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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종실록3권, 숙종 1년 3월 28일 병술 2번째기사 1675년 청 강희(康熙) 14년

대통관 장효례와 사사로이 만났다고 배척당한 황해도 관찰사 윤계의 변명 상소

황해도 관찰사(黃海道觀察使) 윤계(尹堦)가 상소하기를,

"신이 황주(黃州)에서 칙사(勅使)를 맞이할 때에 대통관(大通官) 장효례(張孝禮)가 신의 역학(譯學)을 불러 신과 만나려 한다고 말하였는데, 대개 신의 종조(從祖)인 고(故) 상신(相臣) 윤방(尹訪)의 집이 청파(靑坡)에 있고 장효례도 청파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신의 조부인 고(故) 판서(判書) 신(臣) 윤휘(尹暉)가 그 집에 들어가 살았으므로 집이 이미 장효례와 서로 가깝고, 나이도 동갑이어서 아이 때에 같이 놀았으므로, 서로 친숙하지 않을 수 없으나, 신이 사사로이 만날 수 없다고 답하였습니다. 평산(平山)에 이르러서는 신이 있는 곳이 마침 그의 관소(館所)와 담 하나 사이였는데, 그가 먼저 차비 역관(差備譯官)을 시켜 보러 오겠다는 뜻을 전하고, 도보로 뒤따라 와서 곧바로 신의 방안으로 들어왔으므로 피하려 하여도 미치지 못하는 형세였습니다. 신이 움직이지도 않은 채 돌아가게 하였더니, 정만화(鄭萬和) 영감(令監) 【통정 대부(通政大夫) 이상을 영감이라 속칭한다.】 도 제가 젊은 시절에 본도(本道)를 안찰(按察)할 때 저를 불러 서로 만났는데, 이제 사도(使道) 【연수(連帥)를 사도라 속칭한다.】 는 보러 온 것을 꾸짖으니, ‘내가 매우 섭섭하다.’ 하므로, 신이 제주 목사(濟州牧使)로서 죄를 입은 곡절과 그가 아는 우리 나라의 곤궁·영달과 죽고 산 일에 대하여 다 능히 그 상세한 것을 말하였습니다. 신이 말하던 끝에 말하기를, ‘황제는 우리 나라의 기근을 특별히 염려하여 방물(方物)을 받지 않는데, 너희들이 이번에 요구하는 것이 전보다 열배나 되니, 어찌하여 황제의 뜻을 몸받지 않는가?’ 하니 그가 따르겠다고 말하고, 이어서 말하기를, ‘황제가 선왕(先王)의 부고를 듣고 지극히 놀라고 슬퍼하였다. 또 선왕이 여러 해 동안 병이 깊어서 베푼 것도 없이 훙(薨)하신 것을 불쌍히 여기시고, 이번 조문(弔問)에 특별히 두 번 제사를 설행(設行)하게 하였다.’ 하였습니다. 신이 그의 말이 점점 번져 나가는 것을 꺼려서 오래 앉아 있는 것이 옳지 않다는 뜻을 말하였더니, 그가 곧 일어나서 갔습니다. 그 사이에 말한 것은 이러할 뿐입니다.

그날 원접사(遠接使) 오시수(吳始壽)는 병 때문에 같이 가지 못하였고, 신이 금천(金川)에서 칙사를 보낸 뒤에 머물러서 오시수를 기다렸다가 장효례의 말을 상세히 언급하였더니, 오시수가 말하기를, ‘두 번 제사를 설행하는 것은 전에 없던 일이다.’ 하므로 탐문(探問)하게 하였더니, ‘대개 영감이 장효례에게 들은 것과 같은데, 영감이 장차 계문(啓聞)하려 하는가? 칙사의 행차가 서울에 이르기 전에 의례 인견(引見)하는 일이 있으니, 내가 마땅히 아뢰겠다.’ 하였습니다. 신도 이미 대단한 이야기가 없었고, 원접사도 스스로 들은 것이 있어서 아울러 아뢰려고 하는 것이니, 쓸데없이 계문할 것 없다고 생각하였었는데, 근일에 전하는 말을 들으니, 오시수가 신하가 강하다는 말을 위에 아뢰고 또 신도 함께 들었다는 것을 증거로 삼았다 하니, 신은 참으로 놀랍고 괴이하게 여깁니다, 신이 황주에 있을 때에 원접사가 용천(龍川)에서 이른바 신하가 강하다고 하는 말을 들었다는 말을 들었으나, 오시수는 목구멍의 병이 한창 심하여 편히 말하지 못하였고, 금천에 이르렀을 때에는 장효례와 만났다는 것과 약간의 이야기를 말하였을 뿐이며, 신하가 강하다는 말은 그 자리에서 나오지 않았는데, 오시수가 신을 증거로 삼은 것은 또한 무슨 까닭인지 모르겠습니다. 이번 칙사의 행차가 내려올 때에 오시수를 만나서 전일에 문답한 말을 상세히 말하고, 그가 탑전(榻前)에서 주대(奏對)한 말을 물었더니, 오시수가 말하기를, ‘금천에서 상대하였을 때에 신하가 강하다는 말을 한 듯하므로, 과연 황해 감사(黃海監司)도 이 말을 들었다고 아뢰었는데, 이제 영감의 말을 들으니 마음에 매우 미안하다.’ 하고, 또 한 가지 논의를 말하기를, ‘영감이 장효례를 만난 것을 그르다고 한 것은 내가 말하였으나, 지금 영상(領相)이 만윤(灣尹)249) 으로 있을 때와 서백(西伯)250) 으로 있을 때에도 좋은 술을 놓고 통관(通官)들을 불러 대접한 것이 여러번인데, 더구나 영감이 당한 것은 갑작스러운 일이었으니, 내가 당하였더라도 영감이 처치한 것과 같이 하는 데에 지나지 못하였을 것이다. 이것을 동료들에게 힘써 말하였더니, 다들 옳게 여겨서 그 논의가 드디어 그쳤다.’ 하였습니다.

