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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종개수실록 27권, 현종 14년 9월 9일 을해 3번째기사 1673년 청 강희(康熙) 12년

상이 사현합에서 신릉의 석물에 대해 논의하다

영돈녕부사 김우명(金佑明)이 청대하니, 상이 사현합(思賢閤)에서 인견하였다. 상이 하문하기를,

"품정(稟定)할 일이 무엇인가?"

하니, 김우명이 아뢰기를,

"능을 옮길 때 면복(冕服)과 옥규(玉圭)를 상방(尙方)에서 갖춰 올려야 합니다. 《오례의(五禮儀)》에는 청옥(靑玉)을 쓰는 것으로 되어 있는데 반해 기해년 국장 때에는 백옥(白玉)을 썼습니다. 지금도 백옥을 써야 합니까?"

하자, 상이 이르기를,

"전에 썼던 옥규가 파손되지 않았으리라고 생각된다. 그것을 그대로 쓰도록 하라."

하였다. 김우명이 이때 상의원 제조로 있었기 때문에 이렇게 아뢴 것이었다. 우명이 이어 품은 생각을 진달하기를,

"판부사 송시열(宋時烈)이야말로 산림(山林)의 중망(重望)을 지닌 대신이니, 어찌 한 마디라도 잘못된 말을 할 리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옛사람이 말하기를 ‘사람이 요(堯) 순(舜)이 아닌 이상 어떻게 일마다 모두 옳을 수 있겠는가. 아성(亞聖)이하로는 본래 잘못이 없을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도 그가 발언한 것은 사람들이 감히 의논을 하지 못하니, 이는 마치 ‘경대부(卿大夫)가 한 마디 말을 하면 아무도 감히 그 잘못을 바로잡는 자가 없다.’고 한 것과 같은 점이 있습니다.

국릉(國陵)에 표석(表石)을 세우는 일이야말로 3백 년 동안 있지 않았던 일입니다. 그리고 송시열 역시 소 가운데에서 ‘신릉(新陵)의 석물(石物)은 한결같이 영릉(英陵)에 의거해 법식을 삼는다.’고 하였는데, 지금 와서는 영릉에 없는 표석을 새로 세우려고 합니다. 어쩌면 그렇게도 말이 서로 어긋난단 말입니까. 신릉에 일단 표석을 설치하게 되면 각능에도 모두 설치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 돌들을 마련하기 위해 공사를 벌이노라면 적지 않은 노력과 비용이 들 것입니다. 그런데 더구나 강도(江都)는 바로 보장(保障)이 되는 지역이니만큼 민폐를 더욱 염려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송 판부사가 차자에서 말한 것은 대체로 오래고 먼 계책을 삼기 위한 것이다."

하였다. 우명이 아뢰기를,

"국가의 능침(陵寢)에 표석이 없다한들 어떤 사람이 모르겠습니까. 알 수 없게 된 후가 되어서는 표석이 있다 하더라도 무슨 도움이 되겠습니까. 그런데 이것을 송시열이 강정(講定)했기 때문에 아무도 감히 그 타당성을 의논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제왕(帝王)의 덕업(德業)이 후세에까지 빛을 드리우게 되는 것은 표석이 있든 없든 본래 상관이 없습니다. 옛날 명(明)나라 홍무(洪武)069) 초에 역대 제왕들의 35개 능을 거슬러 제사올렸는데, 위로는 복희씨(伏羲氏)에게까지 미쳤습니다. 복희씨 때로부터 홍무 때까지는 연대가 얼마나 떨어져 있습니까. 그런데도 그 묘를 알아 내었는데, 이것이 과연 그 곳에 비표(碑表)가 세워져 전해 내려왔기 때문이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우상 이 돌아오면 상의하도록 하겠다."

하였다.

김우명이 아뢰기를,

"전하께서는 현재 효(孝)를 정치의 근본으로 삼고 계십니다. 그런데 도성에서 놀랄 만한 일이 일어나 누구도 모르는 사람이 없거늘 전하께서만 홀로 듣지 못하고 계십니다. 전(前) 교관(敎官) 민업(閔嶪)이 죽은 뒤에 그의 아들 민세익(閔世益)은 정신 질환이 있기 때문에 세익의 아들이 할아비 초상에 대신 복을 입었는데, 방제(旁題)하고 체천(遞遷)하는 절목에 이르러 일에 구애되는 바가 있어 결정을 짓지 못했다고 합니다.

