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세자의 즉위 교서
왕세자가 인정문(仁政門)에서 즉위(卽位)하였다. 왕비(王妃)를 높여서 왕대비(王大妃)로 삼고, 빈(嬪) 김씨(金氏)를 왕비(王妃)로 삼았으며 교서(敎書)를 반포하여 대사(大赦)하였다. 그 교서(敎書)의 글은 아래와 같다.
"왕은 이와 같이 말한다. 하늘이 우리 가문(家門)에 재앙을 내리어 갑자기 큰 슬픔017) 을 만났으므로, 소자(小子)018) 가 그 명령을 새로 받게 되니, 군신(群臣)의 심정(心情)에 힘써 따라서 이에 신장(腎腸)019) 을 펴게되어 더욱 기(氣)가 꺾이고 마음이 허물어지는 듯하다. 국조(國朝)에서 왕통(王統)을 전함은 당우(唐虞)020) 와 융성(隆盛)을 견줄 만하였다. 종(宗)은 덕(德)으로서, 조(祖)는 공(功)으로서, 성현(聖賢)이 6대 7대나 일어났으며, 문모(文謨)021) 와 무열(武烈)022) 로서 자손에게 억만년을 물려 주셨다. 삼가 생각하건대, 대행 대왕(大行大王)께서는 진실로 잘 계술(繼述)023) 하셨다. 효우(孝友)는 마음을 따라 절로 일어났고 풍화(風化)는 사방에 미쳤으며, 청명(淸明)024) 은 자신(自身)에 있었고 기욕(嗜欲)은 물러나게 되었다. 하늘의 노함을 공경하여 한결같이 지성(至誠)으로 대하니, 성실에 감응(感應)하는 것이 메아리가 응하듯 하였고, 백성의 빈궁을 진휼(賑恤)함이 거의 빈 해가 없었으니, 도탄(塗炭)에 헤매던 사람이 모두 살게 되었으며, 영왕(寧王)025) 이 이루지 못한 공(功)을 장차 넓히려 하였고, 우리 조선의 위대할 수 있는 업(業)을 크게 세우려 하셨다. 효심(孝心)은 한이 없으되, 비통(悲痛)은 겨우 경렴(鏡奩)026) 에 맺혀졌고, 몽령(夢齡)027) 이 징조가 없으니 유명(遺命)이 갑자기 옥궤(玉几)028) 에서 공언(公言)되었다. 병환이 나서 열흘이 되었는데도 약은 효과가 나지 않았으며, 내 몸이 대신 죽으려는 성심이 간절했는데도 신(神)이 굽어 살피지 않았었다. 종천(終天)029) 까지 이르는 거창(巨創)한 일을 당했으니 큰 소리로 부르짖어도 미칠 수가 없었으며, 엄한 훈계를 받들 시일(時日)이 없게 되었으니 보잘것 없는 작은 내 몸이 어디에 의지하겠는가?
더구나 이 대위(大位)030) 를 갑자기 계승하게 되니, 나로 하여금 지정(至情)을 억제하게 한다. 그러나 종묘·사직(社稷)의 큰 책임은 실로 후인(後人)에게 있으므로, 부형(父兄)·백관(百官)들이 같은 말을 하니 중인(衆人)의 소망을 막기가 어려웠다. 자성(慈聖)031) 의 자상한 유시(諭示)를 우러러 본받아 성주(成周)의 예전 법도를 따랐다. 이에 본년(本年) 8월 23일 갑인(甲寅)에 인정문(仁政門)에서 즉위(卽位)하여 왕비(王妃)를 높여서 왕대비(王大妃)로 삼고, 빈(嬪) 김씨(金氏)를 왕비(王妃)로 삼는다. 욕의(縟儀)032) 를 대하매 슬퍼서 부르짖게 되고, 중기(重器)033) 를 주관하매 두려워서 마음이 편안하지 못하다. 부왕(父王)의 자리에 앉아 부왕의 예절을 행하니 사모함이 갱장(羹墻)034) 에 더욱 돈독하게 되고, 중대하고 어려운 책임을 맡게 되니 두려움은 실로 연곡(淵谷)035) 보다 깊었다. 역대 임금의 큰 사업을 계승했으니, 어찌하면 하늘의 착한 명령을 맞이할 수 있겠으며, 선왕(先王)의 끼친 백성을 다스리게 되니, 어찌하면 우리 나라를 어루만져 편안하게 할 수 있겠는가? 다만 혹시 부왕(父王)의 사업을 무너뜨릴까를 두려워할 뿐인데, 어찌 숙소(夙宵)036) 의 조심을 조금이라도 늦추는 것을 감내하겠는가?
