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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종실록2권, 숙종 1년 1월 16일 을해 1번째기사 1675년 청 강희(康熙) 14년

사학 유생 박태두 등이 송시열의 죄목을 신변하는 상소

사학(四學)의 유생(儒生) 박태두(朴泰斗) 등이 수천여 말을 상소(上疏)하여 송시열(宋時烈)의 죄상을 합계(合啓)한 것을 조목마다 신변(伸辨)하였다. 대략,

"지금 송시열을 죄 주는 것은 예(禮)를 의논한 것을 죄안(罪案)으로 삼았으나, 이른바 임금을 폄손(貶損)하였다는 것은 또한 이 예를 의논한 것 이외의 다른 죄입니다. 송시열이 폄손하였다는 것은 한낱 서(庶)자를 뽑아내어 말을 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데, 고금의 예경(禮經)에는 적처(嫡妻)가 낳았더라도 둘째 아들 이하는 다 서라 칭하였으므로 한유(漢儒)가 무왕(武王)을 성서(聖庶)라 하였거니와, 이제 서(庶)자는 첩자(妾子)로 단정하여 효종께 가(加)한 것이라고 송시열의 죄를 만드니, 이것이 인정과 사리에 과연 그럴듯한 것입니까? 또 이른바 조정의 권세를 잡았다고 하는 것은 예전부터 소인이 선량(善良)한 사람을 모함하여 해칠 때에 이것을 효시(嚆矢)로 삼거니와 우리 조정에서는 기묘년의 화(禍)074) 때에 남곤(南袞)·심정(沈貞) 등이 밤에 신무문(神武門)075) 으로 들어와 바로 이 술책을 썼는데, 이제 대각(臺閣)의 신하가 그 여모(餘謀)를 이어 써서 마치 같은 바퀴 자국에서 나온 듯하니, 아! 두렵습니다. 경자년076) 이래로 예론(禮論)을 핑계삼아 화를 떠넘기려 한 자는 그 수가 얼마인지 모르는데, 선대왕(先大王)께서 일체 물리치시어 간사한 자가 자취를 감추었으므로, 사류(士類)가 이를 힘입었습니다. 그러나 윤선도의 흉악하고 무함한 것은 또 그 중에서 특히 심한 것이므로 선대왕께서 친히 윤선도를 죄줄 것을 전교(傳敎)하셨으니, 이것으로 미루어 보면 그때 여러 사람을 폐기한 것은 성의(聖意)에서 나온 것이고 송시열이 간여할 수 없는 것이었음을 또한 알 수 있습니다. 궁검(弓儉)을 겨우 끼치시고077) 산릉(山陵)의 일을 겨우 마쳤으므로 오르내리시는 영(靈)이 그 위에 계신 듯한데 감히 이런 말을 하여 전하를 속이니, 이런 일도 차마 할 수 있는데 무슨 일인들 차마 할 수 없겠습니까? 송준길(宋浚吉)로 말하면 송시열과 함께 효종의 지우(知遇)를 입었고, 선조(先朝)에서도 빈사(賓師)로 대우하고 이미 죽은 뒤에는 포증(褒贈)하는 분부를 특별히 내리셨으므로, 처음에나 마지막에나 유감이 없었다 하겠는데 도리어 관작(官爵)을 추삭(追削)하려 하니, 전하께 뜻을 잇고 사업을 수행하기를 권하는 도리에 있어서 과연 어떠하겠습니까? 이유태(李惟泰)는 양조(兩朝)에서 또한 유일(遺逸)로 대우하고 경재(卿宰)로 총애하셨는데 차고 밟아 능욕하여 천례(賤隸)와 같이 보니, 그 분노하여 해독을 주는 정상이 장차 어디엔들 이르지 못하겠습니까?

