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의 이단상이 왕의 강학을 강조하는 상소를 올리다
집의 이단상(李端相)이 상의 교지에 응하여 상소하였는데, 그 대략에,
"지금 혜성이 깨우침을 보여주고 또 겨울 우레의 변이 있으니 전하는 여기에서 조심하고 두려워하여 정전(正殿)을 피하고 도움말을 구하여 하늘의 뜻에 호응하는 도리를 다하고 나날이 여러 신하를 접하여 재이를 소멸하는 대책을 크게 강구하니, 전하의 이 마음이 충분히 위로는 하늘의 노여움을 돌리고 아래로는 백성의 바람을 위로할 수 있습니다. 이는 진정 음과 양의 승부가 결정나는 때이며 국가 운명이 갈리는 기회입니다. 그러나 전하의 마음에 만일 평소에 함양(涵養)한 공부가 없다면 어찌 잃어버리거나 중단되는 염려가 없을 수 있겠습니까.
지금 만일 본원의 땅에 공부를 첨가하려고 한다면 학문을 강론하는 것보다 급한 것이 없는데, 성경(聖經)과 현전(賢傳)이 어느 것이 마음을 다스리는 약석이 아니겠습니까마는 체용(體用)과 종시(終始)가 모두 갖추어진 것은 《심경(心經)》만한 것이 없으니 이것은 심학(心學)에 있어서 참으로 지남거(指南車)이며 촉유감(燭幽鑑)036) 인 것입니다. 이러함으로 선대왕의 말년에 특별히 이 책을 강론하면서 송시열(宋時烈)·송준길(宋浚吉) 등과 함께 몰두하여 강구하고 체험을 이루어 광명이 계속 빛나는 성대함이 있었습니다. 신이 그때 옥당에 있으면서 마침 이황(李滉)이 이 책을 처음 입수하여 친히 구두를 찍고 주석을 가한 책을 얻어 관료(館僚)와 함께 차자를 갖추어 올리니, 선대왕이 애완하여 보물처럼 아끼면서 하교하기를 ‘이 책을 얻고부터 마치 이황이 직접 좌우에 있는 것 같다.’고까지 하였습니다. 신의 망령된 생각으로는 전하께서 선대왕이 강학하던 차례를 계승하여 먼저 이 책을 강론하되 유신을 접견하여 날마다 강독한다면 성상의 학문에 유익함을 어찌 헤아릴 수 있겠습니까.
신이 삼가 들으니 전하께서 일찍이 《대학연의(大學衍義)》을 강독하였다고 하는데 서산 진씨(西山眞氏)의 일생 공부와 정력이 《심경》 및 이 책에 다 있습니다. 그후 명(明)나라의 유신 양렴(楊廉)·구준(丘濬) 등이 각기 《연의절략(衍義節略)》과 《연의보(衍義補)》를 지었고 신의 6대조 연성 부원군(延城府院君) 이석형(李石亨)도 역시 《연의집약(衍義輯略)》을 편집하였는데 서산의 본서를 요약하고 각 조항의 끝에 우리 동국 고려의 여러 임금들의 일로 임금에게 권징(勸懲)이 될 만한 것을 첨부하였으니 우리 나라의 일에 경계됨이 더욱 절실합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대학연의》는 본서 그대로 진강하고 《연의집략》 중 우리 나라의 역사로 보충한 것은 별도로 뽑아내어 혹 한 책으로 만들거나 혹 본서의 각 조항 끝에 첨입하여 연달아 강독하는 것으로 삼는다면 고려의 치란 흥망의 사유를 대략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니 오늘날의 경계가 더욱 친절할 것입니다. 《대학》이라는 책은 전하께서 전일에 이미 익히 강송(講誦)하셨으니 신의 생각으로는 비록 《연의》를 진강하지 않을 때라도 《대학》 본서는 궐내에서 날마다 순환적으로 묵송(默誦)하며 몰두하여 완미하는 공부를 잠시도 폐기하여서는 안 됩니다. 반드시 이처럼 한 다음에야 본서와 《연의》의 취지가 서로 호응되어 넘치거나 빗나가는 데 대한 걱정이 없을 것입니다.
신이 삼가 들으니 전하께서 사학(史學)에 유의하고 경전(經傳)에 소홀히 한다고 하는데 이것은 고금 인주의 공통된 병통이나 만일 먼저 경전을 강독하여 본원을 다스려서 의리(義利)와 공사(公私)를 분별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시비 득실과 치란 흥망의 연유를 판별하겠습니까."
