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윤 이완이 수어사의 체직을 간청하다
판윤 이완이 소를 올려 본직 및 수어사(守禦使)의 체직을 간청하니, 허락하지 않았다.
이완은 이름있는 아비의 아들로서 나이 스물 셋에 무과에 올랐고 낭속(郞屬)에 재임할 때부터 대신 이원익(李元翼)·신흠(申欽)이 중요한 일을 그에게 많이 물을 정도였으며, 완풍 부원군(完豊府院君) 이서(李曙)가 서관(西關)에 군대를 시찰하면서 그와 더불어 군사 기밀을 상의한 뒤 조정에 돌아와 그의 대장으로서의 재주를 극력 추천하였다. 이에 만포 첨사로 있다가 본도의 병사에 파격 제수되었는데 이때 그의 나이 겨우 서른이었고, 그 뒤 여러 차례 승지에 제배되었다.
청인(淸人)이 서쪽으로 명(明)나라를 침범하려 하면서 우리 주사(舟師)085) 를 징발하니, 이에 임경업(林慶業)을 상장군(上將軍)으로 삼고 이완을 부장(副將)으로 삼아 전함을 이끌고 부전(赴戰)하였는데, 먼저 비선(飛船)086) 을 보내 비밀히 천장(天將)087) 에게 알렸고, 급기야 천장과 맞닥뜨려 종일토록 교전을 하면서도 양쪽에 사상자가 없었다. 그러자 청주(淸主)가 크게 노하여 조칙(詔勅)으로써 여섯 가지 일을 나열하여 따지면서 힐난하기를
"이는 모두 너희 임금이 너희들과 함께 명조(明朝)에 통모(通謀)한 소치이다."
하고는 경업만을 억류시키고 이완은 동으로 돌아가도록 허락하였다.
인조조(仁祖朝) 때부터 이미 어영 대장에 제배되었고, 효묘(孝廟) 초기에 재차 제수되었는데, 군제(軍制)를 크게 변혁하여 번(番)을 나누어 궁궐을 호위하고 그 보인(保人)에게서 군량을 거둠으로써 당나라 때 부병(府兵) 제도의 옛뜻을 깊이 되살렸다. 구인후를 대신해 훈국(訓局)에 이임되어 관장하기를 16년 동안 하였으며, 효묘 말년에 송시열을 불러 오게 해서 어떤 일을 계획하면서 이완에게 명하여 시열과 더불어 마음을 합쳐 함께 도모하라고 하였다. 그러나 이완은 비록 상의 분부를 받들어 시열과 함께 깊이 결속을 하기는 했어도 또한 함부로 거창한 말을 내세우지 않고서 근본을 튼튼히 하여 기회를 기다리고자 하였다.
성품이 강직·엄격하고 혐의를 멀리하고 청탁을 거절하였다. 그가 사는 집이 인평 대군(麟坪大君)의 집과 서로 가까이 있었는데, 대장이 되어서는 마침내 집을 옮겨 살았고, 길에서 마주치면 대군이 서로 얘기를 나누기를 극력 청하였으나 끝까지 피하고 만나지 않았다. 흥평위(興平尉) 원몽린(元夢鱗)은 바로 그의 종손(從孫)이 되는데 그 공주(公主)가 자전의 분부라 칭하면서 어떤 촉탁을 하였으나, 역시 들어주지 않았다.
효묘께서 별도로 기거(起居)를 만들어 입시(入侍)할 때를 인해 일을 아뢰라고 명하시니, 그가 대답하기를
"남의 신하된 자는 마땅히 정원을 경유하여 나아가 뵈어야 하지, 사사로이 뵙는 일은 감히 할 바가 아닙니다."
하였다. 형조와 한성부의 장관을 오래 지내면서 일처리가 공정·명확하여 하리와 백성들이 외복(畏服)하였으며, 누차 병조 판서에 제수되기까지 했으나 극력 사양하고 끝까지 나아가지 않으니, 사론(士論)도 그를 몹시 칭찬하였다. 이때 와서 노병(老病)으로 벼슬에 제배할 때마다 번번이 소를 올려 겸대직까지 아울러 사양을 하였는데, 상이 끝까지 허락하지 않은 것이다.
- 【태백산사고본】 26책 26권 41장 A면【국편영인본】 38책 134면
- 【분류】인사-임면(任免) / 인물(人物)
- [註 085]
○判尹李浣上疏, 乞遞本職及守禦使, 不許。 浣以名父之子, 年卄三登武科, 自在郞屬, 大臣李元翼、申欽, 多詢機宜。 完豐府院君 李曙, 視師西關, 與議軍機, 還朝力薦其大將才, 遂自滿浦僉使, 超拜本道兵使。 時, 年僅三十, 後累拜承旨。 淸人將西犯, (中朝)徵我舟師, 於是林慶業爲上將, 以浣爲副, 領戰艦以赴。 先送飛船, 密報天將, 及與天將相遇, 終日交戰, 而兩無死傷。 淸主大怒, 以詔勑, 列數六事以詰曰: "此皆爾主與汝輩, 同明朝通謀之致。" 只留慶業, 而許浣東還。 自仁祖朝, 已拜御營大將。 孝廟初再除, 大變軍制, 分番宿衛, 取糧於其保人, 深得唐家府兵遺意。 代具仁垕, 移掌訓局, 以至十六年。 孝廟末, 召致宋時烈, 有所經營, 命浣與時烈同心共圖。 浣雖承上旨, 與時烈深結, 而亦不輕爲大言, 務欲固本待時。 性剛嚴, 遠嫌疑, 絶干請。 所居與麟坪大君家相近, 及爲大將, 遂移宅而居。 遇諸道, 大君力請相語, 終避而不見。 興平尉 元夢鱗, 乃從孫也。 其公主稱慈旨有所囑, 亦不聽從。 孝廟命別爲起居, 因入侍奏事, 對曰: "人臣當由政院進見, 私覿非所敢也。" 久判秋曹、京兆, 裁處公明, 吏民畏服。 至其累除兵判, 而力辭終不就, 士論亦甚稱許。 至是以老病, 每除職, 輒陳疏, 竝與兼帶而辭之, 上終不許。
- 【태백산사고본】 26책 26권 41장 A면【국편영인본】 38책 134면
- 【분류】인사-임면(任免) / 인물(人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