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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종실록3권, 숙종 1년 5월 24일 임오 1번째기사 1675년 청 강희(康熙) 14년

황해도 관찰사 윤계를 의금부에 내리다

황해도 관찰사(黃海道觀察使) 윤계(尹堦)를 의금부(義禁府)에 내렸다. 윤계의 공사(供辭)는 전일에 그가 올렸던 두 소(疏)와 다름이 없었는데, 심지어 말하기를,

"오시수(吳始壽)가 이에 듣지 못한 것을 들었다 하여 임금의 귀에까지 들리게 하고, 신은 또 그에게 속아 따라가서 전하지 않은 것을 전하였다고 하였으니, 이는 실로 임금께 사실대로 고하는 도리가 아니었습니다. 관소(館所)에서 힐문(詰問)하였을 때의 설화(說話)에 이르러서는 신이 그 곡절(曲折)을 자세히 알지 못하나, 장효례(張孝禮)가 마땅히 상세하고 신중히 할 것은 황제(皇帝)의 말만한 것이 없어야 하는데도, 오히려 출몰(出沒)하고 추천(推遷)하여 앞뒤가 같지 않습니다. 그런데 어찌해서 유독 신과 더불어 수작(酬酌)한 것만은 반드시 그것이 적실(的實)하게 전해져서 허탄(虛誕)하고 지만(枝蔓)한 데서 나온 것이 아닌 것을 보장하겠습니까? 신하가 강성하다는 말은 처음부터 들은 바도 없었고 또한 전한 바도 없었으니, 실로 털끝만큼이라도 변환(變幻)한 일이 없었습니다."

라고 하였다. 처음에 청(淸)나라 사람이 두 번이나 선왕(先王)에게 제사를 올린 것은 대개 세력이 약하였기에 친후(親厚)함을 보이려는 것이었다. 원접사(遠接使)였던 오시수(吳始壽)가 ‘신하가 강하다는 말을 윤계(尹堦)에게서 들었다.’고 공공연히 말하였고, 허적(許積)이 입대(入對)하였을 적에 또 증거대어 사실로 만들었으니, 자전(慈殿)이 이를 듣고 여러 날을 먹지 않으며 분부를 내리기를,

"이 뜻은 제문(祭文)에 기재되어 있지도 않았고, 칙사(勅使) 또한 그런 말을 하지도 않았는데 중간에서 나왔으니, 들은 후로는 마음 아픔이 간절하여 차라리 갑자기 죽고 싶은 심정이다. 선왕께서 이러한 망극(罔極)한 무함(誣陷)을 당하셨으니, 하늘에 계시는 영혼인들 명명(冥冥)한 데서 어찌 분노(憤怒)하지 않겠느냐? 속히 사신(使臣)을 보내어 통절(痛切)하게 변명하시어 이 미망인(未亡人)으로 하여금 잠깐 동안이라도 죽지 않고 선왕의 무함이 신설(伸雪)됨을 보게 하는 것이 바라는 바이다."

하였다. 허적권대운(權大運)과 더불어 들어와서 임금에게 아뢰기를,

"근거(根據)가 없는 말은 변명할 것이 못됩니다."

하고, 또 청하기를,

"여러 대신(大臣)들을 가서 보고 서로 의논하겠습니다."

하였으므로, 그 일을 늦추었다. 이틀이 지나서 홀로 장효례를 보고 임시 변통의 말로 묻기를,

"신하가 강하다는 말을 윤계가 글로 나에게 통한 까닭으로 내가 이미 알고 있다. 이것이 무슨 말인가?"

하니, 장효례가 말하기를,

"짐작으로 한 말이 우연히 이와 같았으니, 우리 나라에서는 알지 못하였고 칙사(勅使)도 알지 못하는 일입니다."

하였다. 허적이 이로써 돌아와 아뢰고 드디어 여러 대신들을 불러서 함께 의논하기를 청하였다. 허적정치화(鄭致和)에게 사사로이 말하기를,

"저들이 만약 이 일로 인하여 우리에게 강한 신하란 말에 대해 책문(責問)한다면, 마땅히 산인(山人) 【산인(山人)은 송시열(宋時烈)·송준길(宋浚吉) 등을 가리킨다.】 을 가지고 말해야 하겠다."

