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
상세검색 문자입력기
숙종실록3권, 숙종 1년 4월 28일 병진 3번째기사 1675년 청 강희(康熙) 14년

영의정 허적이 강화도에서 돌아와 강화도의 형세에 대하여 보고를 올리다

영의정(領議政) 허적(許積)을 인견(引見)하였다. 그것은 허적이 강도(江都)로부터 돌아왔기 때문이다. 허적이 보고하기를,

"강도(江都)가 전에는 진창이었습니다만 지금은 견고(堅固)한 강토가 되어서 곳곳에다 모두 배를 댈 만합니다. 그러나 적(賊)이 만약 우리 나라 사람을 길잡이로 삼아서 경강(京江)으로부터 물줄기를 따라 내려오면 진실로 방어하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그런데 마니산(摩尼山) 아래 수 십리의 땅이 물기가 축축하여 사람들은 다닐 수가 없고 다만 조수(潮水)가 찰 때만 적의 배가 정박한다면 약간의 군사만 쓰더라도 방어할 수가 있습니다. 이러한 형세로써 살펴본다면 강도의 동북방(東北方)은 지키기 어렸지만 서북방은 방비하기 쉽겠습니다. 그러니 마땅히 동북쪽의 물가를 수치(修治)하여서 곳곳에 조그마한 성(城)을 쌓고 성에 들어와 지키는 군사는 마땅히 승군(僧軍)을 사역(使役)해야 하며 군량미(軍糧米)는 2만 석이면 넉넉할 듯합니다. 정족 산성(鼎足山城)은 쓸모가 없는 성인데 그때에도 3만 석의 쌀을 비축해 놓았기 때문에 지금도 사람들이 ‘삼만석 성’이라고 일컫고 있으니 만약 이만한 물력(物力)을 들여서 쌓으면 강도를 지킬 수 있을 것입니다. 또 통진(通津)문수산(文殊山)은 강도를 위에서 내려다보고 있는데, 병자년368) 에 적이 문수산에 쳐들어와서 장선(裝船)369) 을 끌고 내려왔는데도 우리 군사들은 이를 알지 못하였기에 전쟁에 졌습니다. 만약 조그마한 성을 문수산에 쌓아서 웅거하여 지킨다면 적이 오고 가는 것을 피리를 불고, 기를 휘둘러 통지(通知)할 수가 있습니다. 덕포(德浦)도 성을 쌓을 만한 곳이니, 비록 작지마는 험준(險峻)합니다. 겨울철에 갑진(甲津)에 얼음이 녹아서 흐를 때에 덕포만은 배를 수용(受容)할 만합니다. 그러니 만약 이곳에 성이 있게 되면 위급할 때에 먼저 이 성에 들어가서 배를 정돈하여 건너면 갑자기 닥치는 근심을 면할 수 있습니다. 자연도(紫燕島)의 지세(地勢)는 조수가 물러가면 수십리가 물이 질퍽한 땅이 되고 비록 만조(滿潮)일 때라도 사방에 풀이 있습니다. 풀이란 바닷 가운데 모래와 흙이 높이 쌓인 곳에 있습니다. 배가 다니다가 여기에 부딪히면 문득 부서져서 가라앉게 됩니다. 배를 정박(停舶)할 만한 곳은 다만 태평암(太平巖)의 한 곳만이 있는데 지세(地勢)가 매우 좋습니다. 그런데 백운산(白雲山)이라는 큰 산이 섬 가운데에 있어서 산기슭의 굴곡(屈曲)이 사방으로 둘러쌓여서 경작(耕作)할 수 있는 평야가 매우 좁으니 대진(大鎭)을 설치하기에는 맞지 않을 듯합니다. 또 거기에는 기르는 말이 많지 않은 데다가 물과 풀의 조건이 좋지 못하기에 말들이 모두 파리하니, 만약 말을 다른 섬에 옮기고 백성들을 모집(募集)하여 들어와 농사를 짓게 하면 총융사(摠戎使)가 들어와 지킬 땅으로는 좋을 듯합니다. 교동(喬桐)은 땅이 매우 작으며 군영(軍營)의 뒤에 산이 우뚝 솟아 있고 옛성이 있습니다. 그 성에 오르면 온 지경을 내려다볼 수 있고 평야(平野)도 또한 많으니 백성들이 살기에 좋습니다. 그리고 사면(四面)이 비록 땅이 물기가 축축한 데는 없습니다만 수면(水面)이 넓고 수초(水草)가 많기에 외적(外賊)이 침범(侵犯)하기가 어려우니, 땅의 형세는 강도(江都)보다 나은 듯합니다. 다만 땅이 좁고 작아서 종묘(宗廟)와 사직(社稷)과 백관(百官)들을 다 수용할 수가 없으니, 형세가 반드시 강도를 귀착지(歸着地)로 하고 자연도(紫燕島)와 교동은 이를 보좌(補佐)하는 곳이 되겠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윤휴(尹鑴)의 상소를 허적(許積)에게 내어 보였더니, 허적이 아뢰기를,

"초시(初試) 날짜가 촉박하면 먼 지방 사람들이 미처 녹명(錄名)하지도 못하고 돌아갈 것이니, 그들의 원망이 깊을 것이며 또 균일(均一)하게 하는 도리도 아닙니다."

하므로, 임금이 명하기를,

"내일 대신들이 모여 의논하여 처리하게 하겠다."

