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사간 남구만 등이 면대를 청하여 시정을 아뢰고 김좌명의 파직을 청하다
대사간 남구만(南九萬), 사간 이정(李程), 헌납 이민서(李敏敍), 정언 이섬(李暹)이 면대를 청하니, 상이 희정당(熙政堂)에서 인견하였다. 남구만이, 공가(公家)에 빚을 진 자에 대해 친부자간 외에 일족을 침해하는 것을 금지하는 일에 대해 잇따라 아뢰니, 상이 따랐다. 남구만이 또 아뢰기를,
"지난번에 전 집의 이단상(李端相)의 상소에서 ‘송시열이 올라오지 않는 것이 김좌명에게서 말미암았다.’고 하였습니다. 김좌명과 송시열이 화합하지 못하는 것은 사람들이 모두 알고 있지만, 김좌명이 송시열로 하여금 올라오지 못하게 한 일이 별로 없으며, 송시열 역시 김좌명으로 인하여 올라오지 못하는 일이 없습니다. 그러니 만약 유신(儒臣)이 올라오지 않는 것이 오로지 김좌명에게서 말미암았다고 한다면, 이것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단상의 상소 가운데 이른바 ‘국구의 뜻도 반드시 다르지 않을 것이다.’고 한 것은 어거지로 꿰맞춘 듯한 점이 있어서 말이 온당치 않습니다. 그리고 김좌명의 상소 가운데 이른바 ‘이를 미루어 가면 어디에까지 이르겠는가.’라고 한 것은 더욱더 놀랍습니다. 이른바 어디라고 한 것은 가리키는 곳이 어디겠습니까. 이런 말은 다른 사람에게서 나오더라도 오히려 불가한데, 하물며 김좌명이 어찌 이런 말을 해서야 되겠습니까. 요즈음 이 일로 인하여 논의가 분분합니다. 만약 이 즈음에 곡절을 분명하게 진달하지 않는다면 끝내 진정될 날이 없을 것입니다. 조정의 시비는 바르게 해야 하니, 김좌명을 파직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이어 이르기를,
"나는 오늘 면대를 청한 데는 계사(啓辭) 외에 별다른 소회가 있을 것으로 여겼다. 김좌명을 파직하기를 청하는 것이라면 어찌해서 면대를 청하기까지 하는가. 위로는 대신에서 아래로 온갖 집사(執事)들까지 모두 대간이 논하여 탄핵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을 이유로 면대를 청하는 것이 어찌 대간의 풍채에 합당하겠는가."
하니, 이민서가 아뢰기를,
"성상께서 나약한 대간들을 질책하여 격려하시는 것은 참으로 마땅합니다. 그러나 신들 역시 비단 이 일 때문에 면대를 청한 것은 아닙니다. 신 민서는 오랫동안 전하의 얼굴을 뵙지 못한 데다가 지금 또 혜성의 변고가 있어서 위아래가 모두 걱정하고 있으므로, 대략 소회를 진달하고자 한 것입니다."
하였다. 남구만이 또 아뢰기를,
"조종조의 옛 제도에는 각 고을의 조적(糶糴)이 다른 명목 없이 단지 호조의 원회부(元會付)만 있어서 모곡(耗穀)을 모두 본 고을로 귀속시켰습니다. 그리하여 해묵은 포흠(逋欠)과 유망(流亡)하거나 절호(絶戶)된 자의 것을 모두 이것으로 충당하였으며, 관가의 수요와 백성들의 역(役)까지도 모두 이것으로 보충하였으며, 또한 해마다 늘어나는 폐단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일찍이 인조조 말년에 김응조(金應祖)의 상소로 인하여 그 모곡을 빼앗아 상평청으로 이록(移錄)하였는데, 회록(會錄)이 점차 많아져 반도 넘게 빈 장부만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심지어는 감영·병영·통영·수영 등 여러 영까지도 또 그것을 본받아 각자 미속(米粟)을 쌓아두고서 장부를 조사해 모곡을 계산하는데, 새것과 예전 것이 서로 이어져 한도가 없습니다. 이것이 비록 공공연히 부세를 매기는 것과는 차이가 있지만, 출납하는 사이에 몰래 백성들의 재물을 빼앗는 것을 어찌 이루 다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 지금 변통하지 않아서는 안 됩니다.
바라건대, 각 고을의 조적을 상평청이나 감영·병영·통영·수영을 막론하고 일체 국곡(國穀)을 받아들이는 예에 의거하여 해, 모곡의 수효를 첨가해 기록하는 일을 모두 금지하여 혁파하소서. 그리고 원곡(元穀)의 모곡을 상평청에 이록하는 일도 아울러 혁파하소서."
하고, 이민서가 아뢰기를,
"일찍이 효종조 때 이 폐단에 대해 상소하여 진달한 자가 있어서 비국에 계하하였는데, 선신(先臣)043) 의 회계로 인하여 회록(會錄)하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그뒤에 시행하지 않았는지 모르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비변사로 하여금 조사한 다음 품의해 처리하게 하겠다."
