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정당에 나가 대신들을 인견하고 시정에 대해 논하다
상이 희정당에 나아가 대신 및 비국 재신들을 인견하였다. 영상 정태화가 아뢰기를,
"전일 사신이 왔을 때는 사사(査使)가 오지 않을 것이라고 하더니 지금 뇌자관(賚咨官)이 보고한 것을 보면 사사가 또 꼭 올 것 같습니다. 듣기에 그 나라 남방에 토적(土賊)이 있어서 병마(兵馬)를 조발하여 보냈다고 하고 또 심양(瀋陽)에도 급보가 있다고 들리는데, 만약 왈흡(曰哈)이 【왈흡은 바로 북녘 오랑캐 별종임.】 침범하였으면 틀림없이 우리 군대를 징발하도록 하였을 것이지만 아직 아무 소식이 없는 것을 보니 염려할 것 없겠습니다."
하고, 좌상 원두표는 아뢰기를,
"우역(牛疫)이 몹시 번져 부림 소가 다 죽고 가을갈이를 대부분 사람의 힘으로 하기 때문에 씨앗을 땅에 뿌려도 제대로 심어지기 어렵다니 참으로 작은 걱정이 아닙니다."
하고, 예조 판서 홍명하는 아뢰기를,
"우역이 그러하여 젖소가 많이 죽었기 때문에 우유도 올려올 수 없습니다."
하고, 이조 참판 조복양은 아뢰기를,
"우역뿐만 아니라 물고기도 다 죽고 심지어는 성 안의 까막까치도 드뭅니다. 이는 바로 보통 재변이 아니어서 사람들이 의구심에 차 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언젠가 보니 종묘 후원에 까막까치가 매우 많더니 요즘에는 보이지 않는다."
하였다. 태화가 아뢰기를,
"금원(禁苑)에만 새가 없는 것이 아니라 성 안에도 전혀 없습니다."
하고, 두표는 아뢰기를,
"새라는 것이 기운을 제일 먼저 타는 것이어서 그것이 오가는 것으로 길흉을 점칩니다. 성상께서 자리에 오르신 지 지금 5년이 되었는데 세운(歲運)이 계속 흉하여 백성들이 걱정과 원망을 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비록 그런대로 무사하다지만 외구(外寇)나 다른 재변이 없을지 어떻게 알겠습니까."
하였다. 두표가 또 아뢰기를,
"진휼청(賑恤廳) 당상관이 관서(關西)의 쌀을 옮겨다 쓰고자 합니다."
하니, 상이 공론은 어떠한가를 물었다. 이에 태화가 아뢰기를,
"신은 관서 백성들이 곤욕받을 것을 어려운 문제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또한 지금 강론하여 결정해야지만 비로소 진정(賑政)을 처리할 수 있을 것이니, 몇 섬으로 할지를 따라서 먼저 정해두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몇 섬이나 사용해야 하겠는가?"
하자, 대사성 민정중이 아뢰기를,
"1만 5천 섬은 가져야 할 것입니다."
하였다. 태화가 아뢰기를,
"비록 부득이하여 향곡(餉穀)을 가져다 쓰더라도 1만 섬을 초과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하니, 상이 허락하였다. 정중이 아뢰기를,
"비록 향곡을 이용하도록 허락하셨으나 각 아문의 은포(銀布) 및 평안도의 도요포(渡遼布), 병영에 저장된 군포(軍布)도 모두 적당량을 가져다 써야 할 것입니다."
하니, 상이 모두 허락하였다. 상이 신하들에게 묻기를,
"영중추부사가 【바로 이경석(李景奭)이다.】 일찍이 홍석범(洪錫範) 삭과(削科)에 대하여 그 억울함을 말하였는데, 그 문제는 어떻게 해야겠는가?"
하니, 태화가 아뢰기를,
"신 역시 삭과는 억울한 일이라고 생각하였는데, 그후에 들으니 그가 그의 숙부(叔父)가 죽은 지 겨우 13일 만에 부거(赴擧)하여 등과한 것이라 합니다. 지금 만약 복과(復科)시키면 풍교(風敎)를 장려하는 뜻이 아닙니다."
하고, 명하도 복과시켜서는 안 된다고 하니, 상이 그러면 그만두라고 하였다. 병조 판서 김좌명(金佐明)이 아뢰기를,
"금군(禁軍)에 준 국마(國馬)가 체구가 왜소하여 전마(戰馬)로는 맞지 않습니다. 듣기에 각처 목장에는 전마로 합당한 것들이 많이 있다고 하니, 지금은 목장의 말로 나누어주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니, 상이 허락하였다. 좌명이 또 아뢰기를,
"금군 중에 옷가지가 홑으로 얇은 자들에게는 본조에서 옷감을 주도록 하여 선왕조의 고사(故事)를 따르소서."
