창(吳挺昌)이 모주(謀主)가 되고, 오정위(吳挺緯)·오시수(吳始壽)·이무(李袤)·조사기(趙嗣基)·이수경(李壽慶)이 골자(骨子)가 되었으며, 장응일(張應一)·정지호(鄭之虎)·남천한(南天漢)·이서우(李瑞雨)·이태서(李台瑞)·남천택(南天澤)의 무리들이 매와 사냥개[鷹犬]의 구실을 하였다. 이때 이동규(李同揆)라는 자가 있었으니, 고(故) 상신(相臣) 이성구(李聖求)의 아들이었다. 이성구가 〈이동규에게〉 유언(遺言)하기를 ‘숨어 살라.’고 하였다. 그런데 이에 이르러 〈이동규는〉 아버지의 유명(遺命)을 버리고 윤휴(尹鑴)와 더불어 죽음을 함께 하는 당(黨)이 되니, 윤휴가 현재(賢才)라고 추천하여 등용하였다. 또 상인(喪人) 이희채(李熙采)라는 자가 있었는데, 심복이 되어 비밀한 계획에 참여하였다. 그래서 복선군(福善君) 이남(李柟)이 우두머리가 되고 허목·윤휴(尹鑴)·이하이남(李柟)을 봉대(奉戴)하기를 마치 군부(君父)와 같이 하였다. 남(柟)은 또 역관(譯官)과 환관(宦官)들과도 한 마음이 되었었다.

한편으로는 허적(許積)·권대운(權大運)이 우두머리가 되고 민희(閔熙)·김휘(金徽)·민점(閔點)·목내선(睦來善)·심재(沈梓)·권대재(權大載)·이관징(移觀徵)·민종도(閔宗道)·이당규(李堂揆)·이우정(李宇鼎)·최문식(崔文湜) 등이 우익(羽翼)이 되었으며, 오시복(吳始復)·유명천(柳命天)·유명현(柳命賢)·권유(權愈)·목창명(睦昌明)·박신규(朴信圭)·김환(金奐)·민암(閔黯)·유하익(兪夏益)·윤계(尹瑎)·권환(權瑍)·이항(李沆)·김해일(金海一)·안여석(安如石)·이덕주(李德周)·우창적(禹昌績)·김빈(金賓) 등이 조아(爪牙)가 되니, 달라붙는 자가 매우 많았다. 유명천(柳命天)의 형제(兄弟)는 나이 젊으면서도 영수(領袖)가 되었다. 유명천은 성질이 음흉하였으며 허적(許積)의 세력에 의존했기 때문에 그 무리들 가운데서 추중(推重)되어 오정창(吳挺昌)과 더불어 서로 겨루었다.

윤휴(尹鑴) 등은 스스로 청남(淸南)으로 일컬었고, 허적(許積)권대운(權大運) 등의 무리들은 선조(先朝)에 높은 벼슬을 한 자가 많았다 하여 이를 탁남(濁南)이라 일렀다. 그러나 사람들은 양쪽을 모두 매우 혼탁(混濁)하게 여겨서 이는 마치 암수의 까마귀와 가마와 솥의 밑이 같은 것이라고 하였다.

허목(許穆)은 늙었으면서도 교묘하고 치밀(緻密)하여 혹은 좌(左)로 혹은 우(右)로 하였으며, 허적(許積)은 더욱 세상을 살아가는 데 노숙(老熟)하여 신축(伸縮)하는 데 기술이 있었으므로 안으로는 권대운 등을 부호(扶護)하면서도 겉으로는 중립(中立)인 양 하였다. 홍우원(洪宇遠)은 처음에는 윤휴·허목과 당(黨)이 되었다가 나중에는 권대운의 당(黨)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이하진(李夏鎭)·이옥(李沃)·조위명(趙威明)·이담명(李聃命) 등은 두 쪽 사이에 양다리를 걸치면서도 허목(許穆)윤휴(尹鑴)를 아첨하여 섬기기를 더욱 심하게 하였다. 강석구(姜碩耉)의 무리와 같이 양쪽에서 서로가 수로 치지도 아니하는 자도 또한 많았다. 또는 복(服)을 입는 가운데에 있던 자가 3인이 있었으니, 이원정(李元楨)은 비록 밖에 있었지마는 시의(時議)를 멀리서 주장하여 윤휴허목의 성원(聲援)이 되었고, 강석빈(姜碩賓)도 또한 윤휴 등의 논의에 붙었다. 김덕원(金德遠)권대운 등의 도회(都會)가 되었으면서도 모두 몸으로 직접 담당하지 못하여 울울(鬱鬱)하여 견디지를 못하였다. 오시복(吳始復)김덕원과 한 덩어리이었다. 그래서 오정창(吳挺昌)이 가적(家賊)처럼 보았다. 오시수(吳始壽)는 속임수가 많았다. 그래서 때로는 가만히 정성을 표시하여 스스로 허적(許積) 등에게 잘 보이려 하였다. 윤휴는 당은 비록 수가 적었지마는, 궁 안의 성원이 있었기 때문에 능히 그들과 서로 겨루었다.

