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정전에 나아가 상참을 행하고 시정을 논하다
상이 선정전(宣政殿)에 나아가 상참(常參)을 행하였다. 대사간 김수흥(金壽興)이 나아가 아뢰기를,
"전라도 어사 오두인(吳斗寅)은 번고(反庫)할 때에 이미 제대로 살피지 못한 잘못을 많이 저질렀습니다. 입암 산성(笠巖山城)의 군기(軍器)에 있어서, 전 장성 부사(長城府使) 이하악(李河岳)은 별비(別備)한 물건을 모두 형편없이 하였으며, 파손된 군기도 수리하지 않았고, 산성을 개축함에 있어서 어린아이 장난같이 하였습니다. 또 감사 조귀석(趙龜錫)이 실결(實結)을 재결(災結)로 삼은 정상을 모두 직접 보았으면서도 서계에 갖추어 진술하지 않았습니다. 간관으로서 사실대로 논계하지 않고 단지 사적으로 사대부들 사이에 말을 전했으니 일이 매우 형편없습니다. 오두인을 파직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상참을 마치고 대신(大臣)과 비국의 재신(宰臣)들을 인견하였는데, 좌상 원두표가 아뢰기를,
"현재 전염병이 매우 성하여 여염 사이가 대부분 정결하지 못한데, 이러한 때에 능에 행행하시는 것은 매우 염려스럽습니다. 원임 대신(原任大臣)도 차자를 올려 진달했으니, 중지하는 것이 합당할 것 같습니다."
하고, 좌참찬 허적(許積)도 이러한 뜻으로 진달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해를 넘기도록 여러 능에 전알(展謁)하지 못해 반드시 하려고 하는 것인데, 어떻게 정결하게 되기를 기다릴 수 있겠는가."
하니, 허적이 아뢰기를,
"만일 중지할 수 없다면 갔다가 하룻밤 묵고 돌아오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하고, 예조 판서 홍중보(洪重普)가 아뢰기를,
"평시의 제향(祭享)은 으레 4경 초에 했었습니다. 이번에는 하룻밤 묵고 오는 것으로 정하고 나서 조금 느즈막이 때에 따라 일을 행하는 것이 자연스럽고 합당할 것 같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4경에 제사를 지내고 다음날 환궁하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허적이 아뢰기를,
"능에 행행하여 하룻밤 묵는다면 내국(內局)의 제조 1원은 마땅히 입직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대신과 도승지는 형편상 뒤에 남아 있기 곤란한 입장이고 신도 현재 사복시 제조로서 담당하고 있는 일이 있습니다. 전례에는 유도 대장(留都大將)으로 하여금 겸하여 살피게 하였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전례대로 하도록 하라."
하였다. 두표가 아뢰기를,
"북로(北路)에는 궁장(弓匠)도 없고 궁각(弓角)도 없어 활을 만들 수 없는데, 매번 서울에서 만들어 보낼 수도 없습니다. 북도(北道)의 무사는 옛적 산서(山西)의 장재(將材)와 같이 뛰어나니, 궁시(弓矢)를 가르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듣건대, 호조에 궁각이 매우 넉넉하게 있다 하니, 궁각과 궁장을 보내 활을 만들게 하는 것이 합당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꼭 서울의 궁장을 보낼 필요는 없다. 지방의 장인(匠人)을 보내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두표가 아뢰기를,
"양남(兩南)의 경우는 길이 매우 머니, 평안 병영(平安兵營)으로 하여금 장인을 들여 보내게 하고 병조 판서에게 그 일을 담당시키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상이 두표에게 묻기를,
"훈련 도감의 유황(硫黃)을 사온 자에 대해 어떻게 상을 주려고 하는가?"
하니, 두표가 아뢰기를,
"전에 홍희남(洪喜男)이 유황을 사왔을 때에는 그의 아들을 가자하고 희남은 동지(同知)에 제수했습니다. 이번 이응상(李應祥)의 경우는 마땅히 가설첨지(加說僉知)로 상을 주어야 할 것입니다."