하니, 정치화가 분연히 말하기를,

"나라에 강한 신하가 있다면 우리들이 해당되는 것이지, 저 재야(在野)에 있는 사람이 어떻게 참여했겠는가?"

하니, 허적이 부끄러워서 중지하였다. 대개 참소하는 사람이 선조(先朝)에서부터 산인(山人)을 모함하려 하여 강신(强臣)이라 하였고, 이남(李柟)이 사신(使臣)으로서 돌아와서 말하기를,

"노주(虜主)434) 가 우리 나라에 강한 신하가 있다고 말한다."

하였는데, 혹자는 말하기를,

"남(柟)이 노주를 핑계대고 말을 만든 것이다."

하였다. 그런 뒤 허적(許積)이 올린 상소에 ‘위복(威福)이 임금에게 있지 아니합니다.’란 말이 있었으니, 뜻이 남(柟)과 같았으므로 사람들이 이미 그를 의심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남인(南人)들이 나라의 명령을 쥐고서는 송시열(宋時烈)의 죄를 얽었다. 오시수(吳始壽)가 신하가 강하다는 신강(臣强) 두 글자로 윤계를 끌어들여 증거를 삼아서, 송시열이 나라의 명령을 잡은 것을 사실로 만들려고 한 것이었는데, 오정위(吳挺緯)가 호조 판서(戶曹判書)였고 관(館)에 있는 통역들이 모두 오시수의 심복이었다. 장효례와 서로 약속한 뒤 허적이 홀로 물었으니, 사람들이 그 전말을 알지 못하였다. 오시수가 데리고 다니는 역관(譯官) 안일신(安日新)오시수와 더불어 처음 서울에 들어왔을 적에 여러 재신(宰臣)들이 물었으나, 안일신은 듣지 못하였다고 답하였다. 그리고 또 오시수가 말한 것이 제문(祭文)과 칙서(勅書)에도 지재되어 있지 않았으니, 이로써 사람들은 오시수가 만들어 낸 것이라고 더욱 의심하였는데, 윤계(尹堦)는 기관(機關)이 없었기 때문에 처음에는 오시수가 계획한 것을 알지 못하였다. 그래서 장효례에게 들은 것이 없음을 임금에게 아뢰어 올렸는데, 오시수가 무인(誣引)함을 듣고서는 스스로 무인당한 것이 곧 선왕(先王)을 무함하는 데 귀착(歸着)됨을 알고서 소(疏)를 올려 변명하고자 한 것이었다. 오시수가 접반사(接伴使)로 서쪽으로 내려갈 적에 윤계가 장차 소를 올릴 것을 알고, 달콤한 말로 윤계를 달래기를,

"이와 같이 하면 벼슬길이 빛나지 못할 것이다."

하였으나, 윤계가 듣지 않고 두 번이나 소를 올렸다. 임금이 바야흐로 오시수를 총애(寵愛)하고 허적을 신임(信任)하고 있었는데, ‘오시수가 분개하여 성을 내었다.’고 하였으므로, 윤계를 변환(變幻)이 심한 자로 보았다. 허적권대운 등이 입시하였을 적에 윤계가 들은 ‘병들어서 정치를 할 수 없다.’고 한 말이 대지(大旨)는 같으므로 죄를 억지로 가하여 윤계만을 잡아다가 치죄(治罪)하였다. 윤계가 올린 소에는 ‘장효례가 차비 역관(差備譯官)과 역학(譯學)·별장(別將) 등을 모두 신문하소서.’ 하고 청하였으나, 이들을 모두 문죄(問罪)하지 않았다. 그 뒤에 소결(疏決)할 때에 허적이 곧바로 ‘변환(變幻)하여 정직하지 못하다.’고 하였다. 임금이 친히 죄안(罪案)을 단정하여 혹은 삭탈(削奪)하기도 하고 혹은 귀양을 보내기도 하였는데, 윤휴가 중한 법으로 다스리도록 청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라서 처음에는 영광(靈光)으로 유배(流配)하였다. 승지(承旨) 조위명(趙威明)이 ‘그의 죄가 무거운데 귀양가는 곳은 가깝다.’고 아뢰어서 다시 경성(鏡城)으로 귀양보냈다. 윤계(尹堦)가 바야흐로 장효례와 서로 보았을 때에 역참(驛站)의 수령(守令)으로서 이들의 말을 들은 이가 많았다. 그래서 상소로 윤계의 원통함을 아뢰려고 하였으나, 화(禍)를 당할까 두려워서 중지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2책 3권 56장 A면【국편영인본】 38책 276면
  • 【분류】
    사법-행형(行刑) / 정론-간쟁(諫諍)