마침내 큰 칭호037) 를 공포(公布)하여, 모든 품계(品階)에게 두루 미치게 한다. 본월(本月) 23일 어둑새벽 이전부터 잡범(雜犯)으로서 사죄(死罪) 이하는 모두 용서해 주고, 관직에 있는 사람은 각기 한 자급(資級)을 올리되 자궁(資窮)038) 한 자는 대가(代加)039) 한다. 아! 공을 도모하여 일을 마쳐서 시종(始終) 쇠퇴(衰頹)하지 않기를 원하고, 과오를 고치고 흠을 씻어버려 생육(生育)에까지 모두 용서되기를 바란다. 이런 까닭으로 이에 교시(敎示)하니 마땅히 죄다 알고 있을 것이다." 【대제학 김만기(金萬基)가 지어 올렸다.】
이날 성복(成服)을 마치고 왕세자가 관면(冠冕)과 길복(吉服)을 갖추고, 규(圭)를 쥐고 여차(廬次)040) 로부터 걸어가면서 곡(哭)하였다. 내시(內侍) 2인이 좌우(左右)에 끼고 보호하여 선정전(宣政殿) 동쪽 뜰에 나아가 빈전(殯殿)을 향하여 사배례(四拜禮)를 행하고, 섬돌에 올라가 전내(殿內)의 향안(香案) 앞으로 들어가서 향을 피우고는 내려와 그전 자리로 돌아와서 또 네 번 절하고 동쪽 행랑의 막차(幕次)로 들어갔다. 조금 후에 왕세자가 선정문(宣政門)으로부터 걸어 나와서 연영문(延英門)을 따라 가서 숙장문(肅章門)을 나와서 인정문(仁政門)에 이르니, 승지와 사관(史官)이 따라 나갔다. 왕세자가 서쪽을 향하여 어좌(御座) 앞에 서서 차마 자리에 오르지 못하고 소리를 내어 슬피 울기를 그치지 아니하였다. 승지와 예조 판서가 서로 잇달아 임금의 자리에 오르기를 권하였다. 삼공(三公)이 도승지와 더불어 나아가 왕세자를 부축하면서 번갈아 극진히 말하였다. 왕세자가 눈물을 흘리면서 슬피우니, 이 날 뜰에 있던 백관(百官)과 군병(軍兵)으로서 목소리를 내지 못할 정도로 울부짖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왕세자가 어좌(御座)에 오르니, 백관들이 사배(四拜)하고 의식대로 산호(山呼)하였다. 예를 마치자, 사왕(嗣王)이 인정문(仁政門)으로부터 인정전(仁政殿)에 올라가 인화문(仁和門)으로 들어와서 여차(廬次)로 돌아왔는데, 우는 것이 끊어지지 않았으며 소리가 밖에까지 들렸다.
- 【태백산사고본】 1책 1권 2장 B면【국편영인본】 38책 207면
- 【분류】왕실-비빈(妃嬪) / 왕실-의식(儀式) / 왕실-국왕(國王) / 사법-행형(行刑) / 어문학-문학(文學) / 인사-관리(管理)
- [註 017]큰 슬픔 : 국상(國喪)을 이름.
- [註 018]
소자(小子) : 자기를 낮추는 말.- [註 019]
신장(腎腸) : 진심(眞心)이란 말.- [註 020]
당우(唐虞) : 요순(堯舜).- [註 021]
문모(文謨) : 문치(文治).- [註 022]
무열(武烈) : 무공(武功).- [註 023]
계술(繼述) : 전인(前人)이 하던 일이나 뜻을 이어감.- [註 024]
청명(淸明) : 깨끗하고 밝은 마음.- [註 025]
영왕(寧王) : 효종(孝宗)을 이름.- [註 026]
경렴(鏡奩) : 거울을 넣은 상자. 《후한서(後漢書)》 음황후기(陰皇后記)에 의하면, 황제가 태후(太后)의 경렴(鏡奩) 속의 물건을 보고서 감동하여 슬퍼서 눈물을 흘렸다고 함.- [註 027]
몽령(夢齡) : 주(周)나라 무왕(武王)의 꿈에 천제(天帝)가 무왕에게 90세의 장수(長壽)를 주었다는 고사(故事)를 말함.- [註 028]
옥궤(玉几) : 옥으로 장식한 안석(案席). 주(周)나라 성왕(成王)이 임종시(臨終時)에 옥궤(玉几)에 기대어 고명(顧命:유명(遺命))을 전달한 일이 있었음.- [註 029]
