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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종개수실록 23권, 현종 12년 2월 20일 임인 2번째기사 1671년 청 강희(康熙) 10년

동지사 복선군 이남 등의 돌아오는 길에서의 치계

동지사 복선군(福善君) 이남(李柟), 부사 정익(鄭榏) 등이 돌아오다가 산해관(山海關)에 이르러 치계하기를,

"정월 초하룻날 청나라 황제가 성황사(城隍祠)에 가서 분향하려 할 때에 동·서반(東西班)이 오문(午門) 밖에 늘어섰는데 신들도 하반(賀班)에 참여하였습니다. 예(禮)가 끝나자 도로 들어가고 뭇 관원들은 다 파하여 나갔습니다. 신들도 나오려고 하는데 예부 랑(禮部郞) 한 사람이 황제의 명으로 신들을 불렀습니다. 서둘러 건청궁(乾淸宮)으로 들어가니, 청나라 황제가 문의 한중앙 평상에 앉아서 신들을 계단으로 올라오라고 명하였습니다. 평상 앞에서 두어 걸음 떨어진 곳에 나아가 꿇어앉으니, 청나라 황제가 먼저 신 의 나이를 묻고 다음에 국왕과 몇 촌의 친척인지를 묻고 다음에 길을 떠날 날짜를 묻고 다음에 글을 읽었는지를 묻고 다음에 이름 자를 묻고, 또 신 정익의 성명을 물었는데, 묻는 대로 대답하였습니다. 청나라 황제가 또 말하기를 ‘너희 나라는 백성이 빈궁하여 살아갈 길이 없어서 다 굶어 죽게 되었는데 이것은 신하가 강한 소치라고 한다. 돌아가서 이 말을 국왕에게 전하라.’ 하기에, 신들이 대답하기를 ‘어찌 신하가 강하여 이렇게 백성이 굶주리게 되었을 리가 있습니까. 근년 이래로 저희 나라에 홍수와 가뭄이 잇달아서 연이어 흉년을 당하였습니다. 그리하여 국가의 재정이 바닥나고 백성이 도탄에 빠졌으므로 임금과 신하가 밤낮으로 황급해 하고 심지어는 대내에 진공하는 물건까지도 모두 줄여 가면서 죽어가는 백성을 구제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도 사대(事大)의 예를 폐기하지 않고 이번 진헌(進獻)에 힘을 다해 장만하여 겨우 거르는 것을 면하였는데, 어찌 신하가 강하여 백성의 빈궁을 가져오는 일이 있겠습니까.’ 하였습니다. 황제가 곧 빙그레 웃고 시랑 중 한 사람을 돌아보며 말하고 또 말을 전하기를 ‘정사(正使)가 국왕의 가까운 친척이므로 말한 것이다.’ 하였습니다.

말이 끝나자 물러가게 하므로 신들이 이일선(李一善)을 따라 나오는데 그 시랑도 나오면서 서로 이야기하고 갔습니다. 그가 무슨 말을 하더냐고 물었더니, 이일선이 말하기를 ‘황제의 물음에 사신이 대답한 말이 매우 좋았다고 시랑이 말하더라.’ 하고, 또 말하기를 ‘오늘 사신을 불러보면서 본국 백성의 일까지 염려하셨고 또 돌아가 국왕에게 고하라고 명하신 것은 다 국왕을 친근히 여기고 사신을 우대하는 뜻에서 나온 것인데, 사신도 이것이 특별한 은총인 줄 아는가?’ 하였습니다. 대개 그가 신들을 불러보고 위로한 것이 있으니 우대하는 뜻인 듯합니다. 그런데 갑자기 군말을 백성이 빈궁하다는 말 아래에다 붙였다가 신들이 해명한 말을 듣고 또 웃고는 돌아가 고하라고만 하였으니, 깊은 뜻이 없다는 것을 즉시 알 수 있습니다.

신들이 관외(關外)에 이르러 한 한인(漢人)을 만나 청나라 임금이 너그러운지 사나운지를 물었더니 답하기를 ‘한인 관원들은 매우 두려워한다.’ 하였고, 또 ‘관외의 부역이 무겁고 좋은 전지는 다 고산(高山)에게 점유당하였다 하는데 그러한가?’라고 물었더니 그 사람이 머리를 끄덕일 뿐이었습니다. 역관이 얻은 통보(通報)에 ‘지난해의 수재는 백수십 년 동안 없던 재난이었다.’ 하였고, 또 ‘상으로 쓸 비단과 어의(御衣)의 밑천도 부족하다.’는 말이 있었으며, ‘한 해의 군량을 마련하고자 하였으나 의논하는 자들이 다 어려운 일이라고 하였다.’ 하였습니다. 이처럼 국가의 재정이 모자라고 기강이 무너졌는데도 문화의 정치를 해보려고 하여, 운남(雲南) 사람이 70세 된 어머니가 있기 때문에 돌아가 봉양하겠다고 청하자 허가하였고, 또 상중(喪中)에 있는 자에 대해 윤달을 계산에 넣지 않고 스물넉 달이 되어서 복관(復官)하자는 의논이 있었고, 또 만주위(滿州衛)의 삼년상(三年喪) 논의가 있어, ‘사람들이 다 삼년의 제도를 행하고 있는데 그들만 그렇게 하지 못하게 하면 효도로 천하를 다스리는 도리가 아니다.’ 하였습니다."