하니, 상이 그렇다고 하였다. 강화 유수 조복양(趙復陽)이 강도(江都)의 일을 품정(稟定)하려고 입시하였는데, 나아가 아뢰기를,
"강도의 군병은 기예가 형편없습니다. 신이 부임한 뒤 별파진(別破陣)·무학(武學)·속오(束伍) 등에게 포 쏘는 것을 시험보였는데, 간혹 포성이 나오기도 전에 몸을 땅에 엎드린 자도 있었습니다. 이에 신은 포를 쏠 줄 아는 중군(中軍)들로 하여금 화약을 재워 가르치도록 하였습니다. 또한 하리(下吏)와 관속(官屬)들을 뽑아 모두 포 쏘는 것을 익히게 하였더니, 부 안의 사람들 중에서도 익히기를 원하는 자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민간에 총을 가진 자가 매우 적은데, 본부에 있는 것은 겨우 5백여 자루여서 두루 나누어 주고 쏘는 것을 익히게 할 수 없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먼저 각 진보(鎭堡)에 있는 것을 주도록 하라. 그리고 경아문(京衙門)에서 이어서 보내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복양이 아뢰기를,
"바닷가에 제방을 쌓아 길을 통하게 한 곳 가운데 세 곳을 아직 쌓지 않았는데, 둘레가 거의 이십 리나 되니 또한 급히 쌓아야만 합니다."
하고, 두표가 아뢰기를,
"소신이 일찍이 병조 판서였을 때 재력(財力)을 모아 보내 거의 다 쌓았습니다. 선왕이 홍중보(洪重普)로 하여금 이 일을 주관하게 하였는데, 지금 복양이 세 곳을 쌓지 못했다고 하니, 애석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다 쌓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상이 또 이르기를,
"각 진보(鎭堡)의 형세는 어떠한가?"
하니, 중보가 아뢰기를,
"선왕께서 ‘적이 올 경우 망루가 없을 수 없다.’ 하시면서, 신이 유수(留守)로 있을 때 신으로 하여금 각보(各堡)를 창설해서 적의 상황을 살피는 곳으로 삼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경군(京軍)을 나누어 보내 파수하게 하였으므로 참으로 믿을 만하였습니다."
하고, 복양이 또 아뢰기를,
"본부에 저장되어 있는 화기(火器) 중에서 이른바 불랑기(佛狼機)는 대포 중에서 가장 성능이 좋은 것입니다. 경상 병영(慶尙兵營) 및 통영(統營)으로 하여금 동래(東萊)에 저장해 둔 구리와 쇠를 가져다가 수백 자루를 더 만들어 보내도록 하소서. 그리고 포 쏘는 것을 익힐 때에 화약이 부족하니 동래부에 있는 유황을 지금 마땅히 올려와서 호조로 하여금 많은 양을 나누어 보내게 하소서."
하니, 상이 허락하였다. 복양이 또 아뢰기를,
"신이 강도(江都)의 형세를 두루 보니, 둘레가 거의 3백 리에 달합니다. 그런데 각진(各鎭)이 혹 십 리 밖에 있기도 하고 혹 이십 리 간격으로 있기도 합니다. 그리고 산으로 서로 막혀 통해 바라볼 수가 없으니, 만약 적이 조강(祖江)으로부터 배를 탄 채 강물을 따라 내려온다면 곳곳에 정박할 수가 있어 방어하기 곤란합니다."
하니, 두표가 아뢰기를,
"평지에서도 싸울 수 있는데 더구나 적이 배를 타고 와 육지에 내릴 즈음에 어찌 공격할 수 없겠습니까. 만약 전혀 인력을 쓰지 않는다면 아무리 견고한 요새일지라도 적을 막을 수 없을 것입니다."
하였는데, 복양이 이어서 정포진(井浦鎭)의 형세가 하늘이 낸 요새지임을 극력 아뢰었다. 두표가 아뢰기를,
"유혁연(柳赫然)으로 하여금 가서 그 곳의 형세를 보게 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유수가 내려간 뒤 유혁연을 보내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복양이 또 아뢰기를,
"본부 사람 구원일(具遠一)은 정축년007) 갑진(甲津)이 함락될 때에 육지에 내려 싸우려고 유수에게 군사를 달라고 청하였습니다. 그러나 유수가 군사를 주지 않자, 원일은 성을 내어 크게 꾸짖고 물에 빠져 죽었습니다. 본부에서 절사(節死)한 세 사람 중에서 이 사람이 최고이기 때문에 맨 먼저 충렬사(忠烈祠)에 모셨던 것입니다. 그렇지만 나머지 두 사람의 경우는 자손의 진소(陳疏)로 인해 증직의 은택을 입었는데, 원일의 경우는 그의 자손이 미약하여 진달하여 청하지 못해 아직까지 증직을 받지 못했습니다. 이에 온 도의 사대부들이 모두 흠전(欠典)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하니, 상이 똑같이 증직하라고 하였다. 중보와 두표가, 양호(兩湖) 유생들이 황산 서원(黃山書院)의 사액(賜額)을 요청한 것에 대해 허락해 주라고 청하니, 상이 묻기를,
"서원은 언제 처음으로 만들어졌는가?"
