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지사 민정중 등이 돌아와 청나라 사정을 보고하다
동지사(冬至使) 민정중(閔鼎重), 부사(副使) 권상구(權尙矩), 서장관(書狀官) 신경윤(愼景尹) 등이 청나라로부터 돌아왔다. 상이 집상전에 나아가 여러 의관들로 하여금 들어와 진료하게 한 뒤에 민정중 등을 인견하였다. 상이 청나라의 사정을 물으니, 민정중이 아뢰기를,
"청나라 임금이 보정(輔政)이 죄를 얻은 뒤로부터 아랫사람들을 의심하여 모든 일을 반드시 몸소 세밀하게 살피므로, 나라 사람들이 매우 괴롭게 여기면서 공공연하게 원망하고 욕을 하는데 조금도 기탄이 없습니다. 성품이 또 사냥을 좋아하니 필시 내란이 일어날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남경(南京)과 운남(雲南)에 각각 1만 명의 군대를 두고 있다는 것은 무슨 말인가?"
하니, 대답하기를,
"남경에 청(淸)병(兵)과 몽(蒙)병(兵) 각각 5천 명을 두고 또 운남에도 많은 군대를 두고서 진지를 지키는 연습을 하며 정경(鄭經)을 방어하고 있는데, 간혹 토적(土賊)이 있으면 또한 이 군대로 격멸을 한다고 합니다."
하였다. 상이 묻기를,
"정경은 과연 어느 곳에 있으며 군대의 숫자는 어느 정도인가?"
하니, 민정중이 아뢰기를,
"바다속 섬 안에 있는데 그 무리가 어느 정도인지는 자세히 알 수가 없습니다."
하였다. 상이 또 묻기를,
"저들이 해선(海船)을 모두 거두어들인 것은 어째서인가?"
하니, 민정중이 아뢰기를,
"전에는 조운선(漕運船)은 오고갈 수가 있었는데, 지난해부터는 조운선도 운행하지 못하게 하고 있습니다. 그 때문에 물가(物價)가 오르고 있습니다."
하였다. 상이 또 묻기를,
"다른 나라의 사신도 온 자가 있던가?"
하니, 대답하기를,
"다만 회회국(回回國) 사신 세 사람이 왔는데, 복색은 몽고인과 같고 모두 푸른 눈이었습니다."
하였다. 서장관 신경윤이 문견 사건(聞見事件)을 올려 아뢰기를,
"옥전현(玉田縣)에서 사인(士人) 왕공탁(王公濯)을 만났는데, 영력 황제(永曆皇帝)의 일에 대해서 물으니, ‘영력 초에 기대어 의지할 사람이 손가망(孫可望)과 이정국(李定國)이었는데, 이정국이 전쟁에서 패배하여 죽고 손가망은 청나라에 항복하자, 영력이 면전국(緬甸國)으로 도망갔다. 면전의 사람들이 청나라 군대가 이동을 하여 공격할 것이라는 말을 듣고는 영력을 죽여서 청나라에 바쳤다.’고 하였습니다.
북경(北京)에서 박순(朴順)이라는 사람을 만났는데, 박순은 우리 나라 사람으로서 포로로 잡혀가서 군병이 된 자였습니다. 청나라의 군병 제도에 대해서 물으니, ‘고산(高山)이 모두 여덟인데 그 하나는 황제가 직접 거느리고 일곱은 친왕척속(親王戚屬)이 거느리다가 팔왕(八王)과 구왕(九王)이 죽은 뒤에는 황제가 세 고산을 아울러 거느리고 있다. 또 이른바 하(蝦)라는 자가 1천 명이고 또 이른바 좌은대(佐銀大)라는 자가 5, 6백 명인데, 모두 황제의 호위 친병이다. 다른 고산은 각각 하(蝦) 20명을 거느린다. 한 고산이 거느리는 군대는 통틀어 2천여 명인데 그 가운데 포(砲)를 쏘는 자가 2백 명이거나 3백 명이다. 또 파야다(巴野多)라는 자가 있는데 아주 엄밀하게 선발된 정병(精兵)을 일컫는 이름이다. 이것이 한 고산에 1천 명씩 있다. 보병(步兵)은 1년에 지급하는 은(銀)이 24냥인데 공을 이루면 더 준다. 마병(馬兵)은 48냥을 주는데 공을 세우면 역시 더 준다. 마병과 보병에게 각각 농지 15일경(十五日耕)을 지급하여 그 세금을 거두어서 먹게 한다. 장교(將校)의 1년 봉급은 혹 은 3백 50냥, 혹 1백 80냥, 혹 1백 50냥이다. 옛날에는 단지 여덟 고산만 있었는데 지금은 또 몽고병과 한(漢)병(兵)으로 두 고산을 만들었고 뒤에 점점 증가하여 이제 24고산이 되었다. 매년 2월 15일에 군대를 모아 시험하는 일을 시작하고 5월 1일에 그 일을 마쳤다가 7월 15일에 또 시험을 보여 10월 1일에 마친다. 활쏘기에서 세 발을 맞추지 못하면 태형(笞刑) 25대를 친다. 포쏘기도 또한 그렇게 한다.’ 하였습니다.
경중(京中)의 백성 숫자에 대해서 물으니, ‘경성(京城)은 동서남북이 모두 10리쯤 되고 궁궐이 3분의 1을 차지하고 있고 관사가 또 3분의 1이다. 장정의 숫자는 실로 동국(東國)의 도성에 미치지 못한다.’ 하였습니다.