장효례를 만난 일은 신에게 있었으므로 본디 그 죄를 심문받아야 마땅하나, 신하가 강하다는 말로 말하면 장효례와 만났을 때에 신하가 강하다[臣强]는 두 자가 전혀 장효례의 입에서 나오지 않았는데, 신이 무슨 생각이 있어서 이 말을 보태어 장효례의 말이라 하여 오시수에게 전하겠습니까? 더구나 신이 장효례와 수작한 말은 오시수에게 말하였을 뿐만 아니라, 오시수가 오기 전에도 도내(道內)의 수령(守令)들에게 말하였으며, 이 말이 이미 관서(關西)에서 나왔다면 이것은 숨길 것이 아닌데, 어찌 수령에게 말하지 않은 것을 오시수에게 말하였겠으며, 저들과 상대하여 이야기한 것을 한 마디 말이라도 어찌 범연히 듣고 늘여서 전하였겠습니까? 단연코 그럴 리는 아주 없습니다. 신이 참으로 장효례에게서 들은 것이 있다면, 들은 것을 사람들에게 전하여도 본디 이상한 일이 아닐 것이며, 참으로 오시수에게 전한 것이 있다면 오늘 말이 나온 근원의 증거로 할 것인데, 신이 또한 무엇을 꺼려서 하지 않겠습니까? 단지 신이 처음부터 들은 것이 없고 전한 것도 없는데, 본색(本色) 밖에 나머지 말을 보태어 내고 신을 끌어대어 증거로 삼으니, 그것도 이상합니다. 어찌 오시수가 얻어 들은 것을 증거로 삼기 어려운 바가 있기에 신을 끌어대어 굳이 증거로 삼으며, 또한 신하가 강하다는 말을 이미 전에 듣고 나서 베푼 것이 있지 못하였다는 말이 또 신의 입에서 나왔다면, 깊은 병을 지녀 왔다는 어맥(語脈)으로 삼지 않고서 신하가 강하다는 증험으로 삼는 것입니까? 신이 불행히 만나지 않아야 할 사람을 만나서 또 밝히지 않아야 할 일을 밝힌데다가, 더구나 오시수가 분명하지 않게 기억하든 기억하지 못하든 간에 신을 억지로 증거로 삼았으니, 신을 가볍게 여기고 신을 쉽게 여겨 신이 있든 없든 무시한 것이 심합니다. 남의 말거리로 잠시 조롱받는 것도 신은 참으로 부끄럽게 여기는데, 어찌 낯을 들고 한 도(道)의 풍헌(風憲)의 직임에 있겠습니까?"

하니, 답하기를,

"장효례에게 물어서 이미 알았으니, 경(卿)은 사퇴하지 말라."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2책 3권 16장 B면【국편영인본】 38책 256면
  • 【분류】
    정론-정론(政論) / 외교-야(野) / 풍속-풍속(風俗) / 인사-임면(任免) / 사법-탄핵(彈劾)

  • [註 249]
    만윤(灣尹) : 의주 부윤(義州府尹).
  • [註 250]
    서백(西伯) : 평안도 관찰사.

