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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종실록 3권, 숙종 1년 4월 9일 정유 1번째기사 1675년 청 강희(康熙) 14년

호군 김수홍이 그가 지은 변장과 논서를 올리다

호군(護軍) 김수홍(金壽弘)이 그가 지은 ‘변장(辨長)’과 ‘논서(論庶)’ 두 글을 임금께 올리면서 상소(上疏)하기를,

"신이 삼가 이조 관안(吏曹官案)의 등서(謄書)를 보았더니, 기해년293) 복제(服制)의 일에 신이 사설(邪說)을 부르짖어 망령되게 대례(大禮)를 의론, 문자(文字)를 지어 중외(中外)에 전해 보여서 국시(國是)를 현란(眩亂)시켰는데, 그 말뜻이 음흉하고 참혹하여 참으로 보통 논설(論說)에 비할 것이 아니요, 사람을 모함(謀陷)하는 기화(奇貨)로 삼아 여러 신하들의 죄안(罪案)을 강제로 만들었으니, 신과 같은 사람은 의관(衣冠)의 반열(班列)에 참여시킬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 안에 사설(邪說)이라고 한 것은 당초에 예(禮)를 의논한 글을 가리킨 것입니다. 그러나 이 글은 모두 예경(禮經)에서 인증(引證)한 말이니 이를 어찌 사설이라 하겠습니까? 그리고 또 신이 진실로 사람을 모함(謀陷)하려는 뜻이 있었다면, 그때에 마땅히 봉장(封章)할 것이지 어찌 반드시 사서(私書)로 질정(質正)을 했겠습니까? 사람들의 말썽을 만든 것이 이에 이르러 더욱 음험(陰險)하여졌습니다. 이 일로써 살펴본다면 오늘의 전례(典禮)가 비록 정당(正當)합니다만, 신이 처음에 예(禮)를 의논하였던 말은 이미 참고하여 볼 곳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만약 후세(後世)에 다만 관안(官案) 가운데 쓰여진 말만을 보게 되면 오늘의 일을 의심하지 않을 수가 없을 듯합니다. 신의 사설(邪說)은 참으로 헤아릴 가치도 없습니다만, 그러나 혹시 신으로 인하여 성명(聖明)의 덕(德)에 누(累)를 끼치게 될까 염려하여 이에 앞뒤의 ‘변장(辨長)과 논서(論庶)’의 글 한 부씩을 올립니다. 성명께서는 굽어살피소서."

하니, 임금이 답하기를,

"국시(國是)가 이미 바루어진 후에 관안(官案)의 문서가 어찌 일후(日後)의 증빙(證憑)이 되겠느냐? 진상(進上)한 글은 내가 이미 보았다."

하였다. 김수홍(金壽弘)이 일찍이 복제에 관한 사설(邪說)로써 탄핵(彈劾)을 당하여 사판(仕版)에 이름이 삭제(削除)된 것을 이조 관안(吏曹官案)은 으레 그 죄명(罪名)을 기록하는 것이니, 지금 이를 인용하여 말썽을 삼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그가 송시열(宋時烈)에게 준 예(禮)를 논한 글 머리에, ‘강희(康熙) 4년’이라고 썼는데, 그 당시는 관문서(官文書) 이외에는 비록 하천(下賤)일지라도 청(淸)나라 연호(年號)를 쓰는 자가 없건만 김수홍만 홀로 썼다. 또 그의 조부(祖父) 김상용(金尙容)을 제사하는 축문(祝文)에도 ‘강희’라는 연호를 쓰려고 하므로, 온 문중(門中)이 몹시 놀라서 ‘가문의 적(賊)’이라고 하였다. 그것은 김상용강도(江都)294) 에서 순절(殉節)했는데도 김수홍은 홀로 청나라의 정삭(正朔)을 받들어서 축문에까지 청의 연호를 쓰려고 했으니, 그의 성질이 비꼬여서 상도(常道)에 벗어남이 이와 같았다. 그러니 배반해서 허목(許穆)윤휴(尹鑴)에게 붙은 것은 말할 것이 못된다. 이때에 허목윤휴 등은 귀현(貴顯)하게 되었는데, 자신만이 임금에게 중하게 여겨지지 못한 것을 보고 상소(上疏)하고 그 글을 올려서 스스로 공(功)을 자랑하여 상(賞)을 요구한 것이다. 만약 계맹(契盟)을 고집하여 보수(報酬)를 책구(責求)하는 자일지라도 오히려 변명할 말을 만들기가 어려울 것인데, 이조 관안(吏曹官案)의 문서는 후세(後世)에 참고되는 것도 아니었다. 김수홍이 이를 모르는 것이 아닐텐데 이에 핑계하여 명분(名分)을 삼으려고 했으니, 그의 교묘한 수단으로 남을 속이는 것이 너무나 심하다 하겠다. 김수홍의 고모(姑母)는 이이성(李以省)의 아내이다. 능히 의리(義理)를 알기에 김수홍을 몹시 책망하니, 김수홍도 부끄러워서 말을 하지 못하였다. 김수홍신면(申冕)과 서로 친하여 잘 지냈다. 신면은 일찍이 산인(山人)295) 을 미워하여 해치려 한 자였다. 김수홍의 글을 살펴보니, 그 ‘변장(辨長)’은, 예경(禮經)에 상하(上下)에 통한다고 한 것은 곧 천자(天子)와 서인(庶人)을 통틀어 이른 것인데도 김수홍면재(勉齋)296) 가 기재한 상소의 말을 삭제해 버려 상하란 말을 형과 동생의 서차(序次)인 것처럼 만들었고, 그 ‘논서(論庶)’는 고금(古今)에 말한 서얼(庶孽)을 수없이 함부로 인용하고 심지어는 천한 축첩[賤畜] 등의 말까지 인용하여 송시열의 죄로 만들었던 것이다. 또 강씨(姜氏)297) 의 죄의 흔적은 중외(中外)에 나타났고 소현 세자가 인조(仁祖)에 대해서는 적통(嫡統)이 끊어진 지가 멀다고 했으니, 이는 곧 윤선도(尹善道)도 말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것은 효종 대왕이 왕위(王位)에 올라 왕실(王室)의 종통(宗統)을 계승했으니, 대통(大統)이 이미 소현(昭顯)에서 끊어졌음을 누군들 알지 못하겠는가? 강씨에게 죄가 있고 없는 것은 논(論)할 것이 아니다. 그러기에 송시열은 다만 참최(斬衰)의 복제(服制)를 마땅히 겹쳐 행할 수 없다는 것만 논(論)했을 뿐이다. 그런데 김수홍 등은 매양 종통으로 말썽을 만들어 극도로 위험하게 하여 마침내 화(禍)를 만들어낸 뒤에야 그쳤으니, 이루 다 말할 수 있겠는가?


