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경 감사 남구만이 북도 관방을 변통한 일에 대해 상소하다
함경 감사 남구만(南九萬)이 상소하여 북도(北道) 관방(關防)을 변통할 일에 대해 수천 언에 이르도록 갖추어 진달하면서 아뢰기를,
"삼수(三水)와 갑산(甲山)은 높고 험한 산맥 밖에 위치해 있어 길이 매우 멀고 잔로(棧路)가 험악합니다. 그런데 길주(吉州) 서북쪽의 보(堡)에 사냥꾼이 다니는 샛길이 있어 갑산으로 갈 수 있는데 거리가 2백여 리 정도로 가깝고 길도 상당히 평이합니다.
또 삼수에서 압록강(鴨綠江)을 따라 수백 리를 내려가다 보면 후주(厚州)094) 의 옛 땅이 나오는데, 어느 해에 설치되었다가 언제 폐지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만, 그 지역이 강의 남쪽에 있는 이상 본래부터 우리 땅이고, 교야(郊野)가 광활한 것이나 전토가 비옥한 것이 기구 척박한 삼수·갑산과는 큰 차이가 있으며, 지세가 점점 아래로 내려오고 기후가 상당히 따뜻한 것 또한 고생스럽고 추운 삼수·갑산보다 훨씬 나은 것은 물론, 서리가 가장 늦게 내려 오곡이 모두 익으니, 참으로 거주할 만한 지역이라 하겠습니다. 지금 만약 다시 후주를 설치한다면 삼수·갑산의 입장에서는 서로 의지하여 응원하는 형세를 취할 수 있고 함흥(咸興)으로서는 진정 울타리로 삼을 수가 있게 되어 밖으로는 아침 저녁으로 도발할 우려가 없어질 것이고 안으로는 그곳으로 이주해 들어가고자 하는 백성이 있게 될 것이니, 아침에 명령을 내리면 저녁에 그 효과를 볼 수 있을 것인데, 도대체 무엇을 꺼려 그렇게 하지 않는단 말입니까.
그리고 여연(閭延)095) 등 폐지된 4개 군(君) 역시 모두 광활하고 토지가 비옥한데 지금까지 폐기되어 있으니 정말 애석하기 그지없습니다.
그러나 조정에서 만약 한꺼번에 이 군들을 모두 복구시키는 것을 어렵게 여긴다면, 우선 별해(別害)에 【보(堡)의 이름임.】 군을 설치하고 후주에 진(鎭)을 두어 백성들이 점차 모이기를 기다리면서 차례로 다시 설치해 나간다 하더라도 혹 늦지 않을 것입니다.
이 세 조목이야말로 변방의 대단한 처치 사항과 관련되기에 신이 도본(圖本)을 그려 올리면서 도내 각 고을 간의 거리와 관방(關防) 요해처(要害處)를 빠짐없이 모두 기재하였으니, 위에서 보시면 그 편부(便否)와 이해가 분명히 모두 뚜렷하게 밝혀질 것입니다."
하였는데, 상이 그 소와 도본을 탑전에서 대신 및 비국의 재신들에게 보여 주었다. 우의정 김수흥(金壽興)이 아뢰기를,
"차유령(車踰嶺) 밖의 토지가 비옥하다는 것은 사실 그러합니다만, 이곳은 바로 옛날에 호인(胡人)이 들어와서 살던 지역이니, 혹시라도 군을 설치한 뒤에 다시 그들이 침탈한다면 일이 매우 난처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철수하여 떠난 지가 거의 50, 60년이나 되는데, 지금 어찌 다시 침탈할 리가 있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곳은 본래 우리 토지였는데도 적이 오면 피하고 적이 떠나면 거하곤 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저들이 이미 강을 한계로 삼은 이상 이곳이 아무리 장성(長城)의 밖이라 하더라도 두만강(豆滿江) 안쪽에 있으니 저들 역시 그들의 땅이 아니라는 것을 알 것이다. 하지만 군을 설치하는 것은 우선 서서히 의논하도록 하고, 무산(戊山)과 양영(梁永)의 만호(萬戶)로 하여금 때때로 순시하게 하면서 봄가을 삼을 캐는 철이 올 때마다 채취를 금한다는 핑계를 대고 강변에 둔을 치고 상주하며 저들의 뜻을 탐색토록 하는 것이 좋겠다. 그리하여 몇 년이 지난 뒤에 그 지역에 그대로 진을 설치한다면 저들의 의심도 사지 않을 것이고 군을 설치하는 일도 점차 이룰 수 있을 것이다."
하였다. 수흥이 아뢰기를,
"길을 닦는 한 조목은 청한 대로 들어주어야 할 듯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험한 곳에 길을 닦는 것은 병가(兵家)에서 크게 금기로 삼는 일이다만, 형세상 그렇게 하는 것이 좋다면 어찌 이런 이유 때문에 길을 닦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러나 저들은 모두 기병(騎兵)이고 보졸(步卒)은 없으니, 길을 닦을 때 대략 수목을 베어내어 인마(人馬)가 겨우 빠져 나갈 수 있게만 하고 평평한 길로 닦지는 말게 하라. 그리고 요해처에 한두 군데 진보(鎭堡)를 설치하여 수비하되 사하(斜下)096) 의 여러 진보 중에서 긴급하지 않은 것을 이곳에 옮겨 설치토록 하고 꼭 별도로 새로운 보를 둘 것까지는 없다."
