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
상세검색 문자입력기
숙종실록3권, 숙종 1년 3월 5일 계해 1번째기사 1675년 청 강희(康熙) 14년

동지 겸 사은사 복창군 이정 등이 북경에서 돌아오다

동지 겸 사은사(冬至兼謝恩使) 복창군(福昌君) 이정(李楨) 등이 북경(北京)에서 돌아왔다. 임금이 인견(引見)하고 저들의 일은 물으니, 이 말하기를,

"동팔참(東八站)186) 부터 강을 따라 2백 리의 땅을 아양(莪陽)이라 부르고 보(堡)를 설치하여 군사를 더 보탰다 하는데, 우리 나라의 창성(昌城) 땅과 멀지 않은 곳입니다."

하자, 허적(許積)이 말하기를,

"이번에 보를 설치한 것은 뒷날 달아나 돌아갈 때에 멈추어 있을 곳으로 삼을 생각이거나, 우리를 의심하여 방수(防守)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두 가지 다 염려스럽습니다."

하였다. 등이 말하기를,

"부역(賦役)이 매우 간략하여 백성은 오히려 청인(淸人)이 패배할까 염려하고, 군사를 징발하여 싸움에 나아가는 것도 만인(滿人)이 많고 한인(漢人)이 적으므로, 【만인은 곧 청인이다.】 한인은 또한 변란을 일으킬 마음이 없습니다. 저들은 우리가 정금(鄭錦)에게 붙을까 의심하고, 관(關)187) 밖의 진보(鎭堡)에 군사를 보태어 방수합니다. 호황(胡皇)이 친히 교장(敎場)에 가서 조총(鳥銃)을 가장 좋은 병기로 여겨 손수 쏘아 봅니다."

하였다. 이 또 말하기를,

"사로잡혀 간 손후섬(孫後贍)이라는 자가 방물(方物)을 바칠 때에 주선한 힘이 많았습니다."

하니, 허적도 칭찬하여 그 아우 손후업(孫後業)을 둔전 감관(屯田監官)에 차임(差任)하여 그 마음을 위로하기를 청하고, 허적이 또 말하기를,

"어제 보니, 부사(副使)가 말하려는 것이 있었는데, 장효례(張孝禮)가 그만두기를 권하여 그만두었습니다. 신이 그 말하려던 일을 알아보게 하였더니, 곧 오시수(吳始壽)가 아뢰었던 ‘신하가 강하다.’는 말이었습니다. 이 말은 매우 해괴하나, 반드시 우리 나라 사람이 말한 것인데, 이미 지난날에 있었던 일이니, 족히 염려할 것이 못됩니다."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2책 3권 2장 A면【국편영인본】 38책 249면
  • 【분류】
    외교-야(野)

  • [註 186]
    동팔참(東八站) : 압록강(鴨綠江)에서 중국의 산해관(山海關) 사이에 있던 여덟 군데의 역참(驛站). 우리 나라의 사신이 중국에 왕래하는 데 중요한 요로(要路)였음.
  • [註 187]
    관(關) : 산해관(山海關).

○癸亥/冬至兼謝恩使福昌君 等, 廻自北京。 上引見, 問彼中事, 曰: "自東八站, 沿水二百里地, 號莪陽, 設堡添兵云, 與我國昌城地不遠處也。" 許積曰: "今此設堡, 無乃爲他日走歸時居停計耶? 抑疑我而防守耶? 俱可慮也。" 等曰: "賦役甚簡, 民猶恐淸人之見敗。 徵兵赴戰, 滿多而少, 【滿卽淸人也。】漢人亦無思亂之心。 彼疑我貳於鄭錦, 關外鎭堡, 添兵防守。 胡皇親往敎場, 以鳥銃爲兵器之最良者, 手自試放。" 又言: "被擄人孫後贍者, 納方物時, 多有周旋之力。" 許積亦稱之, 請以其弟後業差屯田監官, 以慰其心。 又曰: "昨日見副使, 欲有所言, 因張孝禮勸止而止之。 臣使探其欲言之事, 乃吳始壽所陳臣强之說也。 此言甚是怪愕, 必我國人語, 而事在旣往, 不足憂矣。"


  • 【태백산사고본】 2책 3권 2장 A면【국편영인본】 38책 249면
  • 【분류】
    외교-야(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