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인후·강항·김덕령을 추증하다
고 유신(儒臣) 교리 김인후(金麟厚)를 이조 판서에, 절사(節士)인 좌랑 강항(姜沆)과 의병장인 좌랑 김덕령(金德齡)을 제조(諸曹)의 참의(參議)에 추증하였다.
김인후는 자가 후지(厚之)이고 호가 하서(河西)이다. 대대로 호남의 장성(長城)에 살았다. 어려서부터 영특하였고 문재(文才)가 숙성하여서 신동이라고 불리웠으며, 어른이 되어서는 경학에 밝고 행실이 뛰어났었다. 인종이 동궁에 있을 때 오랫동안 강관으로 있었는데, 아주 깊이 인정을 받았다. 인종이 승하하자 벼슬을 버리고 집에 있었는데, 여러 차례 옥당에 제수하여 불렀으나 끝내 나오지 않았다. 매번 인종의 기일(忌日)을 만나면 혼자서 산속으로 들어가 통곡하고서 돌아왔으므로 ‘해마다 7월이면 온 산중에 통곡소리’라는 시구가 있게 되었다. 논자들은
"을사 사화(乙巳士禍) 이후 사류로서 출처(出處)가 바르기로는 김인후만한 사람이 없다."
고 하였다. 졸함에 미쳐서는 선비들이 사당을 세우고 제사지내었다. 그가 지은 시문집이 세상에 전한다.
강항은 영광(靈光)에 살았으며 글재주가 있어서 어려서 과거에 급제하였다. 정유년011) 에 형조 좌랑으로서 재신(宰臣) 이광정(李光庭)의 종사관이 되어 바닷가 고을에서 군량미를 모으다가 온 집안이 왜적에게 잡혔는데, 여러 차례 죽고자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일본으로 잡혀가서는 몰래 납서(蠟書)로써 왜적의 동태를 알렸으며, 모습을 저들처럼 바꾸어 훼손시키거나 의관을 바꾸지 않은 채 지내었는데, 4년이 지난 경자년에 왜인들이 비로소 귀국하는 것을 허락하였다. 선조가 불러서 서울에 도착하자, 왜적의 정세에 대해 두루 물어보았으며, 이어서 술을 하사하고 말을 지급하여 고향으로 돌아가게 하라고 명하였다. 그 뒤에 회답사(回答使) 여우길(呂祐吉) 등이 일본에 갔을 때 왜인들이 그의 절의를 몹시 칭찬하였는데, 심지어는 소무(蘇武)와 문천상(文天祥)에게 비교하기까지 하였다. 문원공(文元公) 김장생(金長生)이 이를 듣고서 가상히 여겨 탄식하였으며, 당로자에게 글을 보내어 그를 거두어 서용하기를 권하였다. 그러나 당론이 한창 성한 때라 끝내 폐기된 채로 생을 마쳤다. 그가 지은 《수은집(睡隱集)》·《간양록(看羊錄)》 등의 서책이 세상에 전한다.
김덕령은 광주(光州)에 살았는데, 신력(神力)이 있고 비할 바 없이 날래었다. 임진 왜란이 일어나자 상복을 벗고 의병을 일으켰다. 광해군이 남쪽 지방에서 군사들을 위무할 때 불러보고 격려하면서 익호 장군(翼虎將軍)이라는 호를 내려주었다. 선조가 형조 좌랑에 제수하고 또 군호(軍號)를 고쳐 초승(超乘)이라고 하였다. 이에 온 나라 사람들이 고무되어 신장(神將)이라고 하였으며, 왜인들도 듣고서는 두려워하였다. 그러나 적과 대치한 3년 동안에 끝내 적의 목을 벤 공이 없었으며, 성질 또한 술주정이 심하고 사람 죽이기를 좋아하였다. 병신년012) 에 일어난 호서의 적당(賊黨) 이몽학(李夢鶴)의 난013) 에 한현(韓絢)이 의병장으로서 동참하였다가 죽었는데, 여러 적도들이 김덕령 역시 함께 모의하여 서로 호응하였다고 하였으며, 또 이름이 한현의 밀서(密書) 중에 들어 있었다. 이에 상이 크게 놀라 승지 서성(徐渻)을 보내어 체포하게 하였는데, 서성이 도착하기 전에 김덕령은 조정의 명이 있었음을 들었으므로 먼저 스스로 나아갔다. 치대(置對)함에 미쳐서는 근거로 삼을 만한 증거가 없었으므로 상이 여러 신하들에게 물었다. 그러자 유성룡(柳成龍)은
"이치상 반드시 살려둘 수 없다."