하였다. 수흥이 아뢰기를,
"후주를 설립하는 일은 요청대로 들어주기가 어려울 듯합니다."
하니, 훈련 대장 유혁연(柳赫然)이 아뢰기를,
"신이 일찍이 관서(關西)에 있을 때 들으니 후주의 토지가 기름져서 이주를 원하는 백성이 많다고 하였습니다. 지금 그곳에 들어가는 것을 허락할 경우, 아침에 영을 내리면 저녁에 이르게 할 수 있습니다."
하고, 병조 판서 김만기(金萬基)가 아뢰기를,
"삼남(三南)은 인물이 성황을 이루고 있는데 근심되는 것은 토지가 좁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서북의 경우는 땅을 꼭 널리 개척할 것까지는 없겠습니다만 형세상 편이하고 토지가 비옥하기만 하다면 또한 어찌 헛되이 내버려 둘 수 있겠습니까."
하였는데, 수흥이 아뢰기를,
"이것은 크게 변통하는 일과 관련되니 가벼이 의논할 수 없습니다."
하자, 상이 동의하였다. 이에 이르러 비국이 상의 분부로 복계(覆啓)하고 회이(回移)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27책 27권 51장 B면【국편영인본】 38책 170면
- 【분류】정론-정론(政論) / 군사-군정(軍政) / 군사-관방(關防) / 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
- [註 094]
○咸鏡監司南九萬上疏, 備陳北道關防變通事, 數千言以爲:
三水、甲山在重嶺大脊之外, 道里絶遠, 棧路險惡。 吉州西北堡, 有獵獤往來之路, 可通於甲山, 近可二百餘里。 道路又頗平易, 自三水沿鴨綠西下數百里, 有厚州古地, 未知設於何年、廢於何時, 而其地在江之南, 自是吾地。 郊野之廣闊、田土之肥沃, 大異於三甲之崎嶇瘠薄, 地勢漸下, 風氣頗溫, 又勝於三甲之苦寒, 霜降最晩, 五穀皆熟, 誠是可居之地也。 今若更置厚州, 則在三甲相依爲援; 在咸興固其藩籬, 外無暮夜竊發之憂, 內有流徙願入之民, 朝而下令夕而可成, 顧何憚而不爲哉? 且閭延等廢四郡, 亦皆廣野沃土, 至今廢棄, 實甚可惜。 而朝廷若以一時, 盡復諸郡爲難, 則姑先設郡於別害, 【堡名】 置鎭於厚州, 以竢人民漸聚, 次第復設, 亦或未晩。 凡此三條, 實係塞上大段處置, 臣作爲圖本以上。 凡道內各邑道里遠近, 關防要害之處, 靡不畢載, 若上塵乙覽, 則凡其便否利害, 必皆瞭然於天鑑之下矣。
上以其疏及圖本, 示大臣及備局諸宰於榻前。 右議政金壽興曰: "車踰嶺外土地之肥饒, 果然矣, 而卽古胡人入居之地也。 設郡之後, 若復侵奪, 則事甚難處。 然彼之撤去, 幾五六十年, 今豈有還侵之理乎?" 上曰: "此本我土地, 敵來則避, 敵去則居, 固也。 彼旣以江爲限, 雖長城之外, 而豆滿江內, 則彼亦知非其土也。 然設郡則姑可徐議, 宜令茂山、梁永萬戶, 時時巡視, 每於春秋蔘節, 托以禁採, 常爲留屯於江邊, 以探彼意, 而數年之後, 仍設鎭於其地, 則不起彼人之疑, 而設郡之事, 亦可漸成矣。" 壽興曰: "開路一款, 似當準請矣。" 上曰: "開路於險地, 兵家之所大忌也。 然形勢便宜, 則何可以此而不開? 彼皆騎兵, 無步卒, 所開之路, 宜略爲芟伐, 僅通人馬, 勿爲平治。 要害處, 設置一二鎭堡以守之, 以斜下諸鎭堡中, 不緊者, 移設於此可矣, 不必別設新堡也。" 壽興曰: "厚州設立事, 似難準請矣。" 訓鍊大將柳赫然曰: "臣曾在關西聞之, 厚州土地膏沃, 民多願徙。 今許入去, 可以朝令而夕至矣。" 兵曹判書金萬基曰: "三南人物殷盛, 所患者土地之狹也。 至於西北, 則不必廣拓, 但其形勢便易, 土地肥饒, 則亦豈可空棄乎?" 壽興曰: "此係大段變通, 不可輕議。" 上然之。 至是, 備局以上敎, 覆啓回移焉。
- 【태백산사고본】 27책 27권 51장 B면【국편영인본】 38책 170면
- 【분류】정론-정론(政論) / 군사-군정(軍政) / 군사-관방(關防) / 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