종천(終天) : 이 세상의 끝.- [註 030]
대위(大位) : 왕위.- [註 031]
자성(慈聖) : 왕대비.- [註 032]
욕의(縟儀) : 상복(喪服)의 의식과 절차.- [註 033]
중기(重器) : 왕위(王位).- [註 034]
갱장(羹墻) : 전왕(前王)을 사모한다는 말임. 옛날에 요제(堯帝)가 별세한 후에 순제(舜帝)가 3년 동안을 앙모(仰慕)했는데, 앉으면 요제를 담(墻) 안에서 보고, 밥을 먹으면 요제를 국[羹]그릇에서 보았다는 고사(故事)가 있음.- [註 035]
연곡(淵谷) : 깊은 소와 골짜기.- [註 036]
숙소(夙宵) : 이른 아침부터 밤 늦게까지.- [註 037]
큰 칭호 : 왕의 칭호.- [註 038]
자궁(資窮) : 당하(堂下) 최고의 자급(資級)인 정3품 하계(下階), 곧 동반(東班)의 통훈 대부(通訓大夫), 서반(西班)의 어모 장군(禦侮將軍)에 이르는 것.- [註 039]
대가(代加) : 자궁(資窮) 등의 이유 때문에 자급(資級)이 오를 당자를 갈음하여 아들·사위·아우·조카 등에게 자급을 올려주는 것.- [註 040]
여차(廬次) : 상주가 거처하는 자리.○甲寅/王世子卽位於仁政門。 尊王妃爲王大妃, 以嬪金氏爲王妃。 頒敎, 大赦。 其敎文曰:
王若曰, 皇天降割我家, 奄罹大戚, 小子新服厥命, 勉循群情, 玆敷腎腸, 益增摧隕。 粤若國朝垂統, 庶幾唐、虞比隆, 宗德祖功, 邁聖賢六七之作, 文謨武烈, 貽子孫億萬斯年。 恭惟大行大王, 允矣, 善繼善述。 孝友因心而風化旁達; 淸明在躬而嗜欲退聽。 敬天怒, 一以至誠, 孚應如響; 振民窮, 殆無虛歲, 焦枯咸濡, 將恢寧王未集之勳, 丕建吾東可大之業。 孝思罔極, 痛纔結於鏡奩; 夢齡無徵, 命忽揚於玉几。 遘疾旬浹, 而藥罔奏效; 代某誠切, 而神不降監。 抱巨創於終天, 叫叩莫逮。 奉嚴訓之無日, 眇末何依? 況玆大位之遽承, 俾也至情之可抑。 然宗廟社稷之丕責, 寔在後人, 而父兄百官之同辭, 難遏衆望。 仰體慈聖之諄諭, 式遵成周之舊章。 乃本年八月二十三日甲寅, 卽位于仁政門, 尊王妃爲王大妃, 以嬪金氏爲王妃。 對縟儀而悲號, 主重器而怵惕。 踐位行禮, 慕彌篤於羹墻; 遺大投艱, 懼實深於淵谷。 纉列聖之洪緖, 若何以迓續天休; 臨先王之受民, 若何以撫綏邦域? 惟恐或隳於堂構, 曷堪少弭於夙宵? 肆大號之播脩, 俾群品而遍曁。 自本月二十三日昧爽以前, 雜犯死罪以下, 咸宥除之。 在官者各加一資, 資窮者代加。 於戲! 圖功卒事, 願不替於始終; 滌垢蕩瑕, 冀竝宥於生育。 故玆敎示, 想宜知悉。 【大提學金萬基製進。】
是日成服訖, 王世子具冠冕吉服, 執圭, 自廬次步出, 且行且哭, 內侍二人, 夾護左右。 詣宣政殿東庭, 向殯殿行四拜禮, 升階入殿內香案前, 焚香降復位, 又四拜, 入東廊幕次。 少頃, 王世子由宣政門步出, 從延英門行, 出肅章門, 至仁政門, 承旨史官隨行。 王世子西向立, 御座前, 不忍上, 號哭不已。 承旨、禮曹判書, 相繼勸進, 三公與都承旨, 進扶王世子, 而交口極陳, 王世子涕泣哀號, 是日在庭者百僚軍兵, 莫不號哭失聲。 王世子升御座, 百官四拜, 山呼如儀。 禮畢, 嗣王由仁政門, 升仁政殿, 入仁和門, 還廬次, 號哭不絶, 聲聞于外。
- 【태백산사고본】 1책 1권 2장 B면【국편영인본】 38책 207면
- 【분류】왕실-비빈(妃嬪) / 왕실-의식(儀式) / 왕실-국왕(國王) / 사법-행형(行刑) / 어문학-문학(文學) / 인사-관리(管理)
- [註 0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