하고, 또 아뢰기를,
"전하께서 과연 강학을 부지런히 하시려면 먼저 초야의 현인을 초빙하여야 할 것이니, 송시열·송준길 같은 이는 어찌 강학만을 위하여 초빙할 뿐이겠습니까. 시열은 선왕에 있어서 이미 스승의 옛 은혜가 있고 세상에 드문 예우를 받게 되자 준길과 함께 산림에서 일어나 조정으로 나오니 선왕이 총재로 발탁하여 장차 국사를 맡기려 하였으며 인하여 전하의 사부의 책임을 맡기셨습니다. 전하께서도 두 신하를 높이 예우함이 선대 조정 때보다 못함이 없었는데 두 신하의 발걸음이 청조(淸朝)에 막힌 지 이미 몇 년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감히 가벼이 나오지 못하는 것도 대체로 연유가 있으니 지난해 시열이 의외의 말썽으로 허둥지둥 물러갔고 그후 또 복제(服制)의 예를 논하는 일로 윤선도(尹善道)의 상소가 있었습니다. 시열의 복제론이 정정당당하여 정녕 백세에 성인을 기다려도 의심할 것이 없다고 할 수 있는데 조경(趙絅)·조수익(趙壽益)의 상소가 연속으로 일어났고, 지난날에는 또 김만균(金萬均)의 일로 서필원(徐必遠)의 상소가 있었는데 거친 언어로 함부로 기롱하고 모욕함이 극히 놀라웠으니, 시열의 불안해하는 마음은 형세가 본래 그러하였던 것입니다.
또 보다 더 중대한 것은 지난해 참람되게 수도(隧道)를 사용한 일로 김육(金堉)을 개장(改葬)하고 그의 자식을 벌주어야 한다고 청한 것은 대간 민유중(閔維重)에게서 나온 것인데 병조 판서 김좌명(金佐明)은 유중의 이 논의가 시열에게서 나왔다고 하였습니다. 좌명은 일찍이 시열의 복제론을 옳지 않다고 하였는데 좌명의 뜻이 이러하다면 국구(國舅)의 뜻도 반드시 다르지 않을 것이니 시열이 더더욱 스스로 편치 못했던 것이 이 때문입니다. 그뒤로 시열과 준길이 거의 조정에 나오지 않고 그대로 산야에 처하여 있으니 장고(掌故)가 기록하고 사신이 글로 써서 후세에 전한다면 전하를 어떻다고 하겠습니까."
하고, 또 아뢰기를,
"신이 삼가 들으니 장차 오가통(五家統)을 시행할 뜻으로 이유태(李惟泰)를 초빙한다고 하는데 과연 그렇다면 신은 삼가 그것은 당치않다고 여깁니다. 사냥꾼을 부를 때 정(旌)으로 해도 우인이 오히려 오지 않는 법인데 더구나 오가통으로 현사(賢士)를 초빙할 수 있겠습니까. 유태의 상소는 그의 창설(創說)이 아니고 대부분 선현의 말씀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경장하고 변통하려면 시대에 알맞은 것이 있기 마련인데 유태 역시 어찌 그 말을 다 시행하려 하겠습니까. 그 중에 행할 수 있는 것은 시행하고 행할 수 없는 것은 굳이 행하려고 할 것이 없습니다. 설령 모두 다 시행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어찌 이것 때문에 선비를 대하는 도리에 흠이 되겠습니까. 전일 유태가 왔을 때 조정의 기색이 현저하게 그 상소를 난처하게 여기면서 겉으로는 장차 그 말을 행할 듯이 하고 속으로는 실제로 떠나가기를 기다리고 있으니 선비를 대우하는 도리가 어찌 이럴 수 있겠습니까. 신은 여기에서 삼가 성조를 위하여 애석하게 여깁니다.
신이 오늘날의 조정을 살펴보니 경술(經術)을 지닌 신하가 없습니다. 옛날 인조(仁祖) 때는 명신 석보로서 신흠(申欽)·오윤겸(吳允謙)·김상헌(金尙憲)·정엽(鄭曄)·정경세(鄭經世)·장유(張維)와 같은 신하들이 모두 유술(儒術)로 출사하여 조정에서 의젓하게 자리를 잡았으며, 우리 선왕조 때에도 두세 명의 경술을 지닌 신하가 삼사(三事)의 지위에 분포되어 있으니 자연 조정의 존귀함을 깨닫게 되었는데, 지금은 단지 영중추 이경석(李景奭) 한 사람뿐입니다. 그러므로 경연에서 의리에 관한 설을 들을 수 없고 반복 강론하는 것이 매번 항간의 자질구레한 세속적인 이야기만 어전에 잡되게 진달하니 신은 여기에서 성조를 위하여 수치로 여깁니다."
하니, 상이 너그럽게 답하고 마장(馬裝)을 하사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11책 11권 58장 B면【국편영인본】 37책 409면
- 【분류】정론-정론(政論) / 정론-간쟁(諫諍) / 왕실-경연(經筵) / 왕실-의식(儀式) / 왕실-사급(賜給) / 의생활(衣生活) / 호구-호구(戶口) / 과학-천기(天氣) / 출판-서책(書冊)
- [註 036]촉유감(燭幽鑑) : 어둠을 밝히는 거울.