하니, 상이 또한 허락하였다. 사간 민유중(閔維重)이 아뢰기를,
"고 통제사 충무공 이순신 사우(祠宇)로 남해(南海)의 노량(露梁)에 있는 것에는 일찍이 충렬(忠烈)의 액(額)을 이미 내린 바 있으나, 지금 듣건대 통영(統營) 역시 순신이 창건한 것이기 때문에 장사(將士)들이 이미 사우를 건립하여 모시고 있다고 합니다. 노량의 예대로 충렬의 액을 아울러 내리소서."
하니, 상이 허락하였다. 유중이 또 아뢰기를,
"석실 서원(石室書院)의 【석실은 김상용(金尙容)·김상헌(金尙憲)의 서원이다.】 사액(賜額) 치제(致祭) 때 감사가 집사를 수령으로 차출하여 보내지 않고 그 고을 경내의 전직 관원으로 차출하여 정하게 했다니 이미 터무니없는 일인데, 본관(本官)에서도 전직 관원으로 정하여 보내지 않고 제생(諸生)들을 집사로 충원하였으며 제문(祭文)에 있어서는 그게 바로 왕언(王言)인데도 역시 유생(儒生)을 시켜 낭독하게 하였다니 전례(典禮)로 보아 어떻게 그럴 수가 있겠습니까. 더구나 제물(祭物)이나 의물(儀物)도 갖추어지지 않아 더욱 태만함을 나타냈으니, 경기 감사 오정일(吳挺一)을 추고하고 양주 목사 민희(閔熙)는 파직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부제학 유계가 아뢰기를,
"선왕조에서 균전(均田)에 관하여 논의할 때 하교하시기를 ‘전지 측량 이후 신결수가 구결수보다 비록 갑절이 많더라도 민역(民役)을 쓰는 일은 꼭 구결수에 의하여 하라.’ 하셨는데, 신이 그 하교를 언젠가 누구를 대하여 말하였더니 경기의 백성들이 듣고는 삶에 용기를 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들으니 12말로 정하였다고 하니 이는 백성에게 크게 신의를 잃을 일입니다. 신결수가 구결수에 비하여 비록 갑절이 되지 않아도 민간이 내놓을 쌀이 5만 섬 가까이 될 것이어서 백성들이 틀림없이, 국가가 곡식을 많이 받아내기 위하여 전지 측량을 하였다고 할 것이니 그 비방을 무슨 수로 풀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 말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는가?"
"신들의 생각도 그렇습니다. 그런데 그 일을 맡은 신들이 모두 12말로 하는 것이 편리하다고 했기 때문에 신들도 그대로 따랐던 것입니다."
하고, 좌명은 아뢰기를,
"쌀 12말을 징수하되 모든 잡역(雜役)을 그 속에다 포함시키면 백성들도 편리하다고 생각할 것 같기 때문에 신들이 12말로 정할 것을 청하였던 것인데, 지금 유계는 신의를 잃을 일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선왕조 때 전지 측량을 청했던 이가 신의 아비이고 10말이 편리하다고 주장한 이도 신의 아비였습니다. 지금 신 역시 12말을 주장할 입장이 아니지만 다만 백성의 편의를 위하여 그 말을 했던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부제학 의 말을 놓고 다시 의논해보라."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9책 9권 41장 B면【국편영인본】 37책 343면