하였다. 다음날 비국(備局)을 인견(引見)할 때에 임금이 윤휴(尹鑴)를 명초(命招)하여 입시하였다. 임금이 또 윤휴가 올린 상소를 내 보이니, 허적이 아뢰기를,

"과거를 만약 정지하면 인심(人心)을 잃는 것이 이보다 더함이 없겠습니다."

하니, 윤휴(尹鑴)가 아뢰기를,

"인심(人心)을 잃는다는 말은 신이 아는 바가 아닙니다."

하였다. 응교(應敎) 이하진(李夏鎭)과 이조 판서(吏曹判書) 김휘(金徽)와 호군(護軍) 윤심(尹深)과 병조 참판(兵曹參判) 신여철(申汝哲)이 모두 날짜를 물려서 행하도록 청하니, 임금이 윤휴의 말에 따라 이를 정지시켰다.

삼가 살펴보건대, 대신(大臣)이 보장(保障)의 땅으로부터 돌아와서 기키고 방어하는 계책을 갖추 보고하였는데도 그에 대한 응답(應答)이 하나도 없었으니, 어찌 그 보고가 쓸 만한 것이 못되어서 그러한 것인가? 그렇다면 처음부터 보내지 아니하는 것이 차라리 나왔을 것이니, 그리고도 음우(陰雨)에 대비하듯 미리 계책을 세우려고 하는 것이 또한 어렵지 않겠는가? 허적(許積)이 나왔을 적에 동렬(同列)들이 병거(兵車)를 만들자는 일로 인하여 거듭 견책(譴責)을 당하여 크게 체모(體貌)가 손상되었는데, 그 일이 비록 지나갔지마는 마땅히 조용하게 계책을 말하여 들였어야 할 것인데도 다만 병거(兵車) 만드는 일만을 진달(陳達)했을 뿐이고 반마디의 말도 강도의 일에는 미치지 아니하였다. 그들이 임금의 뜻에 영합(迎合)함이 이와 같았으니, 매우 한스러운 일이다. 허적권대운(權大運) 등이 기우제(祈雨祭)를 친히 지내는 일을 정지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 【태백산사고본】 2책 3권 44장 A면【국편영인본】 38책 270면
  • 【분류】
    왕실-국왕(國王) / 왕실-의식(儀式) / 군사-군정(軍政) / 군사-관방(關防) / 과학-지학(地學) / 인사-선발(選拔)

○引見領議政許積, 以自江都歸也。 曰: "在前泥濘之地, 今皆爲堅固之土, 處處舟皆可泊。 賊若以我人爲導, 由京江順流而下, 則誠難禦矣。 摩尼山下數十里地沮洳, 人不可行, 只潮滿時賊船可泊, 雖用若干兵, 可禦之。 以此見之, 東北難守, 而西北易備。 宜治東北水邊, 處處築小城, 入守軍則當役僧軍, 糧則二萬石足矣。 鼎足山城爲無用之城, 而其時猶費米三萬石, 至今人稱三萬石, 城若用此物力而築之, 江都可守也。 且通津 文殊山, 壓臨江都。 丙子年賊入文殊山, 裝船曳來, 我人不之覺, 以至於敗。 若築小城於文殊而據守, 賊之去來, 可以吹角麾旗而通之。 德浦亦有可城處, 雖小而險。 當冬月甲津流澌之時, 德浦則可以容舡, 若有城於此, 則臨急先入此城, 整船以涉, 可免倉卒之患矣。 紫燕地勢, 潮退則數十里爲沮洳之地, 雖潮滿之時, 四面有草。 草者, 海中有沙土高積處也。 舟行觸此, 則輒敗沒。 泊舟之處, 只有太平巖一項, 形勢甚好, 而白雲大山在島中, 山麓屈曲四匝, 平野可耕之地甚窄, 不合設大鎭。 且其牧馬不多, 以無水草之美, 馬皆羸瘠。 若移馬於他島, 募民入耕, 爲摠戎使入守之地可矣。 喬桐地甚小, 營後有山突兀, 有古城。 登城可俯見一境, 平野亦多, 民居好矣。 四面雖無沮洳, 而水闊草多, 外賊難犯, 形勢愈於江都。 但地狹小, 不可容宗社百官, 勢必以江都爲歸, 而紫燕喬桐爲輔車耳。" 上出示尹鑴疏於, 曰: "初試定日急遽, 遠方之人未及錄名而還去, 則其怨必深, 亦非均一之道矣。" 上令明日會議處之。 翌日, 備局引見時, 上命招入侍。 上又出示疏, 曰: "科擧若停, 則失人心莫此若也。" 曰: "失人心之說, 非臣所知。" 應敎李夏鎭, 吏曹判書金徽、護軍尹深、兵曹參判申汝哲, 皆請退行, 上從言停之。 謹按大臣歸自保障之地, 備陳守禦之策, 而無一酬應, 豈以其言不足用歟? 如是則初不如不遣之爲愈, 其欲先事爲陰雨之計者, 不亦難乎? 之出也, 同列因車事, 重被譴責, 大傷體貌。 事雖已過, 宜有所從容納規, 而只陳造車之事, 無半辭及此。 迎合類是, 可勝歎哉? 大運等, 請停親祭, 上從之。


  • 【태백산사고본】 2책 3권 44장 A면【국편영인본】 38책 270면
  • 【분류】
    왕실-국왕(國王) / 왕실-의식(儀式) / 군사-군정(軍政) / 군사-관방(關防) / 과학-지학(地學) / 인사-선발(選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