하니, 허적이 답하기를,
"백록동(白鹿洞)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하였다. 상이 묻기를,
"무엇을 하려고 설치하였는가?"
하니, 두표가 아뢰기를,
"서원은 선현이 거쳐갔던 곳에 설치하기도 하고 혹은 거처했던 향리에 설치하기도 하여 선비들이 학문을 연마하는 장소로 삼고 있습니다."
하였는데, 상이 이르기를,
"내 생각에는 선비들은 의당 선성(先聖)을 가장 우러러 사모한다고 여겨지는데, 어찌하여 향교에 모여 독서하지 않고 반드시 서원에 들어간 뒤에야 유도(儒道)를 높이 받드는 것이 되겠는가. 내가 이 서원에 사액하는 것을 어렵게 여기는 것이 아니라 겹쳐서 설치하는 것은 불가하다는 것이다."
하였다. 호조 판서 정치화(鄭致和)가 아뢰기를,
"지난번 대간의 아룀으로 인하여 여러 궁가와 각 아문에서 절수(折受)한 해양(海洋)을 모두 혁파하였습니다. 이 때문에 임해군(臨海君)이 절수한 아산(牙山) 영공암(令公巖)의 해양도 혁파하는 가운데에 포함되었습니다. 그런데 중추부(中樞府)에서 세(稅)를 거두고자 입계하여 윤허를 받았습니다. 혁파하도록 하였다가 곧바로 세를 거두도록 허락하니, 일의 체계에 있어 온당치 못합니다. 추부(樞府)는 바로 대신(大臣)의 아문이므로 신들이 감히 방계(防啓)하지 못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대신이 계달했기 때문에 윤허했는데 사리에 있어 온당치 않으니, 시행하지 말라."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10책 10권 41장 B면【국편영인본】 37책 369면
- 【분류】왕실-의식(儀式) / 왕실-종사(宗社) / 왕실-행행(行幸) / 왕실-사급(賜給) / 군사-군기(軍器) / 군사-관방(關防) / 군사-병법(兵法) / 공업-장인(匠人) / 정론-간쟁(諫諍) / 사법-탄핵(彈劾) / 보건(保健) / 인사-관리(管理) / 광업(鑛業) / 수산업(水産業) / 과학-지학(地學)
- [註 007]정축년 : 1637 인조 15년.
○乙丑/上御宣政殿, 行常參。 大司諫金壽興進啓曰: "全羅道御史吳斗寅反庫時, 旣多不察之失。 至於笠巖山城軍器中, 前長城府使李河岳別備之物, 箇箇無形, 破毁軍器, 亦不修補, 山城改築, 有若兒戲。 且監司趙龜錫, 以實爲災之狀, 皆所目見, 而旣不備陳於書啓。 身爲諫職, 又不據實論啓, 只自私相傳說於縉紳間, 事極無據。 請吳斗寅罷職。" 上從之。 常參訖, 引見大臣及備局諸宰。 左相元斗杓曰: "癘疫方熾, 閭閻多未乾凈, 此時陵幸, 極爲悶慮。 原任大臣, 亦爲陳箚, 停寢似當矣。" 左參贊許積, 亦以此陳達。 上曰: "經年不得展謁於諸陵, 必欲爲之, 何可待其乾凈乎?" 積曰: "如不可停寢, 則經宿往返似好矣。" 禮判洪重普曰: "常時祭享, 例行於四更頭。 今則旣以經宿爲定, 差晩隨時行事, 似爲從容合宜矣。" 上曰: "四更行祭, 待明還宮可也。" 積曰: "陵幸經宿, 則內局提調一員, 當爲入直。 而大臣及都承旨, 勢難落後, 臣亦方以司僕提調, 有所幹。 前例以留都大將, 使之兼察矣。" 上曰: "依前例爲之。" 