○執義李端相應旨上疏, 略曰:
今者星文示警, 又有冬雷之變, 殿下於此, 惕然恐懼, 避殿求言, 以盡應天之道, 日接群臣, 大講消弭之策, 殿下此心, 亦足以上回天怒, 下慰民望。 此正陰陽勝負之會, 眷命隆替之幾。 然殿下一心, 若無平日存養之功, 安能無捨亡間斷之患哉? 今若求所以加工本源之地, 則莫急於講學, 聖經、賢傳, 孰非治心之藥石, 而體用俱該, 終始兼備者, 莫若《心經》, 其於心學, 眞所謂指南之車, 燭幽之鑑也。 是以先王末年, 特講此書, 與宋時烈、宋浚吉等, 沈潛講究, 體驗將就, 有光明緝熙之盛。 臣於其時, 忝在玉堂, 適得李滉初得此書, 親自點絶注釋之冊, 與館僚, 投箚以進, 先王愛玩珍惜, 至於下敎曰: "自得此冊, 有若李滉之親在左右。" 愚臣妄意, 竊以爲殿下, 宜繼先王講學之序, 先講此書, 引接儒臣, 日事講讀, 則其爲聖學之益, 豈有量哉? 臣伏聞殿下, 曾講《大學衍義》, 西山 眞氏一生工夫, 精力盡於《心經》及此書。 其後皇明儒臣楊廉、丘濬等, 各有《衍義節略》及《衍義補》, 而臣之六代祖延城府院君 石亨, 亦有《衍義輯略》, 頗刪節西山本書, 每於各條之末, 添附我東高麗諸君之事, 可爲人主之勸懲者, 我國之事, 鑑戒尤切。 臣意竊以爲, 《大學衍義》則仍以本書進講, 《輯略》中東史補益者, 別爲抄出, 或作爲一冊, 或添書於本書各條之末, 以爲繼講之地, 則前朝治亂興亡之由, 可以領略, 而其爲今日之鑑, 益親切矣。 《大學》之書, 則殿下於前日, 旣已熟復講誦矣, 臣意竊以爲, 雖非進講《衍義》之時, 《大學》本書, 則自內日日循環, 默誦潛玩之功, 不可暫廢。 必須如是而後, 本書與《衍義》, 指趣相應, 無泛濫橫馳之患矣。 臣伏聞殿下, 留心史學, 而忽於經傳云, 此古今人主之通患也, 若不先講經 傳, 治其本源, 以別義利公私之分, 則其何以辨是非得失治亂興亡之所由哉? 又曰, 殿下果能勤於講學, 則不可不先致草野之賢, 而至若宋時烈、宋浚吉, 則豈但以講學招延而已也? 時烈之於先王, 旣有甘盤〔之〕 舊, 及被曠世之恩遇, 乃與浚吉, 起自山林, 幡然造朝, 先王擢置冡宰, 方將擧國而聽之, 仍畀殿下, 委以商顔師傅之責。 殿下之於兩臣, 禮遇之隆, 無減於先朝, 而兩臣之迹阻淸朝, 已數年矣。 然其不敢輕進者, 蓋亦有由, 頃年時烈, 以意外之言, 蒼黃退歸, 其後又以服制議禮之事, 有尹善道之疏。 時烈服制之論, 正正堂堂, 誠可謂百世以竢聖人而不惑者, 而趙絅、趙壽益之疏, 相繼而起, 及至頃日, 又以金萬均之事, 有徐必遠之疏, 以粗厲之語, 肆加譏侮, 極其駭悖, 時烈之不安於於心者, 勢固然矣。 又有大於此者, 頃年以僭用隧道之事, 請改葬金堉, 而仍罪其子者, 出於臺諫閔維重, 而兵曹判書金佐明, 以維重此論, 爲出於時烈。 而佐明亦嘗以時烈服制之論爲不是, 佐明之意如此, 則國舅之意, 亦必無異, 時烈之所以尤不得自安者, 以此也。 此後時烈、浚吉, 若不造朝, 仍處山野, 則掌故記之, 史臣書之, 傳之於後, 謂殿下爲何如也? 又曰, 臣伏聞頃日, 以將行五家統之意, 召李惟泰云, 果若此則臣竊恐其失當也。 招虞人以旌, 虞人尙不至, 況可以五家統招賢士耶? 惟泰之疏, 非其創說, 多是先賢之語。 而然其更張變通, 亦自有隨時之宜, 惟泰亦豈欲盡行其言耶? 其中可行者行之, 不可行者不必行。 設令皆不得行, 亦何可因此有觖於待士之道耶? 前日惟泰之來也, 朝廷氣色, 顯以其疏爲難處, 外若將行其言, 而內實待其求去, 待士之道, 豈容若是? 臣於此, 竊爲聖朝歎惜也。 臣竊觀今日朝廷之上, 未有經術之臣。 昔在仁祖朝, 名臣碩輔如申欽、吳允謙、金尙容、金尙憲、鄭曄、鄭經世、張維諸臣, 皆以儒術進, 羽儀於朝, 逮我先朝, 亦有二三經術之臣, 布在三事之位, 自覺朝廷之尊矣, 今則只有領中樞李景奭一人而已。 是以經席之上, 未聞以義理之說, 反覆講論, 每以街談巷語瑣漫俚褻之言, 雜陳於前, 臣於此, 亦竊爲聖朝羞也。
上優答, 賜馬裝。
顯宗純文肅武敬仁彰孝大王改修實錄卷之十一終
- 【태백산사고본】 11책 11권 58장 B면【국편영인본】 37책 40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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