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재신 이민구의 졸기
예조가, 전 재신(宰臣) 이민구(李敏求)가 죽은 일로, 조제(弔祭)와 치부(致賻)를 할 것을 전례대로 청하였다. 도승지 장선징 등이 아뢰기를,
"민구는 죄가 종사에 관계되어 마땅히 죽어야 하는데도 죽지 않았으니, 나라가 실형을 한 것이 이보다 큰 것이 없어서 공론의 울분이 아직도 풀리지 않았습니다. 목숨을 보전하여 집에서 편안히 늙어서 죽었으니 그에게는 대단한 다행인데, 어찌 전례를 따라 이러한 조제를 내릴 수 있겠습니까. 비록 계하를 하신 일이더라도 일의 이치로 헤아려볼 때 결코 그대로 시행을 할 수가 없습니다."
하니, 상이 답하기를,
"죄가 비록 그러하나 이미 직첩을 주었으니 또한 전혀 모른 체할 수는 없다. 치부(致賻)하는 일만 행하도록 하라."
하였다.
이민구는 고 재상 이수광(李睟光)의 아들이다. 집안 대대로 문장으로 나라 사람들의 칭송을 들었다. 민구와 그의 형 이성구(李聖求)는 모두 외과(巍科)에 발탁되어 좋은 벼슬에 올라 명예가 매우 융성하였다. 병자년 난리 때에 민구가 검찰사(檢察使)로서 강도(江都)를 지키면서 술에 빠져서 방비를 하지 않고 있다가 많은 적군이 갑자기 쳐들어오자 넋을 잃고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래서 결국 한 섬이 온통 어육이 되고 종묘 사직이 없어졌으며 빈궁 및 대군이 포로로 잡혀갔다. 일이 안정된 뒤에 조정의 공론이 모두 분통스럽게 여겨 군율(軍律)을 시행할 것을 청하였는데, 다행히 사형을 면하여 먼 변방에 유배되었다. 그전에 민구가 일찍이 정명수(鄭命壽)의 처제를 첩으로 삼았는데, 그 형세를 바탕으로 조정을 위협하여 내지로 이배되었다. 인조가 그를 죽이지 못한 것을 통분스럽게 여겼다. 세월이 오래되자 조정에서도 혹 그의 글재주를 아깝게 여겨 거두어 서용하자는 의논도 있었으나 번번이 공론에 부딪쳐 저지되었다. 폐기된 지 수십 년이 되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죽었다. 그 사람됨이야 참으로 논할 것도 없으나 시문(詩文)은 모두 그의 무리에서 탁월하게 빼어났으니, 역시 근래에 드러난 자였다.
- 【태백산사고본】 22책 22권 22장 B면【국편영인본】 38책 11면
- 【분류】풍속-예속(禮俗) / 인물(人物)
○禮曹以前宰臣李敏求身死, 例請弔祭、致賻。 都承旨張善澂等啓曰: "敏求罪關宗社, 當死而不死, 國家之失刑, 莫過於此, 公議之憤鬱, 尙今未洩。 得全首領, 老死牖下, 於渠已幸, 豈可隨例爲此賵弔之擧乎? 雖已啓下, 揆諸事理, 不可仍施。" 上答曰: "罪雖然矣。 旣授職牒, 亦不宜全沒, 只行致賻可也。" 敏求, 故宰相睟光之子也。 家世以文章爲國人所稱。 敏求與其兄聖求, 皆擢巍科, 登顯仕, 名譽甚盛。 至丙子之變, 敏求以檢察使, 守江都, 縱酒忘備, 大敵猝至, 恇懹失措, 終至一島魚肉, 廟社淪沒, 嬪宮及大君見俘。 事定, 朝議皆憤, 請行軍律, 倖免不死, 投竄絶塞。 而初, 敏求嘗娶鄭虜命壽之妻弟爲妾, 藉其勢, 脅持朝廷, 得以內移, 仁祖痛其不殺。 歷時旣久, 朝廷或惜其文才, 而欲收之, 輒爲公議所沮, 廢棄數十年, 至是死。 其爲人固無足論, 而詩文皆拔出儕流, 亦近世之表著者也。
- 【태백산사고본】 22책 22권 22장 B면【국편영인본】 38책 1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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