오정창(吳挺昌)이 또 그의 부옹(婦翁)590) 정익(鄭榏) 등 소북(小北)의 무리들을 끌어들여서 그들과 더불어 일을 같이하려 하였다. 그러나 소북(小北) 사람들은 속임수가 심하고 이리저리 돌아보며 변천하는 양상을 관망하기를 잘하였다. 오정창은 본래 억세고 사나워서 그 생질의 세력을 끼고 화(禍)를 일으킬 마음을 품고 있었으며, 또 공(功)이 있음을 자부(自負)하여 마음속의 바라는 것을 헤아릴 수가 없었다. 그래서 빨리 온 세상을 씹어 삼키려고 하였지마는, 얼마 안되어 이정(李楨)이연(李㮒)이 패(敗)함에 따라 처음 계획이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그래서 이우정(李宇鼎) 등이 정(楨) 등의 일을 발론(發論)한 것을 성내었고 여럿이 이를 꾸짖었으니, 그것은 힘을 다하여 국세(局勢)를 뺏으려는 것이었는데, 이미 국세(局勢)를 얻고나니, 다른 사람이 가로채었다. 이에 〈국세를〉 전적으로 차지할 수 없게 되매 매우 분노하여 불평(不平)이 많았다. 당초 선조(先朝)에 허적(許積)이 사론(士論)의 배척을 받았을 적에 여러 남인(南人)들이 한 사람도 그를 구하여 주는 자가 없었는데, 오정창(吳挺昌)이 홀로 몸을 바쳐서 허적(許積)을 구하여 주었으므로 허적이 이를 매우 은덕(恩德)으로 여기었고, 오정창도 자기의 공(功)으로 여기었었다. 이에 이르러 허적이 형세에 압박을 받아 이미 정(楨)연(㮒)을 구해 주지 못하였고, 또 오정창과 더불어 이동(異同)을 보여 오정창이 더욱 분하게 여겼던 것이니, 이른바 ‘정량(貞亮)하여 아부하지 않는다.’고 한 것은 윤휴(尹鑴)허목(許穆)을 가리킨 것이고, 곽광(霍光)의 폐립(廢立)의 일591) 로써 허적 등을 가리켜 배척한 것이다. 또 대간(臺諫)과 시종(侍從)이 모두 허적(許積)권대운(權大運)의 문(門)에 노안(奴顔)592) 을 하여 품명(稟命)하여 사주를 받았기 때문에 오정창(吳挺昌)이 이들을 아울러 언급(言及)한 것이다.

청남(淸南)과 탁남(濁南)이 비록 둘로 나뉘어졌지마는, 서인(西人)을 공격하는 데 이르러서는 두 편이 또한 같은 소리로 합세(合勢)하여 마치 벌떼가 모이듯 하였다. 이태서(李台瑞)는 대북(大北)파 사람의 아들이었고 형모가 여우와 쥐 같아서 사람축에 끼지도 못하였지마는, 오랫동안 오(吳)복(福)의 문객(門客)이 되었었고, 허목(許穆)도 문장(文章)으로 인정하여 주었기 때문에 한때 삿된 소[邪疏]는 그의 손에서 많이 나왔다. 그의 무리들은 ‘일이 이루어진 뒤에는 마땅히 종백(宗伯)593)문형(文衡)594) 으로 있게 하겠다.’고 꾀었다. 이태서는 경박(輕薄)하게 날뛰어서 항상 사람을 대하여 말하기를 ‘나는 예조 판서(禮曹判書)나 대제학(大提學)이 될 만하다.’ 하였으니, 그 혼란[淆亂]함이 이러하였다. 당시 소북(小北)파의 사람으로서 팔을 걷어 붙이고 앞장서서 남인(南人)에게 붙은 자는 이수경(李壽慶)이었고, 남익훈(南益熏)도 또한 날마다 윤휴(尹鑴)허목(許穆)의 문에 나아갔었다. 서인(西人)으로서 남인(南人)에게 붙은 자는 김수홍(金壽弘)·이지익(李之翼)·정유악(鄭維岳)·곽제화(郭齊華)였고, 서인으로 떴다 잠겼다 하면서 용납되기를 구한 자는 조사석(趙師錫)·이단석(李端錫)·이하(李夏) 등이었다.