또 정경(鄭經)에 대한 일을 물으니, ‘복건(福建)의 해도(海島) 가운데에 있다. 모두 72개의 섬이 있는데 그중의 한 섬이 길이가 수백 리이고 너비가 70리이다. 이곳이 바로 정경이 있는 곳이다. 지난해 5월에 대신을 보내어 타일렀더니, 「만약 한 성(省)을 떼어서 봉해주고 또 체두(剃頭)를 하지 않고 의관(衣冠)을 입는 것을 조선(朝鮮)처럼 할 수 있게 해 준다면 복종하겠다.」고 하였다. 매양 바닷가 고을에 나와서 노략질을 하기 때문에 바닷가 3백 리가 텅 비어 사람이 없다. 이른바 상왕(相王)이라는 자가 군대를 거느리고 복건에 주둔하여 뜻밖의 사태를 방비하고 있다. 지난해부터 바닷가 일대에는 일체 배를 타고 고기잡는 일을 금지하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또 몽고 부락의 명칭에 대해서 물으니, ‘영원위(寧遠衛) 북쪽 1백여 리 되는 곳에 곽자공(郭子公)이 있고 광녕(廣寧) 북쪽에 색론공(色論公)이 있고 또 이주옥(伊州玉)이 있고 이주(伊州) 북쪽에 독릉공(獨凌公)이 있고 또 그 북쪽에 답속한(答束汗)이 있고 또 그 북쪽에 환단공(丸單公)이 있고 또 그 북쪽은 오룡강(烏龍江)이다. 그 밖의 부락은 자세히 알지 못한다.’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22책 22권 24장 B면【국편영인본】 38책 12면
- 【분류】외교-야(野) / 왕실-국왕(國王)
○冬至使閔鼎重、副使權尙矩、書狀官愼景尹等, 還自淸國。 上御集祥殿, 令諸醫入診後, 引見鼎重等。 上問淸國事, 鼎重曰: "淸主自輔政得罪後, 猜疑群下, 每事必親, 務爲察察, 國人甚苦之, 公然怨罵, 少無忌憚。 性又喜射, 故日事山獵, 必有蕭墻之患也。" 上曰: "南京、雲南, 各留萬兵云, 何也?" 對曰: "南京留淸兵、蒙兵各五千。 又於雲南, 亦置重兵, 以爲鍊習鎭守之計, 以禦鄭經。 間有土賊, 則亦以此擊滅之云矣。" 上問: "鄭經果在何地, 而兵衆幾何?" 鼎重曰: "在海島中, 而不能詳知其衆多少矣。" 上又問曰: "彼盡收海船, 何也?" 鼎重曰: "前者, 漕運船則相通矣。 自去年, 漕運船不許相通, 故物貨騰踊矣。" 上又問: "他國使有來者乎?" 對曰: "只有回回國使臣三人來, 而服色與蒙人同, 皆碧眼矣。" 書狀官愼景尹, 進聞見事件曰: "玉田縣遇士人王公濯, 問永曆皇帝事, 則曰: ‘永曆初所倚仗者, 孫可望、李定國, 定國戰敗死, 可望降於淸, 永曆奔緬甸國。 緬甸人聞淸兵欲移擊, 縊弑永曆獻淸云。 北京遇朴順者, 順我國人被擄爲兵。 問淸國兵制則曰: ‘高山凡八, 其一皇帝自領, 其七則親王、戚屬領之。 自八王、九王死後, 皇帝竝領三高山。 又有所謂蝦者一千人, 又有所謂佐銀大者五六百人, 皆皇帝扈衛親兵。 他高山各領蝦二十人, 一高山所領, 通計二千餘人。 其中放炮者二百人或三百人。 而又有巴野多者, 乃極精兵之號, 一高山各有一千人。 步兵則一年給銀二十四兩, 有功加給; 馬兵則給銀四十八兩, 有功亦加給。 馬、步兵各給田十五日耕, 收其稅而養之。 將校一年之俸, 或銀三百五十兩、或一百八十兩、或一百五十兩。 舊時只有八高山, 今又有蒙、漢二高山, 後漸增加, 今至二十四高山。 每年二月十五日, 始聚軍試藝, 至五月初一日而罷。 七月十五日又試藝, 至十月初一日而罷。 射三矢不中則笞二十五, 砲亦然。’ 問京中人民多少則曰: ‘京城東西南北, 皆可十里, 宮闕居三之一, 官舍又居三之一, 丁口則實不及東國之都城。’ 云。 又問鄭經事則曰: ‘在福建海島中, 凡七十二島, 其中一島長數百里、廣七十里, 卽鄭經所居。 去年五月, 送大臣招撫, 則曰: 「若割一省而封之, 且不剃頭, 襲衣冠如朝鮮, 則當服從」云。 每出掠海邊, 故沿海三百里, 淸野無人。 所謂相王者, 率兵居福建, 以防不虞。 自去年沿海一帶, 竝不許乘船漁操。’ 云。 又問蒙古部落名號則曰: ‘寧遠衛北百餘里有郭子公, 廣寧北有色論公, 又有伊州玉。 伊州之北有獨凌公, 又其北有答束汗, 又其北有丸單公, 又其北則烏龍江, 其外部落不能詳’ 云。"
- 【태백산사고본】 22책 22권 24장 B면【국편영인본】 38책 12면
- 【분류】외교-야(野) / 왕실-국왕(國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