  • [註 434]
    노주(虜主) : 청의 황제를 가리킴.

○壬午/下黃海道觀察使尹堦于禁府。 供, 與前兩疏無異, 而至曰: "始壽乃以不聞爲聞, 至達天聽, 臣又詭隨, 以不傳爲傳, 則實非告君以實之道。 至於館所詰問時說話, 臣未詳曲折, 而孝禮之所當詳愼者, 宜莫如皇帝之言。 猶且出沒推遷, 前後不同, 何獨於與臣酬酢, 必保其的傳, 而不出於誕蔓乎? 臣强之說, 初無所聞, 亦無所傳, 實無一毫變幻之事。" 初, 淸人再致祭於先王, 蓋勢弱, 欲示親厚也。 遠接使吳始壽揚言: "聞臣强之說於。" 許積入對, 又證成之。 慈殿聞之, 累日不食, 下敎曰: "此意不載祭文。 勑使亦不發端, 而出於中間, 聞來痛切, 寧欲溘然。 先王被此罔極之誣, 在天之靈, 豈不憤怒於冥冥? 速遣使痛辨, 使未亡人須臾無死, 得見先王被誣之伸雪, 是所望也。" 大運入說上曰: "無根之說, 不足爲辨。" 又請往見諸大臣而相議, 故緩其事。 越二日, 獨見孝禮, 權辭問之曰: "臣强之說, 尹堦書通于我, 故我已知之。 是何言耶?" 孝禮曰: "斟酌之言, 偶然如此。 我國不知, 勑使不知。" 云。 以是歸奏, 遂請招諸大臣共議。 私語鄭致和曰: "彼人若因此, 責問我强臣, 則當以山人 【山人指宋時烈、宋浚吉等。】 言之。" 致和忿然曰: "國有强臣, 則我輩當之。 彼在野之人, 何與焉?" 慙而止。 蓋讒人自在先朝, 欲陷山人爲强臣, 使還言: "虜主云, 我國有强臣。" 或言假虜造言。 其後疏有威福不在上之語, 其意與同, 人已疑之。 至是, 南人執國命, 羅織宋時烈始壽欲以臣强二字, 引爲證, 以實時烈之執命, 而挺緯以戶判在館, 譯舌皆始壽腹心。 與孝禮相約之後, 乃獨問, 人不知其端倪。 始壽所帶譯官安日新, 則與始壽初入京, 諸宰問之, 對以未聞。 且始壽所言, 不載於祭文及勑書, 以此人益疑始壽之做出。 而則無機關, 初未覺始壽之計, 不以聞於孝禮者啓陳。 及聞始壽誣引, 自恨見誤, 同歸於誣先王也, 欲疏辨之。 始壽以伴使西下, 知將陳疏, 以甘言誘曰: "如是則宦塗不耀。" 不聽, 再疏言之。 上方寵始壽而信, 以始壽爲憤恚, 以爲變幻。 大運等入侍以所聞病不能有爲之說, 大旨則同, 勒加其罪, 獨拿治之, 疏中請問孝禮、差備譯官及譯學、別將等, 竝不究問。 後於疏決時, 直謂之變幻不直, 上斷自宸衷, 或削或配, 請施重典, 上從之。 初配靈光, 承旨趙威明言其罪重配近, 改配鏡城。 方孝禮相見時, 站上守令, 亦多聽其言者, 欲疏白冤, 畏禍而止。


  • 【태백산사고본】 2책 3권 56장 A면【국편영인본】 38책 276면
  • 【분류】
    사법-행형(行刑) / 정론-간쟁(諫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