또 듣건대 양사(兩司)에서 청대(請對)하였을 때에 천의(天意)가 조정을 진정(鎭定)하려고 그 청을 윤허하지 않으셨더니 저 양사는 진정하는 방도는 오직 대계(臺啓)를 속히 윤허하는 데에 있을 뿐이라고 말하기까지 하고, 이미 윤허하신 뒤에는 조정은 진정될 수 있고 신료(臣僚)들은 공경하고 화합할 수 있고 나라의 일은 성취될 수 있다고 하였다 하니, 아! 그 또한 너무 심합니다. 이제는 전하께서 이미 그 청을 윤허하셨거니와, 이 뒤로 조정이 과연 안정(安靖)되고 조정의 신하들이 과연 공경하고 화합되며 나라의 일이 과연 성취되는지 살펴보소서. 전하께서 여기에서도 오히려 그 진심을 보지 못하신다면 신들이 다시 어찌 바랄 것이 있겠습니까? 예전에 성왕(成王)이 유충(幼冲) 한 나이에 삼숙(三淑)의 유언(流言)078) 을 만나 주공(周公)을 자리에서 피하여 동도(東都)에 있게 하였는데, 그 뒤에 풍뢰(風雷)의 재변 때문에 금등(金縢)의 글079) 을 열어보고 나서 주공을 맞이하였습니다. 이번 홍관(虹貫)080) 의 재변이 정월에 나타났으니, 황천(皇天)이 우리 전하에게 경고(警告)하여 또한 성왕주공을 대우한 것처럼 깨닫게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였는데, 이날 인견(引見) 때에 임금이 말하기를,

"사학(四學)의 소(疏)는 지극히 음울하고 참혹한데, 정원(政院)은 임금의 명을 업신여기고 배척하는 말만을 두려워하여 태연히 받아들였으니, 승지(承旨)는 추고(推考)하고 소두(疏頭) 박태두(朴泰斗)정거(停擧)081) 하라."

하고, 또 말하기를,

"근래 이들은 송시열을 죄주었기 때문에 장차 나라를 망치게 될 것이라 하니, 이제야 비로소 송시열의 세력이 두려운 것을 알겠다. 죄주지 않으면 거의 국가를 그르칠 것이다."

하였다. 이때 송시열을 구제하는 자는 나라를 그르치는 소인이라 하고, 송시열을 배척하는 자는 정인 군자(正人君子)라 하였는데, 다 서(西)·남(南)의 색목(色目)082) 가운데에서 나오지는 않았으나, 배척하는 자는 거의 다 이익을 좋아하고 염치가 없는 무리이고, 구제하는 자는 다 평소에 사류(士類) 안에 든 사람이었으므로, 현사(賢邪)·시비(是非)는 알기 어렵지 않은데, 이제 임금은 전에 송시열의 세력이 두려웠다고 말하되, 송시열을 갈음한 당국자의 세력이 두려운 줄 모르니, 임금의 귀가 가리워 현혹됨이 모두 이 지경에 이르렀는가?


  • 【태백산사고본】 1책 2권 11장 B면【국편영인본】 38책 235면
  • 【분류】
    정론-정론(政論) / 정론-간쟁(諫諍) / 사법-행형(行刑) / 사법-탄핵(彈劾) / 역사-전사(前史) / 왕실-의식(儀式) / 왕실-국왕(國王) / 교육-인문교육(人文敎育)

  • [註 074]
    기묘년의 화(禍) : 중종(中宗) 14년(1519)에 남곤(南袞)·심정(沈貞)·홍경주(洪景舟) 등이 조광조(趙光祖)·김정(金淨) 등을 모함하여 사사(賜死) 또는 유배(流配)시킨 사건, 즉 기묘 사화(己卯士禍)를 말함.
  • [註 075]
    신무문(神武門) : 경복궁의 북문.
  • [註 076]
    경자년 : 1660 현종 원년.
  • [註 077]
    궁검(弓儉)을 겨우 끼치시고 : ‘승하하신 지 얼마 안되고’의 뜻. 중국 상고(上告)에 황제(黃帝)가 용을 타고 승천(昇天)할 때에 따라 타지 못한 소신(小臣)들이 용의 수염에 매달렸다가 수염이 뽑혀 떨어지고 황제의 활이 떨어지니 백성이 그 활을 안고 울부짖었다는 옛이야기에서 나온 말.
  • [註 078]
    삼숙(三淑)의 유언(流言) : 삼숙(三淑)은 주 무왕(周武王)의 아우인 관숙(管叔)·채숙(蔡叔)·곽숙(霍叔). 무왕이 죽은 뒤에 이들이 유언(流言)하여 ‘주공(周公)은 유자(孺子:성왕(成王)을 가리킴)에게 이롭지 않을 것이다.’ 하였음.
  • [註 079]
    금등(金縢)의 글 : 무왕이 은(殷)을 토평하고 이태 만에 편찮았는데, 주공이 제단을 만들고 그 조상인 태왕(太王)·왕계(王季)·문왕(文王)에게 고하여 자신이 무왕의 목숨을 대신하기를 빌고 돌아와 그 축책(祝冊)을 금등의 궤안에 담아 두었다. 삼숙의 유언이 있고 나서 동도(東都) 낙읍(洛邑)에 2년 동안 있다가 유언한 죄인을 알아내고서 시(詩)를 지어 성왕에게 보내니 왕이 대부(大夫)들과 함께 금등의 글을 내어 보고 주공의 마음을 알고는 주공을 돌아오게 하고, 왕이 몸소 교외에 나가 맞이하였음.
  • [註 080]
    홍관(虹貫) : 백홍 관일(白虹貫日).
  • [註 081]
    정거(停擧) : 과거에 응시하지 못하게 하는 형벌. 조상(祖上)의 하자(瑕疵)가 있거나 자신의 부정(不正)이 있을 때 유생(儒生)에게 내리던 형벌임.
  • [註 082]
    서(西)·남(南)의 색목(色目) : 조선조 때의 사색 당파(四色黨派).