斗杓曰: "北路無弓匠, 且無弓角, 不能造弓, 不可每自京造送。 北道武士, 如古者山西將材, 不可不敎習弓矢。 而聞戶曹所儲弓角頗優, 送弓角與弓匠, 使之造弓宜矣。" 上曰: "不必送京匠, 可送外方匠人也。" 斗杓曰: "兩南則道里遼遠, 請使平安兵營入送匠人, 使兵判句管其事。" 上從之。 上問斗杓曰: "訓鍊都監硫黃貿來人, 將何以賞之?" 斗杓曰: "前者洪喜男硫黃貿來時, 其子加資, 喜男除拜同知。 今此李應祥, 則宜以加設僉知賞之也。" 上然之。 江華留守趙復陽, 以稟定江都事, 入侍, 進白曰: "江都軍兵, 技藝亦鹵莾。 臣到任之後, 別破陣、武學、束伍等試放, 則或有砲聲纔出, 而身已仆地者。 臣使中軍輩知放者, 藏藥而敎之。 且抄下吏、官屬, 皆令習砲, 則府內之人, 亦有願習者。 而民間持銃者甚少, 本府所儲, 僅五百餘柄, 不能遍給而習放也。" 上曰: "先以各鎭堡所在者給之。 又自京衙門繼送可也。" 復陽曰: "沿海防築通道處, 不築者三處, 而周廻幾二十里, 亦宜急築矣。" 斗杓曰: "小臣曾爲兵判時, 聚送財力, 幾盡築之。 先王使洪重普, 主管此事, 今者復陽, 以三處未築爲可惜矣。" 上曰: "畢築可也。" 上曰: "各鎭堡形勢何如?" 重普曰: "先王以爲: ‘賊來則不可無候望。’ 臣爲留守時, 令臣創設各堡, 以爲候望之地。 又分送京軍, 使之把守, 誠有可恃者矣。" 復陽又曰: "本府所儲火器中, 所謂佛狼機, 乃大砲之最善者。 請令慶尙兵營及統營, 取東萊所置銅鐵, 加造數百柄以送, 而習放之際, 火藥難繼, 東萊府硫黃, 今當上來, 請令戶曹, 多數分送。" 上許之。 復陽又曰: "臣歷覽江都形勢, 周廻幾三百里。 而各鎭或在十里之外, 或二十里。 且山麓相隔, 不得通望, 若賊自祖江乘船, 順流而下, 則處處可泊, 難以防禦矣。" 斗杓曰: "平地尙可戰, 況賊乘船下陸之際, 豈不能擊之乎? 若全不用人力, 則雖金城湯池, 亦不能禦賊也。" 復陽仍極言井浦鎭形勢之爲天險。 斗杓曰: "請使柳赫然, 往見其形勢。" 上曰: "留守下去後, 遣柳赫然可矣。" 復陽又曰: "本府人具遠一, 當丁丑甲津失守之時, 欲下陸力戰, 請兵於留守。 而留守不與兵, 元一發憤大罵, 投水而死。 本府死事三人中, 此爲第一, 故首入於忠烈祠。 而二人則因子孫陳疏, 得蒙贈爵, 元一則其子孫微弱, 不能陳請, 尙未贈職。 一島士心, 皆以爲欠典矣。" 上曰: "一體贈職。" 重普、斗杓請許兩湖儒生黃山書院請額事, 上曰: "書院創於何時?" 積曰: "自白鹿洞始矣。" 上曰: "欲何爲而設也?" 斗杓曰: "書院或設於先賢經歷之地, 或設於所居之鄕, 以爲士子藏脩之所矣。" 上曰: "予意則士子之所仰慕, 宜莫如先聖, 何不聚於鄕校, 而讀書必入於書院而後, 乃爲崇儒重道乎? 予非以此院之賜額爲難, 疊設不可也。" 戶判鄭致和曰: "頃因臺啓, 諸宮家、各衙門海洋折受, 竝爲革罷。 故臨海君折受牙山 令公巖海洋, 亦在革罷中。 中樞府欲收稅入啓蒙允。 而纔罷旋許, 事體未安。 樞府乃大臣衙門, 故臣曹不敢防啓矣。" 上曰: "大臣啓達, 故許之, 而事理不當, 勿施。"
- 【태백산사고본】 10책 10권 41장 B면【국편영인본】 37책 36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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