허적(許積) 등이 매양 비국(備局)에 모여서는 반드시 말하기를 ‘계해년595) 뒤의 일이 이와 같다.’ 하며 선조(先朝)를 자의(恣意)로 헐뜯어서 당론(黨論)에만 조급하여 공사(公事)를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문서(文書)가 퇴적(堆積)하였지마는 결재하여 처리할 줄을 알지 못하였고, 낮과 밤으로 여럿이 모여서는 사람을 물리치고 은밀한 말을 하기에 급급하여 마치 미친 것 같았다. 또 모두 때를 타서 탐욕(貪慾)을 부렸으므로, 문을 열어놓고 뇌물을 받으면서도 조금도 염치(廉恥)가 없어서 나라를 좀먹고 백성을 해하는 것이 날로 더욱 심하였다. 이에 중외(中外)에서 그들의 사독(邪毒)을 싫어하였으며, 당시 하늘의 재변(災變)이 겹쳐 나타나서 한 여름인데도 얼음이 얼고 눈이 왔으며 여러 달을 메마르고 가물었는데, 이는 다 여러 소인(小人)들이 권세를 잡고 흔들어서 조정(朝廷)이 흐리고 어지러운 데 대한 보응(報應)으로 여겼다.


  • 【태백산사고본】 3책 4권 17장 B면【국편영인본】 38책 287면
  • 【분류】
    정론-정론(政論) / 정론-간쟁(諫諍) / 인물(人物)

  • [註 587]
    두 복(福) : 복창군(福昌君)·복선군(福善君).
  • [註 588]
    오씨(吳氏) : 오정창의 형제들을 가리킴.
  • [註 589]
    복(福) : 복창군 형제들을 가리킴.
  • [註 590]
    부옹(婦翁) : 장인.
  • [註 591]
    곽광(霍光)의 폐립(廢立)의 일 : 곽광(霍光)은 전한(前漢)의 명신(名臣). 곽광이 무제(武帝)의 유조(遺詔)를 받들어 대사마 대장군(大司馬大將軍)으로서 소제(昭帝)를 도왔으며, 다음 창읍왕(昌邑王)이 음란하므로 그를 폐위시키고 선제(宣帝)를 세웠음.
  • [註 592]
    노안(奴顔) : 종같이 굽실거리는 비굴한 얼굴.
  • [註 593]
    종백(宗伯) : 예조 판서(禮曹判書).
  • [註 594]
    문형(文衡) : 대제학.
  • [註 595]
    계해년 : 1623 인조 원년.

○辛酉/副應敎吳挺昌上疏曰:

大臣之職, 其位絶崇、其勢甚重, 雖有愆過, 惟臺諫言之。 是以, 必以孤介抗直之人, 置之言地, 截然不相覿者, 其意有在。 今若三司呼唱, 聯翩於宰揆之門, 年少論議, 或關於具瞻之座, 則殆非所以嚴國體, 而肅朝綱也。 古語曰: "君子和而不同, 小人同而不和。" 是以, 不相悅, 而不相損; 嚴延年霍光, 不怒。 王導人皆稱善, 而王述以爲: "人非堯舜, 安得每事盡善?" 若使今日, 互相周遮, 無所矯非, 則非國家之福也。 殿下宜察群僚於貞亮不阿之中, 崇禮責勉, 兩行不愆, 則朝廷自正, 衆心咸服矣。