민세익이 실성했다고는 하나 그래도 배고프면 밥 먹고 추우면 옷을 입으며 심지어는 인도(人道)가 있어 잇따라 자녀까지 생산하였고, 상을 당한 뒤에도 더러 포의(布衣) 차림으로 통곡할 때가 있었다고 하니, 전혀 의식이 없다고는 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예(禮)에 ‘할아비 상이 아직 끝나지 않았는데 아비가 죽었을 경우 아들된 자는 장례가 끝나기 전에 감히 곧바로 그 상을 대신하지 못한다.’는 글이 있고 보면, 아비가 아직 살아 있는데 손자가 대신 참최복(斬衰服)을 입는 이러한 이치가 있단 말입니까. 이렇게 되면 민업이나 세익 모두 아들이 없는 것과 같고 세익이나 그 아들 모두 아비가 없는 셈이 됩니다.

제왕가(帝王家)는 종사(宗社)가 중한 만큼 하루도 임금이 없을 수 없지만 사가(私家)는 이와 달라 부자(父子)가 있은 뒤에야 군신(君臣)이 있는 법인데 부자의 큰 윤리를 어떻게 교란시킬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도 민세익의 아들은 살아 있는 아비를 죽은 것으로 여기는 차마 못할 짓을 하여 스스로 그 복을 대신 입었습니다. 성명(聖明)의 세상에 어찌 이와 같은 자를 도성 아래에서 살아 숨쉬도록 용서해 주고 죄를 주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부자의 윤리가 조금이라도 어긋나게 될 경우 관계되는 바가 작지 않다. 해조로 하여금 자세히 조사토록 하라."

하였다.

살피건대, 민업이 죽었을 때 그의 아들 세익이 정신병에 걸려 상주 노릇을 하지 못하게 되었다. 박세채(朴世采)민세익의 아들 민신(閔愼)을 세워야 한다고 하면서 주자(朱子)의 상복(喪服)에 관한 차자를 인용하여 증거하였다. 민정중(閔鼎重)세채의 말이 옳다고 하였다. 이 마침내 참최복을 입게 되었으므로 듣는 자들이 모두 의아해 하였다. 그러다가 방제(旁題)와 체천(遞遷)에 관한 의논이 나오게 되면서 사람들이 더욱 떠들썩하게 되었다. 송준길(宋浚吉)·이유태(李惟泰)·윤증(尹拯) 등 여러 사람도 모두 이를 힐난하였다. 이에 반해 송시열세채의 말이 옳다고 본래부터 강력히 주장하였는데, 방제와 체천에 관련된 일에 있어서는 역시 의심을 품고 결정짓지 못했었다.

이때에 이르러 김우명이 조사할 것을 경연에서 청하여 세채가 형조에서 명을 기다리게 되었다. 시열이 마침내 결심하고 소장을 진달하여 모두가 일관된 일이라고 하면서 아무 의심없이 행해야 할 것처럼 주장하였다. 그런데 언젠가 이유태가 방제에 관해 주자가 논한 한 대목 중 ‘이와 같은 경우에는 역시 행하기가 어렵다.’는 말을 거론하여 질정하자 송시열이 불쾌하게 여긴 적도 있었다. 상 역시 기해년에 예를 의논할 때 대체로 송시열이 인용한 가소(賈疏)070) 의 설에 대해 의심하는 마음이 없지 않았으나, 대신들이 이미 국제(國制)라고 말한 데다가 시열이 평소 예를 잘 안다고 나랏사람들이 떠받들었기 때문에 의심을 하면서도 말을 꺼내지는 않았었다. 그러나 민가(閔家)의 예에 대해서는 평소 시열을 존경하고 믿던 자들도 대부분 그의 말을 옳게 여기지 않았는데, 우명이 이에 아무 거리낌없이 곧장 배척하여 정밀 조사하는 일이 있게까지 된 것이었다. 그뒤 금상(今上)071) 초에 이르러 민신을 먼 지역에 유배보내라고 명했는데, 을묘년의 화(禍)는 대체로 여기에서 발단된 것이었다.


  • 【태백산사고본】 27책 27권 24장 A면【국편영인본】 38책 157면
  • 【분류】
    왕실-국왕(國王) / 왕실-종사(宗社) / 의생활(衣生活) / 풍속-예속(禮俗) / 정론-간쟁(諫諍) / 사법-탄핵(彈劾) / 사법-행형(行刑) / 역사-고사(故事)

  • [註 069]
    홍무(洪武) : 명 태조의 연호. 서기 1368∼1398.
  • [註 070]
    가소(賈疏) : 《의례》를 해석한 당나라 가공언(賈公彦)의 소.
  • [註 071]
    금상(今上) : 숙종을 말함.