黃海道觀察使尹堦上疏曰:

臣之迎勑在黃州也, 大通官張孝禮招臣譯學言, 欲與臣相見, 蓋臣從祖故相臣家在靑坡, 孝禮靑坡人也。 臣之祖父故判書臣, 嘗入其家, 家旣與孝禮相近, 而年又同庚, 兒時嬉戲, 不得不相熟也。 臣以不可私覿答之, 至平山則臣所處, 適與渠館隔一墻。 渠先使差備譯官, 傳來見之意, 而徒步隨至, 直入臣之房中, 雖欲避之, 其勢未及。 臣不爲起動, 使之還去則曰: "鄭萬和令監, 【俗稱通政以上爲令監。】 亦吾少時雅, 按本道時, 招我相見。 今使道 【俗稱連帥爲使道。】 則責其來見, 吾深有憾。" 云。 臣意不可驅逐而生怒, 强與酬酢, 則臣之以濟州牧使被罪曲折及渠所知我國人窮達死生, 皆能道其詳。 臣於語次言: "皇帝則特軫本國荐飢, 不受方物。 汝等則今番求索, 比前十倍, 何不體皇帝意也?" 渠曰: "唯唯。" 仍曰: "皇帝聞先王之訃, 極其驚悼。 且悲先王之積年沈痼, 不能有所施爲, 而遽爾薨殂, 故今此弔問, 特設兩次祀典。" 云。 臣嫌其言語之漸蔓, 言其久坐不可之意, 則渠卽起去。 其間說話如斯而已。 其日遠接使吳始壽以病不得偕臣於金川。 送勑之後, 留待始壽, 詳及孝禮說話, 則始壽曰: "再次設祭, 前所未有, 故使之探問, 則槪如令監之聞於孝禮者。 令監將欲啓聞耶? 勅行未及京前, 例有引見之事, 我當陳達云。" 臣亦思之, 旣無大段說話, 遠接使自有所聞, 而兼欲陳達, 則不必贅爲啓聞矣。 近日竊聞傳說之言, 則始壽以臣强之說, 陳達於上, 而又以臣亦與聞爲證, 臣誠驚怪。 臣在黃州時, 得聞遠接使聞所謂臣强之說於龍川云云, 而始壽喉病方劇, 不能穩話, 到金川時, 只言與孝禮相見, 若干說話而已, 臣强之說, 不出於席上, 而始壽之以臣爲證, 抑何歟? 今番勑行下來時, 逢着始壽, 詳言前日問答之說, 叩其榻前奏對之辭, 則始壽言: "金川相對時, 似有臣强之說, 故果以黃海監司亦聞是說陳達矣。 今聞令監之言, 心甚未安。" 且言: "一種論議, 以令監見孝禮爲非, 吾爲言, 卽今領相爲灣尹、爲西伯時, 置美酒, 招接通官輩數矣。 況令監所遭, 出於倉卒, 雖使吾當之, 亦不過如令監所處矣。 以此力言於儕輩, 則皆以爲然, 其議遂寢。" 云。 見孝禮一節, 臣旣有之, 固當聽其勘罪, 而至於臣强之說, 孝禮相見時, 臣强二字, 全不出於孝禮之口, 臣有何意思, 添加是說, 以爲孝禮說, 而傳於始壽歟? 況臣之與孝禮酬酢之說, 不但言之於始壽, 始壽未到之前, 亦嘗言之於道內諸守令, 而此言旣發於關西, 則此非秘諱者也。 豈有以不言於守令者, 言於始壽乎? 與彼人相對說話, 雖一語一句, 何曾泛聽而衍傳耶? 其斷斷無是理也, 萬萬矣。 設令臣實有所聞於孝禮, 則以所聞傳諸人, 固非異事, 實有所傳於始壽, 則爲今日言根之證, 臣亦何憚而不爲? 第臣初無所聞, 亦無所傳, 而添出剩語於本色之外, 據臣而爲證, 其亦異哉。 豈始壽所得聞者, 有難爲據, 乃引臣而强以爲證耶? 抑臣强之說, 旣聞於前, 而不能有施爲之語, 又發於臣口, 不以爲沈痼帶來之語脈, 而乃以爲臣强之契驗耶? 臣不幸見不當見之人, 又證不當證之事, 況始壽依俙記不記間, 勒臣爲證, 則輕臣易臣, 不爲有無臣者甚矣。 爲人口實閃弄, 臣實恥之, 豈可抗顔於一道風憲之任哉?

答曰: "問孝禮, 旣已知之, 卿其勿辭。"


  • 【태백산사고본】 2책 3권 16장 B면【국편영인본】 38책 256면
  • 【분류】
    정론-정론(政論) / 외교-야(野) / 풍속-풍속(風俗) / 인사-임면(任免) / 사법-탄핵(彈劾)