하였다. 남구만이 또 아뢰기를,
"나라에서 서로(西路)와 북로(北路) 두 곳에 대해 본래 경중의 구별이 없이 보고 있는데, 함경도의 경우에는 이미 중신(重臣)을 보내어 과거를 베풀었으며, 이어 그로 하여금 폐해를 묻게 하여 백성에게 혜택이 미친 것도 많습니다. 평안도에도 이와 마찬가지로 중신을 보내어 과거를 베풀고 겸하여 민간의 폐해를 묻도록 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묘당에 물어서 처리하겠다."
하였다. 남구만이 또 아뢰기를,
"각 고을에서 세초(歲抄)할 때 한정(閑丁)을 얻지 못하여 매번 어린아이로 충정하고 있으며, 물고(物故)된 자와 노제(老除)된 자에 대해서도 대신 충정할 길이 없습니다. 이것은 대개 양민이 다른 곳에 투속하여 역(役)을 면하기를 도모해서인데, 서울의 경우에는 삼의사(三醫司)의 생도(生徒)와 교서관의 창준(唱准), 각 아문의 군관과 같은 것이 그것이며, 외방의 경우에는 감사의 아병(牙兵) 및 병사·수사·영장(營將)·방어사의 군관 등이 그것으로, 명목이 몹시 많기 때문입니다. 서울과 외방의 양민이 소속된 곳으로 원래 액수(額數)가 있는 곳은 정원 이외의 인원을 태거시키고 원래 액수가 없는 곳은 액수를 정하여 투속하는 폐단을 막으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이민서가 아뢰기를,
"무인이 발신(發身)하는 것은 모두 뇌물을 통하므로 탄핵장에 먹이 마르기도 전에 또 비국에서 추천하고 있습니다. 수원 부사 이수창(李壽昌)과 같은 경우에는 사람들이 모두 ‘아주 탐학스런 큰 도둑’이라고 하는데도 상께서는 대간의 아룀을 윤허하지 않으시니, 신은 성상의 뜻이 무엇인지 모르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요즈음 탐장(貪贓)으로 논핵받는 자는 모두 무인들이며 명사나 재상은 탐장으로 탄핵받는 자가 없는데, 어찌 무신은 모두 탐학스럽고 문관 중에는 한 명의 장리(贓吏)도 없겠는가."
하자, 이민서가 아뢰기를,
"문관은 참으로 탐학스럽다는 이름을 얻으면 종신토록 폐기되나 무신은 비록 탄핵받더라도 곧바로 서용됩니다. 황헌(黃瀗)이나 박형(朴泂) 같은 자도 모두 탐장죄에 대한 형벌을 시행하지 않았으니, 탐리(貪吏)가 어찌 징계되겠습니까."
하였다. 이민서가 또 아뢰기를,
"신이 시골에 있을 때 듣건대, 천재를 이유로 구언하는 교서가 내리자 원근에서 보고 듣고는 모두 고무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요즈음 국가에서 수성(修省)하는 거조는 백성들의 바람에 크게 부응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현재 조정에는 크게 덕을 잃은 일은 별로 없으나 모든 일에 매번 맥이 풀린 것이 걱정이며, 성상께서는 신료들을 인접함이 점차 드물어지고 심지어 지난번에 비국의 신하들을 인견하시면서는 삼사로 하여금 입시하지 못하게까지 하였는데, 이것은 더욱더 체모를 잃은 것입니다. 지금부터는 자주 신료들을 인접하여 통치의 도리에 대해 물어보시고 한가한 날에는 유신들을 불러보아 경서를 강론하되, 혹 옥체가 피곤하시면 드러누워 듣더라도 안 될 것이 없습니다. 《주역(周易)》의 태괘(泰卦)에 이르기를 ‘오랑캐를 포용하며, 하수(河水)를 맨몸으로 건너는 것 같은 과단성을 발휘한다.[包荒用馮河]’라고 하였는데, 이는 반드시 몹시 용감스럽게 하여야만 편안하고 태평한 다스림을 오게 할 수 있음을 말한 것입니다. 옛말에 이르기를 ‘조금 변화하면 조금 이롭고 크게 변화하면 크게 이롭다.’고 하였습니다. 신이 전부터 매번 강건한 덕을 크게 분발하고 폐단을 일으키는 정사를 변통하라는 등의 말로 진달한 것이 여러 차례였으니, 상께서는 유의하소서."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12책 12권 11장 A면【국편영인본】 37책 415면
- 【분류】사법-탄핵(彈劾) / 정론-정론(政論) / 정론-간쟁(諫諍) / 과학-천기(天氣) / 신분-상민(常民) / 금융-식리(殖利) / 왕실-국왕(國王) / 왕실-경연(經筵) / 군사-군역(軍役) / 군사-군정(軍政) / 인사-임면(任免) / 인사-선발(選拔) / 재정-창고(倉庫) / 재정-국용(國用) / 재정-역(役)
- [註 043]선신(先臣) : 이경여(李敬輿).