○乙亥/四學儒生朴泰斗等上疏數千餘言, 將合啓罪狀宋時烈者, 逐條伸辨, 略曰:

今之罪時烈者, 以議禮爲案, 而所謂貶損君父, 又是議禮外別罪也。 以時烈爲貶損者, 不過拈出一庶字爲言, 而古今禮經, 雖嫡妻所出, 第二以下則皆稱爲庶, 故儒以武王爲聖庶。 今以庶字, 斷爲妾子, 而加之於孝廟, 爲時烈之罪, 此於人情事理, 果有近似者耶? 且其所謂把握朝權云者, 自古小人, 陷害善良, 以此爲嚆矢。 我朝己卯之禍, 等之夜入神武門, 正用此術。 今之臺閣之臣, 祖述餘謀, 若出一轍, 吁可畏哉。 自庚子以來, 假托禮論, 欲以嫁禍者, 不知其幾何, 而先大王一切揮斥, 奸回屛迹, 士類是賴。 善道之兇悖誣陷, 又其特甚者, 先大王手敎罪善道。 以此推之, 當時廢棄諸人, 出於聖意, 而非時烈之所得與, 亦可知也。 弓劍纔遺, 山陵甫畢, 陟降之靈, 如在其上, 而敢爲此說, 以欺殿下, 此而可忍, 孰不可忍? 至於宋浚吉, 與時烈同被孝廟之知遇, 先朝亦待以賓師。 旣沒之後, 特下褒贈之敎, 終始之際, 可謂無憾。 而反欲追削官爵, 其於勸殿下以繼志述事之道, 果何如也? 李惟泰兩朝亦遇以遺逸, 寵以卿宰者, 而蹴踏凌辱, 視同賤隷, 其忿毒之狀, 將何所不至也? 且聞兩司之請對也, 天意欲鎭定朝著, 而不許其請, 則彼兩司者至以爲: "鎭定之道, 惟在於速允臺啓, 旣允之後, 則朝廷可以鎭定, 臣僚可以寅協, 國事可以做成。" 云。 噫嘻! 其亦太甚矣。 今則殿下旣允其請矣。 試觀自今以後, 朝廷果得安靖, 朝臣果得寅協, 國事果得做成乎? 殿下於此, 猶未見其肺肝, 則臣等更安所望哉? 昔成王幼沖之年, 値三叔流言, 使周公避位居東, 後因風雷之變, 啓金滕之書, 而後迎周公。 今此虹貫之變, 乃見於首歲之月, 無乃皇天警告我殿下而使之覺悟, 亦如成王之待周公者乎?

是日引見, 上曰: "四學之疏, 極其陰慘。 政院不有君上之命, 只畏侵斥之言, 偃然捧入, 承旨推考, 疏頭朴泰斗停擧。" 且曰: "近來, 此輩以罪時烈爲將亡國, 今而後始知時烈勢焰之可畏。 若不罪之, 幾誤國家。" 時, 救時烈者則指爲誤國小人; 斥時烈者則謂之正人君子, 皆不出於西南色目之中。 而然其斥之者, 率多嗜利無恥之輩, 而救之者, 皆是平日士類中人也。 賢邪是非, 不難知也, 而今上乃謂向時時烈勢焰之可畏, 而不知代時烈當局者勢焰之可畏, 君聽之蔽惑, 一至此哉!


  • 【태백산사고본】 1책 2권 11장 B면【국편영인본】 38책 235면
  • 【분류】
    정론-정론(政論) / 정론-간쟁(諫諍) / 사법-행형(行刑) / 사법-탄핵(彈劾) / 역사-전사(前史) / 왕실-의식(儀式) / 왕실-국왕(國王) / 교육-인문교육(人文敎育)