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주 부윤 조성보가 달아났다가 돌아온 자를 봉황성으로 압송했음을 아뢰다
의주 부윤(義州府尹) 조성보(趙聖輔)가 아뢰기를,
"청(淸)나라 사람 한 명이 스스로 주회인(走回人)291) 이라 일컬으며 중강(中江)을 건너와 강을 건너오기를 청하기에 빈신(儐臣)들과 의논하고서 통관(通官)으로 하여금 칙사(勅使)에게 말하였더니, 칙사가 장관(將官)을 시켜 급히 잡아오라고 하므로 그를 결박(結縛)하여 봉황성(鳳凰城)으로 압송(押送)하였습니다. 그의 이름을 물으니, ‘이름은 안단(安端)이고 강화 천총(江華千摠) 안몽열(安夢說)의 아들이며, 경기 도사(京畿都事) 정복길(鄭復吉)의 처형제(妻兄弟)로서 병자년292) 에 청(淸)나라에 붙잡혀 가서 갑군(甲軍)의 집 종이 되어 북경(北京)에 있었으며, 다시 북경의 서쪽 3, 4일 거리인 보중위(保重衛)로 옮겼습니다. 지난해에 주인 되는 호인(胡人)이 전쟁에 한 번 나간 뒤에는 아득히 소식이 없었으며, 그밖에도 남방으로 쳐내려간 청나라 군사들은 모두 전쟁에 패(敗)하여 죽었기에 청나라 사람들의 마음이 흉흉(洶洶)하여 아침 저녁을 보전하기 어려웠습니다. 이미 주인인 호인을 잃었으므로 망명할 계책을 내어 보중위를 떠나 북경에서부터 출발하여 관(關)밖에 이르러 보니, 금주위(錦州衛)와 광녕(廣寧) 등지의 사람들은 모두 피란(避亂)할 것만 생각하면서 몽고(蒙古)가 장차 심양을 침범(侵犯)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심양 성문에 이르르니, 낮에도 성문을 닫아서 머물지 못하고 연산관(連山關)에 이르러, 봉황에서 징발(徵發)되어 심양으로 떠나는 갑군(甲軍) 1백 20인을 만났기에 물으니, 그들은 몽고의 임금 차흘한(車屹汗)이 포로(捕虜)가 되어 심양에 갇힌 지 10년이 되었는데, 그의 아들이 대신 임금이 된 뒤에 한 부대의 군사를 이끌고 와서 북경(北京)으로 통하는 길을 막고는 심양을 쳐서 빼앗고 그의 아버지를 구해 냈으며, 그런 뒤에 장차 서쪽을 침범(侵犯)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봉황성에 도착해 보니, 다만 늙은이와 어린이와 여자들만 있었습니다.’ 하였습니다. 다시 남방(南方)의 소식을 물었더니, ‘지난해 이후로 연이어 군대를 동원하여 남쪽으로 전쟁에 나가 한 사람도 돌아온 자가 없다.’고 대답했습니다. 그 사이의 형세(形勢)는 이로써 미루어 알 수가 있지마는 어느 편이 이기고 졌는지는 그도 또한 알지 못했습니다. 안단이 관(館)의 문밖을 겨우 나가자마자 크게 통곡(痛哭)하여 말하기를, ‘고국 땅을 그리는 정이 늙을수록 더욱 간절한데도 죽을 곳으로 보낸다.’고 했습니다."
하였다. 조성보(趙聖輔)가 또 아뢰기를,
"주회인(走回人)을 압송(押送)해 갈 적에 청(淸)나라 역관 음성발(陰成發)에게 탐문(探問)하니, 그가 말하기를, ‘만주(滿洲)에 있던 군사들이 모두 남쪽의 전쟁에 나가는데 제왕(諸王)의 농막(農幕)인 장토리(章土里)의 아들들을 모두 징발(徵發)하여 낮에는 연습을 시키고 밤에는 순라(巡邏)를 돌게 하였다.’ 하였습니다. 음성발이 책문(柵門)에 들어가 보니 청나라 성장(城將) 왕숭작(王崇爵)을 비롯하여 전부터 얼굴이 익숙했던 갑군(甲軍)은 한 명도 남아 있지 않았고, 다만 새로 뽑은 10여 명의 군사만이 남아 있기에 간 곳을 물으니, 그들이 말하기를, ‘심양의 군사들은 모두 북경에 나갔고 봉황성의 군사는 심양으로 거느리고 나갔다.’고 했답니다. 그러나 심양에 무슨 변란(變亂)이 있었는지는 그들이 굳게 숨기고 말하지 않았으므로, 이번에 나온 최태운(崔太雲)의 집을 찾아갔더니, 최태운의 아내가, ‘몽고 군사 5백 명이 심양에 나왔다.’ 하며 자세히 말하려던 때에 그의 아들이 눈짓을 하므로 그 이야기를 다 마치지 못하고, 아전(衙前)에서 통역하는 무리들을 보니 근심하는 빛이 얼굴에 가득히 나타났으며, 책문(柵門)의 포자(舖子)에는 고요하게 사람이 없었다고 합니다."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2책 3권 25장 B면【국편영인본】 38책 261면
- 【분류】외교-야(野)
○義州府尹趙聖輔啓言: "淸人一名, 自稱走回人, 來渡中江請渡。 與儐臣議, 使通官言于勑使, 則勑使使將官, 急急捉來, 綁縛押送於鳳凰城。 問其名則自稱安端, 江華千摠安夢說之子, 京畿都事鄭復吉妻昆弟。 丙子被虜, 爲甲軍家奴在北京, 又移於北京西三四日程保重衛。 上年, 主胡赴戰, 一去之後杳無消息, 其他南征之軍皆敗沒, 人心洶洶, 不保朝夕。 旣失主胡, 出走回之計, 離保重衛, 自北京發行, 到關外, 錦州衛、廣寧等處人民, 皆思避亂, 言蒙古將犯瀋陽。 及到瀋陽, 城門晝閉, 不得留住。 到連山關, 逢鳳凰城甲軍一百二十名調赴瀋陽, 問之則言蒙王車屹汗, 被囚於瀋十年, 其子代立, 以一枝兵, 遮截北京路, 攻取瀋陽, 脫出其父, 然後將爲西犯云。 及到鳳凰城見之, 只有老弱女子。 又問南方消息, 則言上年以後, 連續出兵, 南征無一人還。 其間形勢, 可以推知, 而至於勝負, 渠亦不知。 纔出館門, 呼哭曰: ‘懷土之情, 老而益甚, 陷於死地。’ 云。" 聖輔又啓言: "走回人押去之際, 淸譯陰成發探問則言: ‘滿軍盡赴南征, 悉發諸王農幕章土里子枝, 晝則練習, 夜則巡邏。’ 云。 成發入柵門, 則淸城將王崇爵及自前顔熟甲軍, 無一留在, 只餘新選十餘名。 問其去處則言瀋兵盡赴北京, 鳳城軍則領赴瀋陽, 瀋中有變, 牢諱不言。 尋往今番出來崔太雲家, 太雲妻言: ‘蒙兵五百, 出來瀋陽。’ 將欲詳言之際, 其子目攝, 故不畢其說。 見衙譯輩, 憂色滿面, 柵門鋪子, 寂然無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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