○大司諫南九萬、司諫李程、獻納李敏叙、正言李暹請對, 上引見於熙政堂。 九萬以公家負債者, 親父子外, 侵及一族, 禁斷事連啓, 上從之。 九萬又啓: "頃日前執義李端相之疏, 以宋時烈之不來, 爲由於金佐明。 佐明之與時烈, 不能沕合, 人所共知, 而佐明別無使時烈不得來之事, 時烈亦無因佐明不來之事。 若謂儒臣之不來, 專由於佐明, 則有不然者。 而端相疏中所謂國舅之意, 亦必無異者, 有若勒定, 措語未安。 佐明疏中所謂推而至於何所者, 尤可驚駭。 所謂何所云者, 所指者何所耶? 此言雖出於他人, 猶且不可, 況佐明豈宜發此語也? 近因此事, 論議紛紜。 若於此際, 不能指陳曲折, 則終無鎭靜之日。 朝家是非, 不可不正, 請金佐明罷職。" 上從之。 仍曰: "予以爲今日請對, 有啓辭外別樣所懷矣。 金佐明請罷, 則何至於請對也? 上自大臣, 下至百執事, 臺諫皆可論劾。 而以此請對, 豈合於臺諫風采也。" 敏叙曰: "聖上所以責勵疲軟之臺諫, 誠爲當矣。 而臣等亦非但以此事請對。 臣敏叙, 則久不瞻望玉色, 而今又以彗星之變, 上下憂遑, 故欲略陳所懷矣。" 九萬又啓曰: "祖宗故制, 各邑糶糴, 無他名色, 只有戶曹元會付, 其耗穀, 竝歸之本邑。 凡有積年逋欠及流亡絶戶, 皆以此充數, 至於官需民役, 亦皆以此添補, 而元穀之數, 且無逐歲增加之弊。 曾在仁祖末年, 因金應祖之疏, 奪其耗穀, 移錄於常平廳, 會錄漸多, 虛簿過半。 至於監、兵、統、水諸營, 又效其爲各儲米、粟, 按簿計耗, 新舊相續, 無有限度。 此雖與公然加賦有異, 其出納之間, 暗奪民財, 何可勝言哉? 不可不及今變通。 請各邑糶糴, 無論常平廳、監ㆍ兵、統ㆍ水營, 一依國穀收捧之例, 其耗數加錄之事, 竝爲禁革。 而元穀耗移錄常平廳事, 亦爲革罷。" 敏叙曰: "曾在先朝, 有疏陳此弊者, 啓下備局, 因先臣回啓, 使不爲會錄。 而未知其後, 何以不爲施行也?" 上曰: "令備邊司査覈稟處。" 九萬又啓曰: "國家之視西、北二路, 本無輕重, 咸鏡道, 則已有遣重臣設科之擧, 仍使詢訪弊瘼, 而惠及於民者亦多。 請平安道一體遣重臣設科, 兼詢民瘼。" 上曰: "詢于廟堂處之。" 九萬又啓曰: "各邑歲抄時, 不得閑丁, 每以兒弱充定, 至於物故、老除, 亦無代定之路者。 蓋以良民托屬他處, 圖免其役, 京中, 則如三醫司生徒、校書館唱准、各衙門軍官, 外方, 則如監司之牙兵及兵ㆍ水使、營將、防禦使軍官等, 名目甚多故也。 請京外良民所屬之處, 元有額者, 汰其額外, 元無額者, 定其額數, 以防托屬之弊。" 上從之。 敏叙曰: "武弁之發身, 皆由於行賂, 彈墨未乾, 又自備局推薦。 如水原府使李壽昌, 人皆曰: ‘巨貪大盜。’ 而自上不允臺啓, 臣未知聖意之所在也。" 上曰: "近來論以貪贓者, 皆是南武, 而名士、宰相, 無以貪彈劾者, 豈武臣皆貪婪, 而文官無一贓吏耶?" 敏叙曰: "文官, 則苟有貪名者, 猶爲終身廢棄, 而武弁, 則雖被彈劾, 旋卽收敍。 如黃瀗、朴洞, 皆不行烹阿之典, 貪吏何所懲乎?" 敏叙又曰: "臣在鄕時, 聞以天災有求言之敎, 遠近視聽, 莫不聳動。 而近日國家所以修省之擧, 亦未能大副民望。 當今朝廷, 別無大段失德, 而凡事每患委靡, 聖上引接漸稀, 至於向日備局引見, 不令三司入侍者, 尤爲失體。 請自今頻接臣僚, 咨訪理道, 至於暇日, 召見儒臣, 講論經書, 或値玉體疲倦, 則臥而聽之, 亦無不可矣。 《易》之泰卦曰: ‘包荒用馮河。’ 言必有馮河之勇, 可以致安泰之治也。 古語曰: ‘小變, 則小益, 大變, 則大益。’ 臣從前每以奮發剛健變通弊政等語, 陳達〔屢〕 矣, 願上留意焉。"
- 【태백산사고본】 12책 12권 11장 A면【국편영인본】 37책 41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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