- 【분류】교육-인문교육(人文敎育) / 외교-야(野) / 왕실-사급(賜給) / 농업-축산(畜産) / 농업-양전(量田) / 구휼(救恤) / 풍속-예속(禮俗) / 재정-국용(國用) / 재정-역(役) / 군사-군역(軍役) / 군사-중앙군(中央軍) / 교통-마정(馬政) / 사법(司法) / 인사-관리(管理) / 인사-선발(選拔)
○己亥/上御熙政堂引見大臣及備局諸宰。 領相鄭太和曰: "前日使臣之來, 云査使不來, 今見齎咨官所報, 似當有査使矣。 聞彼國南方有土賊, 調送兵馬, 且聞瀋陽有急報, 〔若〕 曰哈 【曰哈, 乃北夷別種。】 侵犯, 則必徵兵於我, 而尙無聲息, 不足慮也。" 左相元斗杓曰: "牛疫甚熾, 耕牛盡斃, 秋耕多以人耕, 故播種亦難入土, 誠非小慮。" 禮判洪命夏曰: "牛疫如此, 乳牛多斃, 駝酪不可進御也。" 吏曹參判趙復陽曰: "非獨牛疫, 魚鱉皆死, 至於城中, 烏鵲亦稀少。 此乃非常之災, 人心疑懼矣。" 上曰: "嘗見宗廟後苑, 烏鵲甚多, 近來不見矣。" 太和曰: "非但禁苑無鳥, 城中亦絶無矣。" 斗杓曰: "禽鳥, 得氣之先者也, 以其去來, 可占吉凶。 聖上臨御, 于今五載, 歲運連凶, 百姓愁怨。 今雖姑息無事, 安知無外寇他變乎?" 斗杓又曰: "賑恤廳堂上, 欲移用關西之米矣。" 上曰: "群議如何?" 太和曰: "臣以西民受困爲難, 而亦必及今講定, 方可料理賑政, 不可不先定石數矣。" 上曰: "當用幾石?" 大司成閔鼎重曰: "當用一萬五千石。" 太和曰: "雖不得已取用餉穀, 不可過一萬石矣。" 上許之。 鼎重曰: "餉穀雖許取用, 各衙門銀布及平安道渡遼布, 兵營所儲軍布, 皆當量宜取用。" 上皆許之。 上問諸臣曰: "領中樞府事 【卽李景奭也。】 曾言, 洪錫範削科之冤, 事當如何?" 太和曰: "臣亦以削科爲冤矣, 其後聞其叔父, 死纔十三日, 而赴擧得科。 今若復科, 則非所以奬勵風敎也。" 命夏亦以爲, 不可復科, 上曰: "然則置之。" 兵判金佐明曰: "禁軍之所授國馬, 多體小, 不合戰馬。 聞諸處牧場, 多有可合戰馬者, 今後宜以牧場馬分給矣。" 上許之。 佐明又曰: "禁軍中衣裝單薄者, 請自本曹, 給其衣資, 以遵先朝故事。" 上亦許之。 司諫閔維重曰: "故統制使忠武公 李舜臣祠宇, 在於南海之露梁者, 曾已賜額忠烈矣, 今聞統營, 亦舜臣所創, 故將士亦已立祠尊奉云。 請依露梁例, 竝賜忠烈之額。" 上許之。 維重又啓曰: "石室書院 【石室, 卽金尙容、尙憲書院。】 賜額致祭時, 監司不以守令差送, 執事以本州境內前銜官差定, 已極無據, 而本官亦不定送前銜官, 以諸生充備執事, 至於祭文, 乃是王言, 亦使儒生宣讀, 求之典禮, 豈容如是? 況祭物、儀物之不備, 尤見其怠慢, 請京畿監司吳挺一推考, 楊州牧使閔熙罷職。" 上從之。 副提學兪棨曰: "在先朝, 議均田之時, 下敎曰: ‘量田後, 新結雖倍於舊, 民役之用, 當以舊結。’ 臣以此聖敎, 亦嘗對人而言, 則畿民聞而鼓舞矣。 今聞以十二斗爲定云, 失信於民大矣。 新結雖不倍舊, 民間出米, 當近五萬石, 民必曰, 國家爲得穀之多, 爲量田, 將何以解其謗乎?" 上曰: "此言何如?" 太和、斗杓曰: "臣等之意, 亦如此。 而任事之臣, 皆以十二斗爲便, 故臣等亦從之矣。" 佐明曰: "十二斗收米, 而雜役竝入其中, 則民情庶可爲便, 故臣等請以十二斗爲定, 今棨以失信爲言。 在先朝, 請爲量田者, 臣父也, 以十斗爲便者, 亦臣父也。 今臣不當以十二斗爲言, 而只爲便民, 乃爲此說矣。" 上曰: "第以副學之言, 更爲相議。"
- 【태백산사고본】 9책 9권 41장 B면【국편영인본】 37책 343면
- 【분류】교육-인문교육(人文敎育) / 외교-야(野) / 왕실-사급(賜給) / 농업-축산(畜産) / 농업-양전(量田) / 구휼(救恤) / 풍속-예속(禮俗) / 재정-국용(國用) / 재정-역(役) / 군사-군역(軍役) / 군사-중앙군(中央軍) / 교통-마정(馬政) / 사법(司法) / 인사-관리(管理) / 인사-선발(選拔)