고 하였고, 여러 신하들도 감히 살리자는 의논으로 편들어주는 자가 없었으며, 판의금부사 최황(崔滉)이 또 속히 형신하기를 청하였다. 이에 마침내 곤장을 맞다가 죽었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원통하게 여겼다.
이때에 이르러 교리 이단하(李端夏)가 상소하여 포상하기를 청하였으므로 이 명이 있게 된 것이다.
- 【태백산사고본】 19책 19권 5장 A면【국편영인본】 37책 607면
- 【분류】인사-관리(管理) / 윤리-강상(綱常) / 변란-정변(政變) / 인물(人物) / 외교-왜(倭) / 군사(軍事)
- [註 011]정유년 : 1597 선조 30년.
- [註 012]
병신년 : 1596 선조 29년.- [註 013]
이몽학(李夢鶴)의 난 : 선조 29년(1596)에 충청도 홍산(鴻山)에서 이몽학이 일으킨 반란임. 이몽학은 서얼 출신으로 임진 왜란 때 모속관(募粟官) 한현(韓絢)의 부하로 들어갔는데, 그와 함께 반란을 모의, 왜군의 재침입에 대비한다는 명목으로 장정을 끌어 모았으며, 동갑계회(同甲契會)란 비밀 결사를 조직해 홍산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한 때 홍산·임천(林川)·청양(靑陽) 등을 함락해 세력을 떨쳤으나 홍주(洪州)를 공격하다가 홍가신(洪可臣)에게 패하였으며 자신의 부하인 김경창(金慶昌) 등에게 살해되었다.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권17 선조 고사본말(宣祖故事本末) 제도토적지기(諸道土賊之起).○追贈故儒臣校理金麟厚爲吏曹判書, 節士佐郞姜沆、義兵將佐郞金德齡, 爲諸曹參議。 麟厚, 字厚之, 號河西。 世居湖南之長城。 幼警悟, 文才夙成, 稱以神童, 及長, 經明行修。 仁廟在東宮, 久爲講官, 受知最深。 及仁廟昇遐, 棄官家居, 屢以玉堂召, 終不起。 每値仁廟忌辰, 獨入山中, 痛哭而還, 有年年七月日痛哭萬山中之句。 〔論〕 者謂乙巳後士類出處之正, 無如麟厚云。 及卒, 章甫建祠俎豆。 所著詩文集, 行於世。 姜沆居靈光, 有文才, 少登第。 丁酉以刑曹佐郞, 爲宰臣李光庭從事官, 督餉海邑, 全家陷倭, 累求死不得。 及入日本, 密以蠟書, 陳倭情, 不毁形體, 不變衣冠, 凡居四年, 庚子倭人始許歸。 宣廟召至京師, 詢問賊情, 仍命饋酒, 給馬還鄕。 其後回答使呂祐吉等之赴日本也, 倭人盛稱其節義, 至比之於蘇武、文天祥。 文元公 金長生聞而嘉歎, 移書當路, 勸其收用。 而時黨議方盛, 竟廢斥而終。 所著有《睡隱集》、《看羊錄》等書, 行於世。 金德齡居光州有神力, 趫捷絶人。 壬辰脫衰起義。 光海撫軍南路, 召見奬礪, 賜號翼虎將軍。 宣廟拜刑曹佐郞, 又改其軍號爲超乘。 於是, 一國聳動, 以爲神將, 倭人亦聞而畏之。 然對壘三年, 終無斬級功, 性且酗酒嗜殺。 丙申湖西賊李夢鶴之亂, 韓絢以義兵將, 同參以死, 而諸賊多稱德齡, 亦連謀相應, 又名在韓絢密書中。 上大驚, 遣承旨徐渻逮捕, 渻未及到, 德齡聞有朝命, 己就捕。 及置對, 辭證無可據, 上詢問諸臣。 柳成龍以爲, 必無生理, 諸臣亦無敢傅以生議者, 判義禁崔滉, 又請速加刑訊。 終死杖下, 人皆冤之。 至是, 校理李端夏上疏請褒, 有是命。
- 【태백산사고본】 19책 19권 5장 A면【국편영인본】 37책 607면
- 【분류】인사-관리(管理) / 윤리-강상(綱常) / 변란-정변(政變) / 인물(人物) / 외교-왜(倭) / 군사(軍事)
- [註 0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