하였다. 신하가 강하다는 이야기가 복선군(福善君) 남(柟)의 이번 행차에서 비로소 시발되었는데, 갑인년에 조제(弔祭)하기 위한 칙사가 나왔을 때에 복선군 의 표형(表兄)인 오시수(吳始壽)가 빈사(儐使)로서 서로(西路)에 갔다가 통관(通官) 장효례(張孝禮)의 말을 거짓으로 인용하여 복선군 이 한 말을 증거하였다. 그 뒤에 복선군 은 그의 내구(內舅) 정창(挺昌)과 모역(謀逆)을 하여 복주되었는데, 오시수를 잡아다가 이전에 했던 말을 끝까지 캐물으니, 거짓으로 꾸민 자취가 모두 드러났다. 오시수도 이것으로 사형되었다.


  • 【태백산사고본】 23책 23권 45장 B면【국편영인본】 38책 52면
  • 【분류】
    외교-야(野)

○冬至使福善君 、副使鄭榏等, 還到山海關馳啓曰: "正月初一日, 帝將往城隍祠焚香, 東西班序立於午門之外, 臣等亦參賀班。 禮畢還入, 千官姑爲罷黜, 臣等亦欲出來, 禮部郞一人以帝命, 召臣等趨入乾淸宮帝在門正間, 坐於平床, 命臣等上階, 進跪於平床前數步之地。 帝先問臣之年, 次問與國王幾寸親, 次問發程日字, 次問讀書與否, 次問名字。 又問臣姓名, 各隨其問以對。 帝且曰: ‘汝國百姓貧窮, 不能聊生, 皆將餓死, 此出於臣强之致云, 歸傳此言於國王。’ 臣等對曰: ‘豈有臣强, 致此民飢之理? 比年以來, 小邦水旱相仍, 連値凶歉, 國用罄竭, 民生塡壑, 君臣上下晝夜遑遑。 至於內供之物, 亦皆蠲減, 以救垂死之民, 而猶不廢事大之禮。 今此進獻, 竭力以備, 僅免闕貢。 豈有臣强, 以致民窮之事乎?’ 皇帝卽微笑, 顧語侍郞中一人, 又傳語曰: ‘正使乃國王至親, 故言之耳。’ 言訖, 仍令退出。 臣等隨一善出來, 其侍郞亦出來, 相語而去。 問其所言則一善曰: ‘侍郞言, 使臣對帝問之語甚善。’ 云。 且曰: ‘今日之召見使臣, 至念本國民事, 且命歸告國王者, 皆出於親厚國王、優待使臣之意。 使臣亦知此爲特恩乎?’ 蓋彼之招見臣等, 有所勞問, 似是優待之意, 而猝然贅入剩語於民窮之下, 及聞臣等辨白之語, 又笑而只令歸告, 其無深意則可見矣。 臣等行到關外, 逢一漢人, 問主寬猛, 答曰: ‘官甚恐。’ 又問: ‘關外賦役煩重, 良田皆被高山所占云, 然乎?’ 其人點頭而已。 譯官所得通報有曰: ‘上年水患, 百數十年所無之災。’ 且有賞賜段及御衣資不足之語, 欲措一年兵食, 而議者皆難之云。 其國用之貧乏、紀綱之頹圮如此, 而欲修擧文治, 雲南之人以有七十歲母, 請歸養而許之。 且在喪者有不計閏, 二十四月而復官之議。 又有(滿州)〔滿洲〕 衛三年喪之論以爲: ‘人皆行三年之制, 使渠獨不然, 非以孝治天下之道也。’ 云。" 臣强之說, 始俑於之此行, 而當甲寅弔祭勑行之來, 之表兄吳始壽, 以儐使到西路, 誣引通官張孝禮之語, 以證說。 其後與其內舅挺昌, 謀逆伏法, 拿致始壽, 究問前說, 虛僞之跡, 節節彰露, 始壽亦以此論死。


  • 【태백산사고본】 23책 23권 45장 B면【국편영인본】 38책 52면
  • 【분류】
    외교-야(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