初, 西人旣敗, 首引大運入政府, 與等, 滾合爲一, 而兩實爲其宗。 蓋以變局之謀, 雖衆南竝力釀成, 而之力, 最多故也。 時, 宦官內爲之主, 與宦合, 而諸等與連, 諸主居間傳授, 等主論議指嗾, 等欲汲汲奮勢, 專擅朝政, 故等恐其張甚奪己權, 遂相猜疑, 由是有淸濁南之目。 一邊則以爲魁, 挺昌爲謀主, 挺緯始壽嗣基壽慶爲骨子, 應一之虎天漢瑞雨台瑞天澤之徒爲鷹犬。 而有李同揆者, 故相聖求之子也, 聖求遺令屛處。 至是棄父命, 與結爲死黨, 推爲賢才而用之。 又有喪人李熙采者爲腹心, 得與秘計, 而福善君 爲之長。 以下, 奉戴如君父, 又與譯閹爲一心。 一邊則大運爲首, 來善大載觀徵宗道堂揆宇鼎文湜等爲羽翼。 始復命天命賢昌明信圭夏益海一如石德周昌績 等爲爪牙, 附者甚衆, 命天兄弟爲年少領袖。 命天性陰譎, 而倚之勢, 故爲其中所推, 與挺昌相角。 等自稱爲淸南, 而以大運等之徒, 多有榮宦先朝者, 謂之濁南, 而人以爲兩邊, 俱甚混濁, 正如雌雄烏、釜鼎底也。 老而巧密, 或左或右, 尤老於涉世, 伸縮有術, 內扶大運等, 而外若中立。 宇遠初黨於, 後歸大運之黨。 如夏鎭威明聃命等, 首鼠兩間, 而諂事尤甚。 如碩耉輩, 彼此不爲比數者亦多。 又有在服中者三人, 元禎雖在外, 遙主時議, 爲聲援, 碩賓亦附等之議。 德遠大運等都會, 而俱以不得身親當之, 鬱鬱不堪。 始復德遠一身, 故挺昌視以家賊。 始壽多詐, 故時密輸款, 自媚於等。 黨雖少, 以其有奧援, 能與相抗。 挺昌又欲引入其婦翁鄭榏小北儕流, 與之同事, 而小北詐甚, 頗顧瞻觀變。 挺昌素桀驁, 挾其甥勢, 包藏禍心, 且自負其有功, 意望叵測, 亟欲呑噬一世。 無何, 敗, 始計未成, 怒宇鼎等, 發等之論, 衆叱之。 以其極力奪局, 而旣得局, 他人乃橫當, 已不得專據, 甚忿忿不平。 初, 先朝被斥於士論, 衆南無一救者, 挺昌獨挺身救, 甚德之, 挺昌亦自功。 至是迫於形勢, 旣未救, 又與挺昌微示異同, 挺昌益恚恨之。 所謂貞亮不阿, 指而以霍光廢立事, 指斥等。 且以臺諫、侍從, 皆奴顔於大運之門, 稟命受嗾, 故挺昌竝及之。 淸濁二南雖相分, 而至於攻西人, 則兩邊又同聲合勢, 若蜂集焉。 李台瑞以大北人之子, 形如狐鼠, 不齒於世, 久爲門客, 許以文章, 一時邪疏, 多出其手。 其徒諭以事成後, 當以宗伯、文衡相處。 台瑞輕佻, 常對人言曰: "吾堪作禮曹判書、大提學。" 其淆亂如是。 時以小北, 攘臂投南者, 李壽慶也, 南益熏亦日造之門。 以西人投南者, 金壽弘李之翼鄭維岳郭齊華也; 以西人浮沈取容者, 趙師錫李端錫李夏等也。 等每會備局, 必曰: "癸亥後事如此。" 恣意詆毁先朝, 急於黨論, 不暇以公事爲念。 文書堆積, 不知裁處, 晝夜群聚, 屛人竊語, 汲汲如狂。 且皆乘時爲貪饕, 開門受賂, 無復廉恥, 蠧國害民, 日以滋甚, 中外厭毒。 時, 天變疊見, 盛夏氷雪, 累月枯旱, 皆以爲群小弄權, 朝廷濁亂之應。


  • 【태백산사고본】 3책 4권 17장 B면【국편영인본】 38책 287면
  • 【분류】
    정론-정론(政論) / 정론-간쟁(諫諍) / 인물(人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