○領敦寧府事金佑明請對, 上引見於思賢閤

上問: "有何稟定事耶?" 佑明曰: "遷陵時冕服玉圭, 當自尙方備進。 《五禮儀》用靑玉, 而己亥國葬, 則用白玉。 今亦當用白玉乎?" 上曰: "前用玉圭, 想不傷破, 仍用可也。" 佑明方爲尙衣院提調, 故有此啓。 佑明仍陳所懷曰: "判府事宋時烈乃山林負重望大臣, 寧有一言之非乎? 然古人曰: ‘人非, 安得每事盡善?’ 自亞聖以下, 固不能無過, 而其所發言, 人不敢議, 有同卿大夫出言而莫敢矯其非者。 國陵表石, 乃三百年所未有也。 時烈疏中亦曰: ‘新陵石物, 一視英陵爲法。’ 云, 而今欲創立英陵所無之表石, 何其言之相戾也? 新陵旣設表石, 則各陵皆不可不設, 伐石之役, 勞費不貲。 況江都乃保障之地, 民弊尤不可不慮也。" 上曰: "宋判府事箚中所言, 蓋爲久遠之計矣。" 佑明曰: "國家陵寢, 雖無表石, 人孰不知? 及其不可知之後, 則雖有表石, 亦何益哉? 此是時烈之所講定, 故人不敢議其當否也。 帝王德業之垂耀後世, 固無待表石之有無。 昔大明 洪武初, 追祭歷代帝王三十五陵, 上及於伏羲伏羲之於洪武, 年代幾許, 而尙知其墓, 此果待碑表而傳之耶?" 上曰: "當待右相還來相議耳。" 佑明曰: "殿下方以孝爲理, 而輦轂之下, 事有可駭者, 人孰不知, 而獨殿下未之聞耳。 前敎官閔嶪死後, 其子世益有狂易之疾, 故世益之子, 代服祖喪, 至於旁題遞遷之節, 事有所礙, 不得決云。 世益雖曰失性, 尙能飢而食, 寒而衣, 至有人道, 連産子女。 遭喪之後, 亦或有衣布號哭之時云, 不可謂全無知識也。 禮有 ‘祖喪未終而父死者, 子於葬前, 不敢卽代其喪。’ 之文, 則其父尙在, 而以孫代斬, 寧有如此之理? 是世益俱無子, 世益及其子俱無父也。 帝王家則以宗社爲重, 不可一日無君, 而私家則異於此, 有父子然後有君臣, 父子大倫, 何可錯亂乎? 世益之子, 忍死其生父, 而自代其服, 聖明之世, 豈可使如此之人, 假其容息於都下, 而莫之罪乎?" 上曰: "父子之倫, 若少乖舛, 則所關非細。 令該曹査覈可也。" 按, 閔嶪之死, 其子世益病狂, 不能執喪。 朴世采以爲: "當立世益之子愼。" 引朱子喪服箚子以爲證。 閔鼎重亦以世采言爲是。 遂服斬, 聞者莫不疑訝。 及旁題遞遷之議出, 而人益譁然。 宋浚吉李惟泰尹拯諸人皆難之。 宋時烈固力主世采言, 而至於旁題遞遷, 則亦疑之而未能決。 至是, 佑明請査於筵中, 世采待命於刑曹, 而時烈遂決意陳疏以爲: "皆是一貫事。" 有若行之無可疑者。 惟泰嘗擧朱子論旁題一節, 此等也難行之語以質之, 時烈不悅。 上於己亥禮議, 蓋不能無疑於時烈所引疏之說, 而諸大臣業以國制爲言矣。 時烈素以知禮, 爲國人所宗, 故疑之而未有發也。 及至家之禮, 則雖平日尊信時烈者, 多不以其言爲是。 佑明乃直斥之, 而無所忌憚, 至有査覈之擧。 至今上初, 命流於遠地, 乙卯之禍, 蓋於此發端云。


  • 【태백산사고본】 27책 27권 24장 A면【국편영인본】 38책 157면
  • 【분류】
    왕실-국왕(國王) / 왕실-종사(宗社) / 의생활(衣生活) / 풍속-예속(禮俗) / 정론-간쟁(諫諍) / 사법-탄핵(彈劾) / 사법-행형(行刑) / 역사-고사(故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