  • 【태백산사고본】 2책 3권 26장 A면【국편영인본】 38책 261면
  • 【분류】
    정론-정론(政論) / 재정-진상(進上) / 출판-서책(書冊) / 인물(人物) / 왕실(王室)

  • [註 293]
    기해년 : 1659 현종 즉위년.
  • [註 294]
    강도(江都) : 강화(江華).
  • [註 295]
    산인(山人) : 송시열을 가리킴.
  • [註 296]
    면재(勉齋) : 송(宋)나라 학자 황간(黃幹)의 호.
  • [註 297]
    강씨(姜氏) : 소현 세자(昭顯世子)의 빈(嬪).

○丁酉/護軍金壽弘進其所製《辨長》《論庶》二書, 其疏曰:

臣伏見吏曹官案謄書, 有曰: "己亥服制事, 臣爲倡邪說, 妄議大禮, 做作文字, 傳示中外, 眩亂國是, 語意陰慘, 實非等閑論說之比, 作爲陷人之奇貨, 勒成諸臣之罪案。 如此之人, 不可齒在衣冠之列。" 云。 所稱邪說者, 指其當初論禮之文也。 此皆禮經引證之語, 其可謂邪說乎? 且臣固有陷人之志, 則其時卽當封章, 何必以私書質正乎? 人之爲言, 到此益險矣。 以此觀之, 今之典禮雖正, 臣之初頭論禮之說, 旣無考見之地, 而若於後世, 只見官案中措語, 則似不無致疑於今日之事也。 臣之邪說, 固不足數, 而或有緣臣仰累聖明之德, 玆以前後辨長、論庶之文, 一部進御, 惟聖明垂察焉。

上答曰: "國是旣正之後, 官案文書, 豈足爲日後之證乎? 所進一部之文, 予已覽矣。" 壽弘曾以服制邪說, 被劾削版, 吏曹官案, 例錄其罪名, 今其所引以爲言者此也。 其貽宋時烈論禮書頭, 書康熙四年, 凡官文書外, 雖下賤, 無書淸國年號者, 壽弘獨書之。 又於祭其祖尙容祝文, 欲書康熙, 一門驚駭, 謂之家賊。 尙容殉節於江都, 而壽弘獨奉淸國正朔, 至書祝文, 其乖戾反常如此, 叛附, 猶不足論也。 至是見等貴顯, 而渠獨不見重於上, 乃上疏上其書, 自陳衒功要賞。 若執契而責報者, 猶難於爲辭, 吏曹官案文書, 非後世所考。 壽弘亦非不知, 而托此爲名, 其巧詐極矣。 壽弘李以省妻, 能識義理, 切責壽弘, 壽弘慙不能言。 壽弘申冕相善, 嘗嫉山人而欲害之也。 謹按壽弘書, 其辨長則禮經通上下云者, 乃是通天子庶人之謂, 而壽弘削去勉齋所載疏說, 以上下若作兄弟序次者然, 其論庶則雜引古今所言庶孽無數, 至引賤畜等語, 爲宋時烈之罪。 又曰: "姜氏之罪跡, 見出於中外, 昭顯之於仁祖, 嫡統之絶遠矣。" 斯乃善道所不言者也。 孝宗大王踐大位, 承宗統, 孰不知大統已絶於昭顯乎? 姜氏之有罪無罪, 非所論也。 宋時烈只論服斬之不宜疊行, 而壽弘等每以宗統爲言, 極其危險, 竟至構禍而後已, 可勝言哉!


  • 【태백산사고본】 2책 3권 26장 A면【국편영인본】 38책 261면
  • 【분류】
    정론-정론(政論) / 재정-진상(進上) / 출판-서책(書冊) / 인물(人物) / 왕실(王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